-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1/01 12:30:11
Name   *alchemist*
Subject   [조각글 2주차] Lily
주제 :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소재로 가사를 글속에 넣든 그 아티스트를 넣든 자유롭게 한페이지에서 두페이지 정도로 적어주세요. 대신 제목에 박아넣고 쓰시면 안돼요 그게 소재가 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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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런던행이 결정되었다. 런던 주재원 신청한 지 1년이 되도록 아무 언질이 없었기에 안되는가 보다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력팀장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3주 내로 나가라고 하신다. 그토록 바라던 런던 주재원 생활이긴 한데 이런식으로 갑자기 통보를 받으니 당황스럽다. 일단 팀장님께 상황 보고를 드렸다. 팀장님은 이미 알고 계시는지 준비 잘하라고, 오늘 업무 얼른 마무리되는 대로 일찍 들어가서 주재원 생활 잘 준비하라고 격려를 해주신다. 불금날, 모두의 기대와 부러움이 등 뒤에 살벌하게 꽂히던 업무 시간이 끝나고 시선이 무서워 쫓기듯 사무실을 나와 퇴근 버스를 탔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평소 주전부리와 음식재료들을 많이 샀던 사장님께 부탁해 짐을 쌀 빈 박스와 스카치테이프를 구했다. 평소에 인사도 잘하고 물건을 많이 사서 그런가 박스 좀 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신다. 집 안의 짐을 살펴보니 짐 꾸릴 생각에 새삼 한숨이 나온다. 부득이하게 집에서 독립하여 산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지라 짐이 엄청나게 많이 불어 있다. 어차피 서울에 집을 둬봐야 쓸 데도 없으니 일단 시골에 계신 부모님 집에 웬만한 짐은 가져다 놔야 할 것 같다. 부피는 작지만 무거운 책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을 정리하던 중 한 소설책이 눈에 띈다. ‘1Q84’ 그녀에게 빌려온 책이다. 책장 아래쪽에 처박아놓고 있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책을 보자 내 머리 한켠에 처박아 둔 그녀에 대한 생각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던 날, 그렇게 격렬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그 날의 기억, 그리고 그녀와의 농밀한, 짙은 달의 기억까지. 그러고 보니 이 책 말고도 이것저것 빌려온 게 많다. 그림 그리겠다고 빌려온 파스텔, 같이 그림 그린 스케치북, 이어폰 등 자잘하게 가짓수가 많다. 이런저런 그녀가 남겨둔 물건들을 모아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려고 봉투를 여는 순간 멈칫하였다. 지금이야 헤어졌고 남남이고 나랑 상관없는 사이지만 그녀와 나의 추억이 남은 이 물건, 내 물건도 아닌 이 물건들을 이렇게 버려도 될까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1년이 지났지만 아직 핸드폰에서 그녀 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그녀의 번호를 다 눌러놓고 또 한참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는 앞으로 3년간 해외 생활을 해야 하는데 최소한 나간다는 사실을 인간 된 도리로써 그녀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통화음이 가고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하는데 누구 전화인지 궁금해 하는 눈치다. 나라고 말하니 그제야 나인지 알고 전화번호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새 까맣게 잊어버렸구나 싶어 내심 섭섭했지만 표현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런던으로 3년간 주재원 생활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고 말을 했다. 그녀는 잘되었다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주재원 생활 때문에 이사 준비 중인데 우리 집에 너의 물건이 몇 개 남아 있어 이걸 버릴까 돌려줄까 고민하다 전화를 했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물어보더니 돌려달라고 말하였다. 혹시 지금 시간 되느냐고 물어보니 지금 다행히 시간이 되니 만나자고 하였다. 그녀는 마침 신촌에 있고 쇼핑 중인데 1시간쯤 걸릴 것 같으니 끝나는 대로 U-Plex 앞 파이프 조형물에서 만나자고 하 였다. 나는 그때까지 나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짐을 정리하느라 방도 엉망이고 그 덕에 얼굴, 손에 먼지가 가득했지만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한다. 간단히 세수하고 화장품을 챙겨 바른다. 옷은 아직 포장하지 않은 것 중 나름 예쁜 것으로 골라 갈아입었다. 아무리 헤어진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람 만나는데 기본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았다. 비록 그 사람과 볼 것 못 볼 것 없이 서로간에 공유한 것들이 많은 사이였어도 말이다. 그리고 작은 종이가방을 찾아 그녀의 물건을 집어 넣었다. 빼먹은 것이 없나 꼼꼼히 살펴 보았다. 다 챙겼다. 빠진 게 없어 보인다. 단화를 꿰어 신고 가방을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걸음을 약간 빠르게 해서 걸어가면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할 것 같다.

U-Plex 가 저기 즈음 보이는 순간 그녀의 전화가 왔다. 자기는 벌써 쇼핑 끝마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냐고 얼마쯤 걸리느냐고 물어온다. 나도 모르게 예전 사귈 때 통화하던 것처럼 10분쯤 걸릴 거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스스로 너무 부드럽게 말한 것에 화들짝 놀랐지만, 그녀는 알았다고 빨리 오라고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괜히 부드럽게 말한 것 같다. 안 그래도 되는데. 1년이 지났건만 나는 전화번호도 그녀와의 추억도, 다른 기억도 떨쳐내지 못한 것 같다.

U-Plex  파이프 조형물 앞에서 그녀는 여전히 예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쑥한 회색 재킷에 하얀 프릴 블라우스, 짙은 갈색의 타이트한  H라인 스커트에 까만색 힐을 신은  그녀는 종이 가방을 몇 개 들고 있었다. 아마 회사 끝나고 퇴근한 다음 쇼핑을 했나 보다. 나는 손을 흔들어 그녀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녀는 또 그 예쁜 미소를 배시시 지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에 눈에 띈다. MARC JACOBS가 적혀 있는 작은 종이 가방이다.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 가방 안에는 누군가에게 선물할 Daisy 향수가 들어있을 것 같다. 다른 가방은 CHANNEL 마크가 있는 더 작은 종이가방이다. 저건 본인이 사용할 립스틱인 것 같다. 쇼핑한 가방들을 보니 문득 아무래도 그녀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들고 온 종이 가방을 건네었다. 그녀는 가방 안을 살펴 물건을 확인하더니 안 버리고 잘 가지고 있어 줘서 고맙고 돌려줘서 더 고맙다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감사의 의미로 내가 좋아하는 백합꽃 한 다발을 건네 주었다. 그녀는 향이 좋고 꽃이 큰 백합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커피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본다. 그녀와 앉아 이야기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녀에게 짐을 싸야 해서 커피 마실 시간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나에게 몸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말하면서 두 손 가득한 가방을 잠시 바닥에 내려두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나를 안아준 그녀에게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잡은 손을 놓고 잠시 흔들고 잘 다녀올게 잘 다녀와 라고 의미 없는 인사말 몇 번을 하고 우리는 작별을 했다.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걷는 거리에 바람이 살짝 분다. 바람은 내 긴 머리카락과 원피스 치맛자락을 흩어 놓았다. 바람이 시원한 게 참 좋다. 하늘에는 태양이 붉은빛을 온 세상에 뿌리며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느라 생기가 넘친다. 거리에 예쁜 옷도 많고 예쁜 구두도 많으니 나중에 혼자 와서 꼭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돌아오는 길을 홀로 걸으며 혼자가 된 자신에 살짝 감탄을 하였다. 스스로가 약간은 대견하게 느껴져 조금 웃어보았다.

집에 돌아와 짐을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준 꽃을 꽃병에 꽂으니 온 방에 향이 가득하다. 짐이 참 많다. 바쁘게 챙겨야 할 것 같다. 바쁘게 짐을 꾸리는 와중에 왠지 적적해서 컴퓨터를 켜고 가지고 있는 음악들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몇 번 노래가 나온 이후, 백합 향이 물씬 진하게 풍겨 나오면서 익숙한 피아노 멜로디, 기타 소리의 인트로가 나왔다. 이어 자기 일인데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일이 아닌 양 노래하는 재능이 출중한 계피 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멀어진 그대 모습이 이토록 슬픈 건 계피 양의 말대로 그녀와 나는 한때는 그 누구보다 그녀와 나는 가까웠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방학 - 근황

잡은 손을 놓고 잠시 흔들고
의미 없는 인사말 몇 번으로
이별은 이뤄지고

돌아오는 길을 홀로 걸으며
혼자가 된 자신에 감탄하며
조금은 웃었다고

만남이라는 사치를 누리다
헤어짐이라는 오만을 부린 우리
한 사람이 떠나갈 땐 참 많은게 떠나

다들 잘 지내나요 난 별 일 없는데
다들 행복한가요 난 웃고 있는데
세상 속 우리 모습이 이토록 슬픈 건
내 못난 마음이 잔뜩 흐려져서겠지

만남이라는 사치를 누리다
헤어짐이라는 오만을 부린 우리
한 사람이 떠나갈 땐 참 많은게 떠나

그댄 잘 지내나요 난 별 일 없는데
정말 행복한가요 난 울고 있는데
멀어진 그대 모습이 이토록 슬픈 건
한때는 그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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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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