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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9/25 13:59:16
Name   하마소
Subject   아내는 아직 아이의 이가 몇 개인 지 모른다
솜이의 이가 4개가 되었다.

세 번째 아랫니와 첫 윗니가 잇몸을 뚫고 아주 조금 모습을 보인 게 드러난 건 여느 때처럼 솜이의 눈에 안약을 넣던 중 여느 때와 달리 심한 괴로움에 소리치는 모습에서. 크게 벌린 입으로 으앙 하며 울음을 내뱉는 동안 새로운 이들이 속삭이듯 눈에 들어왔다. 정신 없겠지만 우리도 나와있다는 듯, 놀라운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듯 속삭인다. 함께하는 시간은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모든 성장은 단면인 것. 그래서 그 단면들은 언제나 놀랍다. 그 때마다 경외의 경탄을 머금으며 이는 오늘도 예외가 아닌 것. 주방에서 이유식을 만들던 사모님을 향해 외친다.
"우리 솜이 이가 벌써 4개나 났네!"
그러자 들려온 응답은 뜻밖의 놀라움이다.
"와 벌써? 이번엔 어디가 났지? 신기하다. 우리 솜이가 정말 잘 크고 있구나!"
순간 몰려오는 의아함을 겨우 억눌렀다. 약간은 이상한 기분이 스미는 걸 느끼다 겨우 정신을 차린다.



아이가 생긴 우리 부부에게 허락된 육아를 위한 시간은 여느 가정과 그리 다르지 않은, 심지어 좀 더 열악한 느낌이었다. 특히 통근거리가 긴 남편 - 그러니까, 나 - 에게 있어 솜이와의 평소 왕래는 아마도 생후 100일이 지나 일과가 확립된 이후를 기준으로 아침에 눈을 뜬 이후 1-2시간과, 그리고 재우는데 걸리는 시간을 포함하여 저녁에 잠들기까지의 1-2시간에 불과하니까.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집중해서 애착을 형성하려 하지만 미숙함이 걷히지 않는 건 그저 나의 문제다.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우리 기특한 솜이는 아빠의 곤란함을 몸으로 알아채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7개월이 의연해봐야 어느 정도일까. 이따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모님의 도움에 온전히 의지해야할 경우가 잊을만하면 생겨난다.

어제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자라는 이 시기의 아이에겐 하루조차 긴 시간이기에, 주말 동안의 익숙함이 주중을 보내는 새 흩뿌려져 사라진다. 친해졌다 생각한 아빠의 오만함이 공백에 가까운 평일 간의 거리로 인해 깨우침으로 바뀌는 건 매주 반복되어온 일이니까. 그런 한 주들이 중첩되어 가며, 이를테면 사모님과 솜이의 목욕을 시키는 동안 이야기하는 솜이의 모습들에서 과거분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을 입에 담는 건 주로 사모님의 몫이다. 그러다보면 주말이 바빠진다. 모르는 새 훌쩍 자라 달라진 모습들을 따라잡아야 하니까. 그래서 새로운 정보에 신기해하거나 혹은 걱정하거나, 또는 의문을 갖는 일은 주로 나의 몫이다.

내가 먼저 알게 된, 사모님이 전혀 모르는 솜이의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신기하고, 생경하며 그래서 순간 놀랐다. 이런 중요하고 새로운 일이 사모님에게서 여태 몰랐던 일이라는 게. 그러다 잠깐, 한 땀 정도 더 생각해보고 나니 그리 놀랄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과 만나고, 이내 머릿 속 괜한 호들갑에 머쓱해진다. 그러니까, 7개월 아이를 키워본 일이 있는 분들께서 많이들 동의할 점일지는 모르겠지만, 아기의 입안을 자세히 볼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고 있거나, 혹은 그래. 오늘 내 앞에서 처럼 힘겨움에 오랜 울음을 토할 때 정도. 가뜩이나 이앓이 덕에 한시도 쉬지 않고 잇몸을 매만지는 혀를 생각하면 훤히 드러난 이와 마주하는 건 아이의 기분이 특별히 나쁘지 않은 이상 꽤 어려운 일이 맞다.



사모님은 아이를 참 잘 돌본다. 솜이가 어지간한 짜증을 넘어선 힘겨움을 호소하는 듯 보일 때도 가만히 안아 토닥이면 울음이 몇 초 이상 지속되는 일이 없고, 엄마와 함께하는 동안의 솜이는 칭얼거리는 일 조차 드문 편이니까. 그렇다고 흔한 말로 떠받드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손탄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땅을 못 디디게 많이 안아주는 것도 아니고, 병원도 꼭 필요할 때만 데려가려는 성향이니. 어떤 측면에서든 과잉은 지양하려는 주의라고 해두자. 어쨌든, 그런 엄마와 솜이는 애착이 나름 든든한 지지의 영역에 들어선 듯 하다.

사실 솜이는 꽤 순한 아이구나, 라는 평을 듣는 편이다. 사람 많은 곳의 소음 속에서도 조명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만큼,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낮잠을 자는 모습은 상황에 굴하지 않는 풍모를 대변하는 소재로 자주 쓰이곤 한다. 그래서 사실 누가 이 아이와 만났어도 크게 다를 바 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였으리란 생각은 이따금 기억 안나는 누군가가 던지고 가는 "얘는 키우기 쉽겠네~" 같은 말들과 만나 혹여 모를 우리 - 특히, 나 - 의 부덕함을 자극하는 단서가 된다. 그 때, 언젠가 들은 지인으로부터의 한마디는 꽤나 큰 힘이 되고 있다. "솜이가 이렇게 순하고 평온해보이는 건 사실 엄마 아빠가 이 아이가 뭘 원하는 지, 어떤 점이 어려운 지 그만큼 잘 파악하고 짚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고. 그렇다. 아니, 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엄마는, 그러니까 사모님은 참 그렇다. 그래서 어려움이 보일 때 잽싸게 안아올리는 것도, 때로의 지속되는 칭얼거림에도 눈맞춤만을 유지하며 홀로 된 움직임을 독려하는 모습에도 걱정이 느껴질 때는 그다지 없다. 그럴 만하니 그런 걸테니까.

나와 둘만의 시간을 갖던 중 크게 우느라 잠깐 드러났던 이가, 이내 혀와 입술 아래로 자취를 감춘다. 신기한 마음에 얼른 울음을 멈추려 다독이며 이를 사모님께 고하고, 사진을 찍어보려 하니 도통 드러나지 않는다. 아쉬움을 토로하자 사모님께선, "뭐 못볼 수도 있는거지." 아 그런가. 기분 좋을 때 짓는 미소에서도 잇몸을 연신 혀로 긁어내는 이앓이의 시기를 겪다 보면 그저 '잘 자라고 있겠지'의 마음으로 아이의 평온을 반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는 듯 싶다. 그래. 겨우 4개 짜리 이일 뿐이다. 못 보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이를 못봐도 상관없을 정도로 건강하고 평온하며 즐겁게 맞이하고 있는 성장을 돕는 일이다. 어쩌면 지금껏 모르고 있던 건 그만큼 필요한 일이 온전히 이행되고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될 듯 싶다.

문득 떠오르는 예전 학과 후배 누군가가 있다. 학내의 모든 모임에 참가해서, 모든 이들의 대화를 새겨듣고 그게 실언 내지는 발설하고 싶지 않은 치부일 지라도 반드시 기억해두는 그런 녀석이었다. 언젠가 그런 말단부의 정보마저 흘려두지 않고 긁어가는 이유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돌아온 답변은 '원래 친한 사람일 수록 모든 걸 다 아는 법이지' 라는 생경하다 못해 조금 섬뜩해지는 응답이었다. 그 녀석은 그렇게 모은 정보로 아직 그 모든, 내지는 그가 원하는 대상과의 교분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니, 생성하기는 했을까 모르겠다. 물론 솜이의 일과 특별히 연결점이 있을 법한 기억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7개월 아이를 키우는 동안 모르고 넘어가야 할 치부나 실언 따위가 대체 뭐가 있을까. 다만, 사모님과 솜이의 각별한 유대를 보며 느끼는 건, 꼭 알아야 할 진짜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꼭 필요한, 그래서 당위적으로 알아야할 것들은 어떻게든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우리가 제대로 된 역할 내의 입장이 맞다면.



어쨌든, 아직도 사모님은 아이의 이가 몇 개인 지 모른다. 아니 알긴 하겠다. 내가 알려줬으니까. 직접 본 건 이걸 쓰고 있는 지금까지는 없다고 해두자. 그리고 그건 아이와 함께하는 앞으로의 우리 모든 생에서 꽤 중요한, 중요하지 않은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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