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4/02/05 10:36:45수정됨
Name   카르스
Subject   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0. 지금까지 구독하고 있거나, 구독 경험이 있거나, 최소한 기사를 많이 읽어본 언론들을 종합하자면, New York Times(NYT), Financial Times(FT), Washington Post(WaPo), Wall Street Journal(WSJ), Foreign Policy(FP), Foreign Affairs(FA), The Economist, The Atlantic, Project Syndicate(PS), Unherd(대안언론) 등이 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이 있음에 유의해주길 바란다.


1. 개인적으로 느끼는 한국 언론의 제일 큰 문제는 의외로 수준이 아니다. 물론 NYT, WSJ, FT, The Economist, 자이퉁, 르몽드 같은데랑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같은데를 비교하자면 민망한 수준이다. 하지만 모든 서구 언론이 이 정도 수준은 절대 아니며 도리어 소수에 가깝다. 판매부수로 따지면 ABC, NBC, USAToday같은 일상지나, The Sun, Bild, New York Post(New York Times와는 엄연히 다르므로 주의) 같은 싸구려 타블로이드들이 훨씬 많다. 이런 착시 현상은, 한국 언론 후졌다고 비평하면서 동시에 해외 외신을 읽을만한 국내 지식인들은 NYT, FT, The Economist, WSJ, WaPo같은 걸 읽지 USA Today, NBC, The Sun, New York Post 같은 걸 읽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지 길거리에서 팔리는 언론들에 접근성도 없고, 성향도 맞지 않는다.

이런 언론들의 행태를 보고, 영미권 커뮤니티에서 네티즌들이 3류 언론의 제목장사질에 낚여서 폭사하거나 박제해서 조롱하는 걸 보면, 어떤 면에서는 한국 언론이 나아 보인다. 농담 아니고 진심이다. 한 예로, 영미권에서는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생)가 특정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 그 산업이 망한다는 비하적인 뉘앙스의 기사들이 하도 판을 쳐서 'Millennial kills everything' 밈이 돌아다닌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상응할만한 청년세대 비하 시리즈물을 본 기억이 없다. 도리어 "청년들이 불쌍해서 어떡해" 같은 기사가 유행이지.

(추가) 한국 언론의 몇몇 저급한 행태는 해외의 저급한 언론들 덕에 가능하다. 거기서 내는 저급한 기사들을 퍼와서 조회수 장사하면 되니.


2. 정치적 편향성은 어떤 면에선 한국이 더 낫다. 보수 언론지인 조중동에서 읽을 수 있는 기사 상당수는 진보 언론지인 한겨레 경향에서도 볼 수 있다. 조중동은 수구 구태스러운 칼럼도 많지만, 비혼 출산을 받아들이자는 식의 (한국적 맥락에서) 진보적인 칼럼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영미권 언론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일간뉴스가 아니라면 자기 진영에 불리한 이슈는 죽어도 언급 안 하고, 대놓고 이 언론은 특정 후보 지지한다는 선언이 가능한 동네다. 더 나아가, 언론의 탈을 쓴 가짜뉴스의 영향력은 한국이 양반으로 보일 정도다.

고백하자면, 편향성 때문에 NYT 같은 언론에 지쳐서 구독 끊을까 고민 중이다. 국제 뉴스/칼럼은 서구 지식인 특유의 깔아보는 시선으로 가득하고(한국을 보도하는 걸 보면서 느꼈다. 다른 나라들 보도도 다 이런 식이겠지), 트럼프 절대 안된다고만 말하며 밑도끝도없이 '미국 잘나가는데 왜이리 불만임?' 모드고(크루그먼 형님 하...), 지금의 미국 현실과 민주당 문제에 대한 성찰은 뭣도 없고, 무엇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보도에서 친이스라엘 편향성은 하... 농담 안 하고, NYT의 친이스라엘 보도 행태는 국내 언론들의 윤석열 행보 미화보다 한술 더 뜬다. 편집자들에게는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단어 편집하고 선택하느라 고생 많겠다는 생각만.


3. 진짜 한국 언론의 문제는, 서구 선진국들과 달리 퀄리티든 정치성향이든 차별화가 너무 안 되었다는 데 있다. 식자층이 보는 고퀄리티 언론 vs 비식자층도 보는 중저퀄리티 언론, 그리고 진보좌파 언론 vs 보수우파 언론 간의 차별화가 너무 되지 않았다. 한국 언론들은 차별화 수준이 약하여 획일화되어 있다. 그 덕에 한국은 영미권에 비해 타블로이드 언론들이나 가짜뉴스의 폐해는 적은 편이지만, 그 대신 NYT, FT, The Economist같은 양질의 언론도 절대 나올 수 없다. 광고 의존도가 높은 언론 수익 모델, 높은 포털 의존도, 한국어의 시장규모 한계, 해외 외신 복붙 수준의 국제면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론 그렇다.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에서는 가끔 NYT WSJ에 안 꿀릴만한 양질의 특종보도를 낸다. 그와 동시에 서구권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이나 올릴 함량 미달 기사들도 많이 낸다. 특히 정치와 경제면에서 타블로이드스러운 행태를 안 보이는 언론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한국 언론 수준이 낮다기보다는, 거의 모든 언론들이 브로드시트와 타블로이드를 섞은듯한 행태를 보이는 문제가 크다. 적어도 서구권에서 고급 언론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타블로이드스런 행태를 안 보인다. 특히 조선일보가 자회사인 조선NS를 두어 타블로이드성 기사를 잔뜩 만드는 행태는, 할많하않...


바로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한국 언론 지형이 꼭 나쁘지만은 않지만 그 댓가로 식자층이 마음놓고 읽을 언론을 찾기 힘들다. 한국 언론 지형이나 언론의 행태가 불만족스럽다면, 이런 전반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외국의 고급 언론조차 수익이 안 나서 구조조정하는 시대, 이게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1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449 일상/생각지난 연말에 한달간 업장에서 바하밥집 기부 이벤트를 했습니다. 13 tannenbaum 24/02/11 1825 49
    14448 기타이스라엘의 한니발 지침(Hannibal Directive) 4 은머리 24/02/11 1707 6
    14447 도서/문학최근에 읽은 책 정리(프로그래밍 편) kaestro 24/02/10 1455 1
    14446 도서/문학최근에 읽은 책 정리(만화편)(2) 2 kaestro 24/02/09 1427 1
    14445 도서/문학최근에 읽은 책 정리(만화편)(1) 6 kaestro 24/02/09 1480 1
    14444 기타제66회 그래미 어워드 수상자 4 김치찌개 24/02/09 1339 1
    14443 일상/생각안전한 전세 월세 계약하는 방법 2 게이득 24/02/08 1641 0
    14442 IT/컴퓨터천원돌파 의존성 역전 17 kaestro 24/02/08 3491 1
    14441 일상/생각방학중인 아들을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봤어요. 2 큐리스 24/02/07 1256 3
    14440 일상/생각대전을 떠나면서 5 활활태워라 24/02/06 1679 0
    14439 과학/기술자율주행차와 트롤리 딜레마 9 서포트벡터 24/02/06 1809 7
    14438 도서/문학《서른의 불만 마흔의 불안》 - 40대 부장’님’의 재취업기 (도서 증정 이벤트 5) 2 초공 24/02/06 1235 0
    14437 영화영화 A.I.(2001) 15 기아트윈스 24/02/06 1792 21
    14436 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734 12
    14434 음악[팝송] 제가 생각하는 2023 최고의 앨범 Best 15 4 김치찌개 24/02/04 1721 7
    14433 일상/생각AI가 일도 대신해주는 세상이 오나봅니다. 6 냥냥이 24/02/03 1897 2
    14432 오프모임[벙개] 똘배님과 함께하는 온리모임 (24/02/03 오후7시 Bar틸트) 21 Only 24/02/02 2006 2
    14431 꿀팁/강좌암기는 귀찮은 나를 위한 스페인어 공부 계획 6 보리건빵 24/02/02 1980 0
    14430 육아/가정자폐아이의 부모로 살아간다는건... 11 쉬군 24/02/01 2625 66
    14429 일상/생각집 밖은 위험합니다 1 mathematicgirl 24/02/01 1420 1
    14428 일상/생각딸내미 둘이 함께 만든 선물 3 큐리스 24/02/01 1370 8
    1442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4241 35
    14426 역사역사 관련 책들을 안읽게 된 계기 4 danielbard 24/01/31 2685 18
    14425 일상/생각코드와 글의 경계에서(나는 왜 글을 계속 쓰려하는가) 2 kaestro 24/01/31 1337 3
    14424 도서/문학《서른의 불만 마흔의 불안》 - 나의 자랑 해방일지 (도서 증정 이벤트 4) 초공 24/01/31 1082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