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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8/02 23:31:30수정됨
Name   골든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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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통닭마을


새로 남자친구가 아파트 월세를 구해왔다. 나와 내 강아지에게 더 안정된 환경을 주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맹세코 전혀 푸쉬한 게 없었음(?) 라고 말하긴 좀 그렇고. 이런저런 사람들 내가 부러워하던 게 입김이 닿았나보다. 결국 내 탓이오 내 탓이로다 (?) 외치며 입주하고, 입주 청소하고, 개는 신나서 이 방 저 방 똥오줌 한번씩 쏘면서 신나서 뛰어다니고, 우리는 호랑이 그림을 침실에 걸까 말까 토의하며 자리에 누웠다.

남자친구는 매번 내게 이렇게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주려고 발악하듯 노력해왔다. 물어보니 자기가 아버님에게 받은 사랑이 그거란다.

tv에 다정한 아빠의 일상 같은 프로가 나오면 항상
아버님은 코웃음을 치고서,
“저런 거 다 필요 없다!”
난 저런 거 안 해도.
“네가 학교 들어가서 아버지 직업 이름 란에 ‘이사’ 쓰게 만들 거야. 그게 좋은 아빠다.”
그래서 돈 아끼시는 분이 어머님에게 아들, 딸 배웅할 때만 쓰라고 벤츠를 뽑아주셨다고.

사실 아버님은 엄청나게 윤리적인 분이셨다.
평생 술만 마시면 운동권들을 등지고 집안 살림을 위해 공부해야 했던 설움이며, 외국계 기업에서 ‘외제자본 앞잡이’로 일하는 고통을 절절하게 이야기하던 분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지지한 몇 안 되는 분이기도 했고..
회사에서의 많은 가능한 일들을 거부하고 투기도 안 하고 자녀들에게 너희는 혜택 받는 아이들이니 장학금도 늘 신청 말라고 할 정도로 떳떳하게 사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그치만 그런 고 시아버지에게도 상처가 있었으니.
아버님이 태어나셨을 때 이미 할아버님은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였다. 무책임한 출산이었고, 할머님은 듣기론 시장에서 매일 사람들과 싸움이 붙던 좀 이상한 사람이라 했다.

난 곳은 아현동 달동네. 동네 쌍패들과 싸움 붙어가며.
하필 좋은 애들과 섞이는 학교에 배정되어 고생도 해가며.
그렇게 ‘친구 없이’ 살았으나 고려대 갈 성적이 나오자,
동네 한 부부 분께서 선뜻 입학금을 빌려주셨다.
(그 분들은 나중에 돌아가신 아버님 장례식에도 와서 조용히 슬퍼하다 가셨다. 평생 아버님을 지켜주셨다.)
평생 지기가 되는 친구도 거기서 만난다.
아버님께, 고려대학교는 고향이었다.

그렇게 대학에 간 아버님은 운동권에 피가 끓었지만..
참여할 수가 없었다.
집안 상황에 주위서 욕먹어가며 ABCD 영어를 배웠다.
그래도 독재정권이 총장을 끌어내렸을 때 반대시위에는 섰었다고 한다. 때가 때여서일까, 고려대 역사 중 가장 아름답던 고 김준엽 총장님이 계신 때였다. 아버님께 대학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제약회사 말단 영업사원에서 시작. 맘 맞았던 서울대 미대 아가씨는 집안이 반대해서 떠나보내고. 이상하게 ‘잘될 거 같다’ 고 자신을 선택한 어머님 한명과 가족 꾸리고서. 정장 안에 금 목걸이 감추고 미친듯이 일한 아버님은 독특한 캐릭터였고, 그리고 놀랍게도 살아남았다.

생활용품 회사의 ceo가 되셨고, 국내 매출을 2배로 올려 아시아 지부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사랑받는 상사로 지내기도 하셨다.

아버님의 마케팅 덕목은 항상, ‘진열대를 잘 관리하는 것’. 그게 안 되면 매사 광고건 뭐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 아버님이 은퇴 즈음 만난 게 나였다.
내 안 좋은 경제적 처지와 아버지의 빚, 배신의 충격에 몸도 아픈 모습을 보고 내 남자친구는 분기탱천해 날 도와야 한다고 아버님께 난리를 쳤다.

그 말에 아버님 묻기를,
“너 그 여자를 사랑하냐? 안 사랑한다면 이 일 큰일 나는 거다.”
“사랑합니다.”
“그래. 됐다. 뭐 인사도 하러 오지 마라고 해라. 이제부터 로스쿨 졸업까지 자동이체 해줄 테니까.”

어디 소설이라 해도 안 믿길 이 이야기가 내 실화다.
그리고 이때부터 2,3달 뒤 아버님이 해외 기업 ceo 들의 상례적 오토바이 모임에서 돌아가신 것도, 실화다.


너무도 멋지던 아버님은 그렇게 가셨다.
늘 오토바이를 끌고 마블 티셔츠에 가죽 잠바를 입고
껄껄 웃지만 늘 사실 노련하던, 하지만 속은 여려서
자기 아들이 또 상처 받을라 열심히 지켜주던 아버님.

나는 솔직히 말해 인생 최악의 시기에 남자친구와 싸우며 서로 상처를 주다가도 아버님이 ‘네 이놈!’ 할 것 같아 몇번 멈췄다. 로스쿨 다닐 땐 힘들어서 교내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잡고 아버님 생각에 펑펑 오열한 적도 있었다.

남자친구는 최선을 다해 우리 관계와 커리어를 돌보았다.
나는 안식년을 보낸 후, 현재 격일로 법률사무소 일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마음건강이 아슬아슬한 나와 함께 남자친구는 아파트 근처의 ‘통닭마을’이라는 가게를 찾아간다. 촌스럽지만 이상한 맵시가 있는 곳에서, 반반 닭만 놓고 있는데 온갖 서비스가 온다. 우리는 금세 즐거워져 이야기꽃을 피운다.

남자친구는 어느새 아버님과 많이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버님이 생각나 가끔 참 죄송하고 미안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서툴게라도 우리 둘이 잘 살아가고 있으니, 보호해주시길 바라는 마음도 든다.



내가 아현동에 살 때는, 아현동 모든 골목길이
마법의 길처럼 반짝였었다.
나는 그곳을 탐험하며 즐겼지, 아버님 같은 나쁜 추억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단 이유로,
나는 아버님을 두고 ‘선배님’ ‘선배님’ 하고는 했다.

실은 - 그 초등학교를 오래 다니진 못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아버님은 내 선배님이라 치자.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트라우마로 많이 아파서, 끙끙대면서도
통닭마을이란 이름이 웃긴 걸 보면
아직은 삶이 좋은 게 아닐까…

아니 실은, 삶이 가끔 너무 버거워서.
그래서 이런 우스개라도, 넋두리라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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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그 마을 거기에 잘 자리하고 있군요 ㅠㅠ
  •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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