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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1/10 15:27:09
Name   레이드
Subject   [조각 글 3주차] 영화 속 남자


“현재 고객님이 계신 관은 2관으로…각 관의 비상구를 잘 확인하시고 영화를 관람 하실 때 앞좌석에 발을 올리거나 시끄럽게 떠둘지 말아주시고 핸드폰은 진동으로 해주세요. 즐거운 관람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보러왔다. 오늘의 영화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 단팥 인생이야기를 골라보았다. 적당히 무난하고 딱 좋을 만큼 따듯하고 아쉽지 않을 만큼의 여운이 남는 아름다운 풍경의 일본 영화였다. 무엇보다 영화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도 딱히 피곤할 일이 없는 영화라서 참 좋았다. 앞으로도 이런 영화만 평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능력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집에서였다. 아빠는 그때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비디오를 빌려오시는 주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흔하지 않았던 비디오 플레이어가 집에 있었고 그것을 내심 자랑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덕에 우리 집 비디오 플레이어는 항상 무언가를 머금고 있었다. 그 날의 작품은 그 유명한 천녀유혼이었다. 그래 바로 그 영화, 섭소천과 영채신의 이야기, 아니 왕조현과 장국영의 그 작품.

그 때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과자를 준비했다. 과자를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 것이 버릇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좋아했던 과자는 뻥이요 라는 과자였다. (이상하게 지금은 잘 먹지 않는다. 달짝지근하니 맛있긴 한데 먹고 나면 손에 묻은 느낌이 맘에 영 불쾌한 까닭이다.) 부모님께서는 그 과자를 특히 싫어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 과자가 나의 기도를 막아 부모님께서 빼내는 데 꽤나 고생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내가 어떠했는지, 행동을 어떻게 했는지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건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어지럽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어지러움이 시 공간이 뒤틀리는 곳에 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고 그 덕분에 능력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뭐 어찌됐든.

사실 천녀유혼이 그렇게 재미있는 작품이 아닌 건 확실하다. 장르적으로도 그렇고 딱히 영화 안에서도 재미있는 장치가 많은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천녀유혼에는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하고 좋으면서 충격적인 장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섭소천, 아니 왕조현과 장국영의 키스장면과 연이은 목욕 장면이었다. (정확히는 목욕 장면보다는 그 이전 장면인 섭소천이 채찍을 맞는 장면부터 해서 묘하게 두근두근하긴 했지만)  지금이야 천녀유혼의 장면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훨씬 더 야한 그러면서도 더욱 더 자극적인 물건들을 여러 방면으로 구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루트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어렸던 나에게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러니 나에게 그 장면은 얼마나 가슴이 두근두근 하며 비밀스러운, 또는 아주 부끄러운 장면이었겠는가.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분명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섭소천과 영채신의 키스 장면을 보고 난 이후부터 굉장히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더니 귓속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쿵쾅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고 등에서는 비질비질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왜 이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영화를 보고 있었을 뿐이고, 뻥이요를 먹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뻥이요 때문인가? 이 망할 과자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저 과자를 절대 먹지 않으리라 하고 다짐 또 다짐했지만 나를 둘러싼 두근거림과 통증은 줄어들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가중되고만 있을 뿐이었다. 내 생각으론 그 때 나는 지구 둘레를 한 4바퀴는 너끈히 돌만큼의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뭐 지구 중력의 몇 배를 버틴다는 우주 비행사는 그러한 어지러움에도 버틸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가련한 어린 양에 불과했고 마침내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물 속 이었다. 나는 단지 어지러워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소파가 있고 옆에 뻥이요 가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숨을 쉴 수 없는 물 속 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거기다 더 당황스러운 건 내가 검은색 모자를 쓰고 흰 천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과년한 처자의 상의와 비슷한 흰 천 아래에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흰 천을 걷어내고 물 위로 머리를 내미니 헉, 세상에 이럴 수가…… 왕조현이 나를 향해 우윳빛 살결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름다운 몸이었다.) 나는 그 때 진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부끄러웠고 정말 놀라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 얼른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곧 다시 숨이 막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었고, 진짜 놀랄 일은 그때 벌어졌다.

왕조현이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입술을 그녀에게 고스란히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천녀유혼을 본 수 많은 아재들과는 다르게 나는 그녀와의 키스를 4D로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셈. 그러니까 내 첫 키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왕조현과의 키스였다. 부럽지? 뭐 이건 여담이고, 어찌되었든 그녀의 입술은 생각보다 더 말랑말랑했고, 생각보다는 아무 느낌 없었다. 키스와 동시에 물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번쩍 하는 느낌과 함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 소파가 있고 과자가 있는 그 공간으로 말이다.

그것이 내 능력이 발휘된 첫 사례였고 그에 따라 그 날 나는 하루 종일 멍했던 것 같다. 그녀의 말랑 달콤한 입술이 자꾸 생각나서. (미안, 장국영씨. 내가 당신이 되었던 건데 정말 그때 당신은 아무래도 좋았어) 그 이후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어느 일정 장면이 되면 예의 그 어지럼증과 함께 영화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주로 긴박하거나 긴급하거나, 내 심장이 두근대는 속도가 빨라지면 종종 생기곤 했다. 주라기 공원2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영화 속으로 들어가 공룡을 눈앞에서 대면할 때는 정말이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공룡 발소리가 그렇게 커도 되는건지 진짜 스필버그 감독을 몇 번이고 원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몇 번을 겪고 난 이후 나는 이러한 나의 체험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윽고 내 글은 하나의 영화 평이 되어 온라인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저 가볍게 적었던 나의 글은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다. 덧 글을 보면 와, 정말 그 영화 안에 계셨던 것 같은 생동감! 이라든가 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든가 하는 덧 글들이 가장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을 적는 것뿐인걸! 결국 나는 영화 평론가라는 말도 안 되는 직함을 달게 되었고, 보고 싶지도 않은 영화들을 봐야만 하는 괴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누구는 글로만 적으면 되는 괴로운 일을, 나는 직접 겪어야만 하니 이중고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요 근래 가장 크게 겪었던 곤란은 ‘앤트맨’이라는 영화를 볼 때였다. 앤트맨은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히어로 중 한 명인데, 평범한 인간이었던 주인공이 옷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의 사이즈를 마음대로 줄일 수 있게 된다. 쥐보다도 작아지기도 하고 개미보다도 작아지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볼 때에는 제발 영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부탁을 드렸는데…시팔 또 들어가고 말았다. 그것도 가장 클라이맥스인 대런 크로스와의 배틀 장면으로.

그와 싸운 건 가방 속이었는데 아이폰이라든가 갤럭시 시리즈 핸드폰이 나뒹구는 그런 가방 속이었다. (핸드폰에 몸 전체를 부딪쳐 보았는가? 저절로 욕이 나올 만큼 아프다 시팔… 삼성은 더 조그맣게 안 만들고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 몸 전체보다 큰 볼펜도 피하고 머리를 날려버릴 것 같이 맹렬하게 돌진하는 과자 부스러기도 피해야만 했다. 아이 이런 개 같은 만화영화! 하고 속으로 쌍욕을 하며 피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의 주먹이 나의 얼굴에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마워요. 대런 크로스, 당신 덕분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얼른 일어나 극장 문을 나섰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느 장면에 들어가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 때문에 나는 또 마감을 할 수 없었고, 덕분에 연재처가 하나 줄어들게 되었지만, 그것은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몸이 작아지는 기분도, 핸드폰에 쳐 맞는 기분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앤트맨인지 개미맨인지 모르는 그 영화 때문에 나는 집 앞에 나가 허세로 가득찬 모카 프라프치노를 마실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음- 행복 행복- 이러한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인거야. 한창 프라프치노 잔을 어루만지며 그녀와 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 내 눈앞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생글 생글 웃는 모습의 소녀, 머리는 검 붉은 색, 약간의 웨이브를 한 숏 컷에 눈썹은 적당히 다듬고 그린듯한- 위는 살짝 올라갔고 점차 가느다란 곡선으로 떨어지다 끝만 다시 슬쩍 위로 올린듯 보이고 눈 크기는 하니만큼 큰,  얼굴엔 주근깨가 약간 있고 입술은 중간에만 살짝 다홍색으로 틴트를 발라준 듯한 흰 피부의 소녀였다. 그 소녀의 목소리는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범한 여고생의 목소리라고 봐도 좋았는데.

그 목소리로 만든 그녀의 말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아저씨, 아저씨는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죠? 난 만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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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주제는 진짜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시 고칠 생각도 사실 들지 않아서ㅜㅜ( 마무리도 사실 좀 고쳐야할 것 같지만...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고 좀 나중에 고칠까 합니다.) 충달님이 말씀하신 주제와 이 글이 좀 다른 부분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만..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해서 써 보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천녀유혼의 그 장면도 영상으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한 번 보신다면 재밌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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