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5/02/16 00:49:04수정됨 |
Name | 호미밭의파스꾼 |
Subject | [클로드와의 공동 창작] 암자에서 |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79731&SRS_CD=0000017330 계석열의 장모 최은순의 불법적 치부의 역사를 다룬 위 기사를 읽히고, 서너 번 정도 피드백을 해줬더니 이런 걸 써줬네요. 클로드, 칭찬해... ----- 2012년 2월 16일, 강원 두백산은 폭설에 휩싸여 있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 최은순은 암자를 찾아 올랐다. 3월 11일로 날을 받아 둔 딸의 혼례를 불과 한 달도 못 남긴 시점이었다. 향 연기 자욱한 두백사 암자의 문이 열리고, 백발의 산승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속세의 점쟁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천기를 읽는다는 이였다. 최은순을 포함한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문전박대했으나, 십여 년 전, 이 암자가 철거 위기에 처했을 때 최은순이 거액을 시주하고 갱신 허가까지 얻어다 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산승은 시주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절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을 때, 그는 마지못해 최은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녀는 오늘까지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오시다니... 무슨 일로 이 산골 암자까지." 산승의 목소리가 깊었다. "스님... 제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따님의 혼례를 앞두고 꿈에서 고인이 된 남편을 만났다지요. '너무 높이 올라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최은순의 놀람마저 예상했다는 듯, 산승은 여상히 말을 이었다. "남편이 죽은 1987년, 석촌동에서 시작해 당진, 양평까지... 땅 하나로 천금을 만드는 이가 이제는 검사 사위까지 맞이하게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만하지." 경악과 차분함의 대조가 만든 섬뜩한 침묵을, 끝을 모르고 매서워지는 삭풍의 소리가 채웠다. "스님...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네요. 절을 살리고 싶다는 제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시다가, 마지막엔 받아들이셨죠. 그때 스님께서 하신 말씀... '나는 보려 하지 않아도 당신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소, 보는 자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으나 그대로 살게 될 자들은 대부분 이를 감당하지 못하더이다' 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산승은 묵묵히 차를 따랐다. "그간의 일들을 들려주시겠소? 보살님의 입을 통해서도 들어보고 싶소만." 최은순은 얼어붙은 손을 차로 녹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양평군 양서면입니다. 우리 집은 정미소를 했지요. 어려움을 모르고 고등학교까지 다니던 열여섯에 아버지를 잃고 가세가 기울자 학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가혹하고 비정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을,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양재를 배웠다 들었소." "네. 바느질로 시작해 양장점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스물셋에 김광섭이란 사람을 만났죠. 명문대를 나와 고향의 군청에서 일하는 소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이는 제 솜씨와 그만큼 야무진 성격을, 저는 그이의 넉넉한 성품을 사랑했지요. 한의사였던 시아버지께 물심양면으로 받아야 할 것들을 모두 받고 자란, 양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최은순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그런데 그이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 나이 마흔하나... 네 자식을 키워야 했기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지요. 그때 시작한 게 부동산이었습니다. 남편이 남긴 석촌동 땅을 팔아 시작했는데..." "사망신고를 늦춰 세금을 아꼈다지요." 밖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최은순은 체념한 듯 차라리 웃으며 이야길 이어갔다. "네... 단 한 번, 도리와 법의 경계를 넘으니 그 다음은 쉬워지더군요. 남의 이름을 빌려 땅을 사들이기도 했고... 때론 불법으로 건물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그 후의 일이야 일일이 털어 놓기도 힘들 지경이네요. 하지만 그건 다... 제 자식들, 특히 셋째 명신이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딸을 십사 년 넘게 공부 시켰던 게요?" "네... 제가 못다 이룬 꿈을 딸을 통해 이루고 싶었나 봅니다. 저 만큼이나 야무지고, 저보다 훨씬 어여쁜 아이이지요. 경기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대여섯 곳이 넘는 대학원을 다녔지요... 제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 만은 아니었습니다." 산승이 깊은 눈으로 최은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검사와 혼인까지 시키려 하는군요."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렇게 재산을 모으는 동안 수없이 법정을 드나들며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과년한 딸의 혼처를 고를 때도... 법조인을 찾게 된 것이고요." "그래서 이 모든 게 딸을 위해서였다... 라는 거짓말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게 된 게지요?" 오랜 침묵 속에 최은순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두어 방울의 눈물만 또르륵, 흘렸다. 산승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 화색이 도는 중년 부인의 얼굴. 하지만 산승의 다음 말에 은순의 낯빛은 다시 잿빛이 되었다. "당신의 죄과는 반드시 세상에 낱낱이 알려질 것이오. 하지만 그 세상은 당신을 정죄하기 보단 은근히 이해하고 또 동경할 것이오. 여자 홀 몸으로, 네 자식을 건사하며 일으킨 성공이라... 이재에 눈이 먼 사람들은 남몰래 당신의 지혜와 근성을 칭송하게 될 터." 산승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될 운명이오. 맹렬한 돌풍에 휘말려 이미 깜냥을 넘는 높이로 날게 된 어미 닭과 새끼들 같은 형세라... 만약 그것이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약조된 혼약을 파하는 길 밖에는..." "혼약을 파하다니요?" 최은순의 눈빛이 매섭게 반짝였다. 충분히 또아리를 틀었던 뱀처럼 자리에서 떨쳐 일어난 그녀. "스님, 십 년 전 이 절을 지키고자 제 제안을 받아 들이셨듯이... 저도 제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보려 합니다. 스님에게 이 암자가 소중하듯, 저도 일생을 바쳐 지키고 얻은 것들이 소중합니다. 스님 말씀대로 제 죄과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것이 저와 제 딸을 무너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정한 길, 끝까지 가보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리다. 죄업 쌓길 멈추지 않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로 인해, 온 천하가 혹독한 겨울을 겪을 것이오. 하지만 봄은 올 것이오. 하지만 그 봄을, 당신과 당신의 가족은 누리지 못할 것이오..." 암자 밖으로 나와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 최은순은 산승의 마지막 말을 지워버리듯 세게 고개를 저었다. "혼약을 파하지 못 하겠거든 혼자서만, 혹은 식구끼리만 영원한 봄을 누리겠다는 아집을 버리시오. 생존을 걱정하던 때를 지나 안정과 번영을 이룬 지금이 보살님의 죄과를 넉넉하고도 쉽게 갚을 수 있을 때임을 깨달아야만 하오..." 마침 세상을 메울 듯 내리던 눈과, 세상을 찢을 듯 불던 삭풍이 멎고, 산승의 말처럼 때 이른 봄이라도 오는 듯, 그녀의 눈 아래 드넓은 산야에 황홀한 햇빛이 만개했다. 하지만 잔뜩 일그러진 그녀의 눈동자 속엔 이미 밝음이 자리할 여백은 사라져 있었다. 2
이 게시판에 등록된 호미밭의파스꾼님의 최근 게시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