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7/23 21:27:20
Name   골든햄스
File #1   BB91C81D_A199_4542_91B3_13F239122BCA.png (1.92 MB), Download : 25
Subject   아이들을 가르치기


아이들을 가르친 이 몇 달의 기억은 제게 인생의 제일 행복했던 시기 중 하나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잊기 싫은 맘에, 아이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려봅니다.

어쩌면 더 오래 일했으면 관성에 지겨워졌을지도 모르죠.
적당히 일하면서 스스로의 인내심을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서로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 저를 두고 의기투합해서 소련 좋아하냐고 깔깔거리며 놀리며 즐거워하던 장면이나, 처음에는 퉁명스러웠다가 점점 주위를 배회하며 수업이 끝나도 가지 않는 아이의 모습, 저를 너무도 투명한 거울 같은 눈으로 바라보던 9살 아이의 모습은 잘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가방에는 아이들 중 하나가 주었던 과자를 먹고 포장지를 남겨둔 게 들어있습니다. 작은 초콜릿 과자의 포장지인데,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제가 총애하는 거를 느껴서 점점 선을 넘더니 ‘사실 선생님이 귀신이다’ 라는 농담까지 하려하던 여자아이가 있었거든요.

읽던 과학 교양 책에 섹스라는 단어 하나 나왔다고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지던 중학교 남자애와, 뭐냐고 궁금해하던 초등학생들 앞을 막아서던 제 모습. 저에게 고민 상담을 하고, 투바투 음악 추천을 하던 덩치는 크지만 마음이 여리던 남자아이. 계속 까불고 장난치던 주의력 산만한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

알고 보니 사회성 만점이던,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트럼본을 불기 시작한 열살의 통통한 아이. 씩 웃으며 ‘괜찮아요’ 능청 부릴 줄 아는 12살 남자아이. 계속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졸린 것 같아도 보여서 ‘뭘까?’ 했는데 알고 보니 똑똑한데 에너지 절약모드가 늘 켜져있던 남자아이. 그걸 알아주고 칭찬해주니 과학 책을 자청해서 빌려가던 모습. 그리고 우리 <걸리버 여행기> 반 아이들 !!! 우리가 함께 한 지적 여정은 진짜 멋졌어 !!!

몇 번이고 같이 고생을 하며 리트 실력을 키워준 20대 사회초년생 친구도 당연히 귀엽게 기억됩니다. (진짜 웃긴 해프닝도 함께 있었는데 차마 이곳에는 못 적겠네요.)

가끔 그 아이들이 앞으로 평탄하고 행복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삶은 대체로 쉽지만은 않겠죠.

중학생까지도 뺨에 핏줄이 보이는 거 아시나요?
자고 있어도 뺨에 핏줄이 파랗게 보이는 걸 보면 화를 못 내겠더군요.

보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선생 마음으로나마 보내봅니다.

아. 그런데 글 쓰다 보니 그냥 선생으로 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 어릴 때 선생님들께 막말도 듣고 대부분은 안 보이는 체 하셔서 설마 제가 선생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학원도 거의 못 다녔거든요. 인생의 경이로움은 아직도 우리 앞에!

애들아. 행복해야 해!



10
  • 선생님을 만나서 행복할 겁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442 일상/생각비가 옵니다. 2 큐리스 25/05/15 1810 10
15490 정치대선 결과 소회 9 사슴도치 25/06/04 1792 10
15506 일상/생각그럴 듯함의 시대 6 사슴도치 25/06/09 1651 10
15518 일상/생각감각은 어떻게 전이되는가 – 타인이 그려낸 감각의 지도 4 사슴도치 25/06/13 1603 10
15528 문화/예술[사진]을 찍는다는 것 6 사슴도치 25/06/18 1249 10
15542 창작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5 Cascade 25/06/22 2323 10
15636 일상/생각아이들을 가르치기 11 골든햄스 25/07/23 1352 10
15674 일상/생각초3 딸내미가 반장 준비하면서 쓴 글입니다. 6 큐리스 25/08/19 1612 10
15696 역사세계사 구조론 - 서세동점은 필연이었는가? 2 meson 25/08/29 1709 10
15718 오프모임한우 또 한우 결코 한우 12 송파사랑 25/09/13 1813 10
15747 역사트럼프 FBI 전 국장 제임스 코미를 기소하다. - 코미는 왜 힐러리를 죽였을까? 11 코리몬테아스 25/09/26 1634 10
15770 꿀팁/강좌스마트폰 한글 자판 가이드 7 반대칭고양이 25/10/09 1666 10
15778 음악루저갬성 뮤지션의 내맘대로 계보 7 당근매니아 25/10/14 1115 10
15785 여행시안(장안) 혼여 후기 10 온푸 25/10/17 1175 10
15794 일상/생각우리 회사 대표는 징역을 살까? 3 Picard 25/10/21 1467 10
15833 사회요즘 사는것이 '헬'일것 같긴 합니다. 64 닭장군 25/11/08 2540 1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9 트린 25/12/03 849 10
7167 방송/연예무한도전 <토토가3> 감상-흘러간 강물에 두 번 발 담그기 18 자일리톨 18/02/26 7414 11
8451 정치몇 년간의 연합사 관련 뉴스를 보며 느끼는 생각 19 Danial Plainview 18/11/01 6127 11
1482 일상/생각[잡담] 예상은 원래 빗나가라고 있는 거야 34 초코머핀 15/11/06 11537 11
1639 기타오늘자 커뮤니티 베스트 요약 정리(26일) 8 또로 15/11/26 7017 11
2219 방송/연예설연휴 예능 이야기 14 헬리제의우울 16/02/14 5800 11
2324 역사자화자찬(自畫自贊) 6 기아트윈스 16/03/01 5560 11
5092 일상/생각8살 시골소년의 퀘스트 수행 이야기. 11 tannenbaum 17/03/06 5210 11
2543 IT/컴퓨터100점짜리 단어를 찾아서. 29 April_fool 16/04/05 15059 1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