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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8/13 16:54:53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용인 평온의 숲
나는 원래 변리사 시험을 준비했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실시간으로 글의 값이 나락을 향해가는 걸 보고 제대 이후 진로를 틀었다.  나는 김훈의 커리어패스를 뒤따르고 싶었으나, 현실화되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다.

전문자격을 취득하기로 마음 먹은 데에는 어느 선배의 역할이 컸다.  그 선배는 나와 9개 학번이 차이났는데, 대학을 중도에 자퇴했다가 재입학한 케이스여서 같이 수업을 듣게 되었다.  생물학과에는 실험 수업이라는 게 있고, 대장균을 번식시키는 단순한 것부터, 몇주에 걸쳐 생쥐에서 원하는 생체반응을 이끌어내는 실험까지 다양했다.  그 중 어떤 건 몇시간 동안이나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동안 수강생들끼리 수다를 떨고 놀았다.

종종 저녁식사 시간까지도 실험이 끝나지 않으면 중국집에서 배달을 시켜 먹기도 하고, 조별 대항으로 사다리를 타서 밥값을 몰아내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냥 사다리 타는 게 영 재미가 없어서, 생물학과답게(!) 원심분리기를 룰렛처럼 쓰기도 했다.  조교들은 가끔 우리와 같이 놀았고, 어떤 조교들은 수강생들이 실험실에서 밥 먹는 걸 질색했다.  선배는 자퇴 후 변리사 자격을 따고 일을 하면서, 졸업증을 따기 위해 재입학한 상태였다.  가끔 열댓 남짓한 사람들의 간식을 자기가 부담하기도 했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같이 술도 많이 마셨다.  누군가는 과음한 나머지 다음날 오전 수업을 다 못 들어가기도 했었다.  선배는 키도 185가 넘고, 선천적으로 덩치가 큰 탱크 같은 사람이었다.  근력도 상당했고, 먹기도 많이 먹었다.

선배는 원래 입학해서 학교 다닐 때 학점이 너무 안 좋았었고, 차라리 빨리 자퇴해서 자격증을 따는 게 낫다고 판단했었다고 말했다.  무사히 자격증은 취득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불면증은 수험생활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재입학 면접 때 1.0이 될랑말랑하는 자신의 학점이 발목을 잡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접수 받는 직원이 '(재입학 치고)학점 높으시네요' 소리를 했다는 일화도 술 마시면서 즐겨 하는 이야기였다.

폭염이 어마어마했던 2013년 여름방학에 선배의 소개로 특허법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듬해에는 퇴직해서 동료 변리사와 차린 사무소에서도 날 불러다 썼다.  알바를 뛰는 두어달 동안 남자 셋이 어마어마하게 먹어댔고, 나는 몇킬로인가 체중이 늘었다.  매일 점심으로 각자 빅맥세트 2개를 먹거나, 근처 식당의 돈까스를 인원 X 1.5개로 시켜서 먹어댔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이후로 직접 얼굴을 볼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선배는 몇년 후 동업자와 갈라섰고, 나중에 전화 통화에서 얼핏 듣기로는 별로 좋게 헤어진 거 같지 않았다.  이후에는 변리사 일도 하면서 술병 관련 특허도 냈던 걸로 아는데, 시중에서 보지 못했으니 그다지 성공한 특허는 아니었던 듯 싶다.

그 사이에 나는 변리사 시험을 포기하고 노무사가 되었고, 선배는 췌장암을 얻었다.  몇년도의 일이었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몇달에 한번 정도 특허나 상표법 관련해서 궁금할 때 선배에게 연락했고, 태백에서 요양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항암과 해외 수술과 지난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고, 프사 속 체구와 얼굴은 쪼그라들어 있었다.  완치가 되었다던 암은 재발했고, 그럼에도 선배는 살아남아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무용담을 들으며, 나는 선배가 여전히 별 탈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번은 연락이 닿았을 때, 암 치료 효과가 있다는 둥 해서 한창 화제가 되었던 개 구충제를 구할 방법이 있는지 내게 물었었다.  아직 소천하기 전이셨던 약사 이모부는 구해다 주기 어렵다고 이야기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몇차례 찾아가겠다고 말했었지만, 결국 태백이고 용인이고 실제로 방문하지는 않았다.  췌장암 환자에게 무슨 위문품을 챙겨가야 할지만 고민하다가 매번 끝났었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대화한 내용은, 겨울에는 추워서 태백에 있기 힘드니 용인 본가로 넘어갈 예정이라는 말과, 그럼 용인으로 찾아뵙겠다는 내 대답이었다.

결혼을 한달 정도 남기고 청첩장을 돌릴 때에도 그 이름은 명단에 끼어있었다.  다만 겹쳐서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따로 약속을 잡지 않은 채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이틀 전 모바일청첩장과 함께 몇마디 톡을 보냈다.  메시지 옆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페이스북과 인터넷 검색에선 그럴 듯한 결과가 잡히지 않았다.  암 투병하면서 개설했던 유튜브 채널과 영상들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생각보다 영상이 많았고, 마지막으로 업데이트 된 지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걱정이 되었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전에 안 좋게 마무리되었다고 들은 동업자에게 연락했다.  예상했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왔다.  사무실에서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머저리 같은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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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프고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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