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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4/01 18:19:00
Name   큐리스
Subject   godot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일까
요즘 Godot으로 아주 단순한 것들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튜토리얼을 보며 땅을 만들고, 캐릭터를 놓고, 카메라를 붙였을 뿐인데 이상할 만큼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남이 보기엔 그저 밋밋한 바닥과 서툰 오브젝트 몇 개에 불과할지 몰라도, 내게는 그것이 하나의 세계가 처음 윤곽을 얻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던 빈 화면에 시선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비로소 존재가 놓이는 일.  
그 단순한 과정이 생각보다 깊은 감정을 건드렸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브젝트가 단지 보인다고 해서 곧바로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shape는 형상을 만들고, collision은 경계를 만들고, script는 반응과 움직임을 만든다.  
그 셋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하나의 대상은 세계 안에서 닿을 수 있고, 멈출 수 있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걸 보면서 문득 인간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최소한의 인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단지 눈에 보이는 형상만으로 인간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인간은 세계와 맞닿을 수 있는 존재, 바깥과 자신 사이에 경계를 만들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 경계로 인해 상처 입고 흔들리면서도 다시 반응하는 존재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무것도 거스르지 않고,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않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통과해버리는 삶은 존재할 수는 있어도 살아 있다고 느껴지기 어렵다.  
인간은 결국 세계와의 마찰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생각해보면 삶은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고 부수는 일 같다.  
나는 나이기 위해 선을 긋고, 동시에 더 넓어지기 위해 그 선을 넘는다.  
타인과 부딪히며 내 윤곽을 배우고, 익숙한 세계와 마찰하며 어제의 나를 깨뜨린다.  
상처는 아프지만, 그 마찰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경계는 우리를 지키지만, 너무 단단해지면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경계를 세우는 존재이면서, 또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만드는 존재이기도 한 것 같다.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이 삶의 구조를 작은 세계 안에서 다시 만져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빈 공간에 땅을 만들고, 존재를 놓고, 충돌을 부여하고, 움직임과 반응을 심는 일.  
그 안에서 나는 단순히 기능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작은 모형으로 다시 배우고 있었다.  
왜 부딪힘이 필요한지, 왜 경계가 필요한지, 왜 반응이 있어야 존재가 현실이 되는지.

아직 나는 정말 초보다.  
그저 땅 하나 보이는 것만으로 행복해하고, 네모난 박스 하나에도 세계가 생긴 것처럼 기뻐하는 단계다.  
그런데도 그 사소한 기쁨 속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느꼈다.  
인간은 단순히 주어진 세계를 통과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찰을 견디며 자기 경계를 만들고, 또 그것을 부수고 다시 세우면서 끝내 자기만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어쩌면 게임을 만든다는 일이 이렇게까지 묘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는 아주 작지만 분명한 삶의 축소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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