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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4/06 23:08:00 |
| Name | 골든햄스 |
| File #1 | IMG_3148.jpeg (144.7 KB), Download : 2 |
| Subject | 내 남편은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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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 하나 하자면, 나는 남자 보는 눈이 좋은 편이다. 그리고 남자들을 잘 만났다. 나쁘지 않은 외모 덕이 9할일 거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1할 혹은 그 이상의 몫은 남자들이 “관우 좋아하세요?” 라고 하면 “전 출사표 장면 때문에 제갈공명이 더 좋아요.” 라고 대답을 돌려줄 수 있는 내 취향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격이 좀 남자 같다. 어렸을 때 KBS 불세출의 사극 시리즈 (“태조 왕건”, “대조영” 등)를 보고 자란 탓이었을까. 도서관에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60권 짜리의 삼국지 만화책을 읽어서였을까. 집안에 남자 어른들이 많아서가 제일 큰 영향일 거 같은데, 무튼. 나는 양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성인 여성으로 자라났고 그 점을 매력으로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대시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냥 그래서 내가 호강스럽게도 남자들을 선택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한 것뿐이고, 이제 와 중요한 건 아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내 남편을 만나게 된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세웠던 결혼할 남자에 대한 기준-“모든 일이 잘 안 풀려도 자전거를 같이 탈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하자”-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결국은 그 기준이 적용되기도 했고 적용되지 않기도 했다는 모호한 결말이 기다리지만. 어렸을 때, 우리 아빠는 시시때때로 날 때렸다. 구타는 밤을 넘어 새벽, 아침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이유는 주로 실패한 자신의 삶에 대한 분노와 한탄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어린 나는 세상을 성공과 실패로만 보는 남자는 결코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죽은 작은 아빠의 그늘 속에서, 친척들은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주로 좌절한 남자들이 되었다. 그들 옆에서 나는 남자들의 지긋지긋한 성취욕의 냄새를 자주 맡았다. 내가 파악한 남자들의 모습은 평생 돈과 힘 앞에서 고통 받으며 서사를 써내려가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친구에게 말한 나의 남자 보는 조건은 단 하나였다. “모든 일이 다 안 풀려도 나랑 웃으며 하천에서 자전거를 탈 남자를 만나고 싶어.” 그래서 나는 학벌도, 직업도, 외모도 보지 않았다. 인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개팅에 나가면 “꿈이 뭔가요?” 같은 걸 물어보고는 했다. 솔직히 말해 외모가 별로면 더 가점을 줬다. 사회에서 여러가지 차별을 당하면서도 마음을 잃지 않고 지켜왔단 점이 심지가 굳어보이니까. 아빠와 친척들의 지긋지긋한 좌절감과 폭행에 시달려온 내게는 남자의 외모 같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화 얘기를 하며 부드럽게 내 손등을 간지럽히며 대시한 오빠도 있었고, 그럴듯한 기업의 후계자도 있었지만 내게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선물을 바리바리 갖다바치거나, 정성스럽게 연락하거나, 준수한 외모와 조건을 갖췄다 해도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정년퇴직 나이가 되거나 그 이전에 회사를 버티지 못해 나오거나, 하여간 어떤 사유로든 삶에 흔들림이 오거나 주위와 비교가 되거나 할 때 주위에 좌절감을 쏟아내지 않을 남자”였고 이토록 디테일한 조건이 있다보니 주위의 여자들이 쏟아내는 이상형 담론과는 항상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건 또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입학 기념 모임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번호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이성에 대한 호감인지, 단순히 동기를 만나자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번호를 찍고 나니 얼마 안 되어 매일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도 그랬다. 사회적 기업을 하며 대학 생활까지 완벽히 마치느라 그는 대학원에 입학한 뒤로도 공황 장애 등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지난 강행군으로 인한 허리 디스크, 위장병 등으로 고생이었다. 우리 둘은 졸지에 “입학하자마자 휴학을 고민하는 동기 동지”가 되어 휴학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남자치고 매우 귀여운 이모티콘을 썼다. 동그란 얼굴을 가진 귀여운 동글이 이모티콘을 보내고, :) 같은 것으로 문장을 마무리하고는 했다. 심지어 자취집에는 칵테일 바를 만들어놓았고, 수채화를 연습하며, 전시회를 다니고 있었다. 당시 몸에 통증이 심하던 나에게는 가끔 오는 그의 연락이 가뭄에 단비 같았다. 그가 수채화를 그려서 보여줄 때가 좋았다. 우리는 순식간에 불꽃처럼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그렇다. 인정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연애를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으로는 계속, ‘이 남자가 ‘그’ 남자일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냐는 질문이 있지 않은가. 왜, 그거처럼, 나는 내 종이에 심사 품목들을 하나하나 적어놓고 연애하는 내내 내 채점표와 남자 사이를 곁눈질했다. 술을 잘 안 먹고 집돌이. 그건 좋아. 동창들과 원만한 관계. 좋군. 그런데 또 이 점은어떻고, 저 점은 어떻고. 생각이 많은 현대사회의 젊은이. 음. 좋군. “무슨 말을 할까요/ 사랑할까요/ 입을 맞출까요/ 우리 둘의 계산기가 다를까 두려워요” (AKMU - HERO) 8년을 연애하는 동안 서로 결혼을 할 상대가 맞는지 계속 줄다리기를 했다. 이 점이 아쉽다, 저 점이 아쉽다, 따지다 싸움이 불거지기도 했고 다른 장기 연애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위기가 온 적도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연애 전 남편이 내게 보여준 모습들이 남편의 일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혼자 자취해도 예쁘게 인테리어를 해놓고 칵테일과 수채화를 즐기고 성경을 필사하는 그 남자가 좋았다. 물론 남편에게는 그런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자신의 공황 등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게 즐기며 지내려 노력하던 때’였다는 것이다. 웁쓰. 실제로 남편은 연애하는 동안 매우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성취에 전전긍긍했고, 대학원 학점에 벌벌 떨다 피시방으로 도망 가서 내가 대신 학점을 확인하고는 학점이 잘 나왔길래 주위 피시방을 다 돌며 찾아내 “야! 너 학점 잘 나왔어!” 라고 빽 소리친 적도 있었다. 사회적 기업. 어휴. 그건 문젯덩어리였다. 내 낭만을 실현하려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나간 적이 있었다. 남편은 당시 자격증 시험에 대한 불안과 공부로 인한 피로로 눈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자전거를 좀 타더니, ‘눈에 자꾸 바람이 와서 아프다’ 며 눈물을 흘리며 내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내렸다. 그뒤로도 몇번이고 자전거를 같이 타러 가자해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이럴 수가! 내 로망! 남편은 수채화도 그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당시 전시회를 다닌 것은 ‘오직 내게 잘 보이기 위해서’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를 연출한 것이라는 비밀까지 털어놓았다. 아아. 나의 :)돌이는 어디갔는가. 귀여운 동글이 이모티콘. 그가 직접 만들어주던 칵테일! 지금도 자못 슬픈 기분이 들 정도니 연애 중에 느낀 내 슬픔은 말로 못다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 사람과 8년의 삶을 보낸다는 건 굉장해서, 나는 그에게서 의외의 장점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었다. 내가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 잡아주며 “네가 정신이 나가도 난 네 옆에 남을 거야” 라고 그가 굳게 말해주던 때,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내 병환을 간호했고, 내가 통증에 힘들어할 때면 둥기둥기 안아주며 같이 인간극장 흉내를 내며 농담을 늘어놓곤 했다. 나는 그 덕에 병마를 떠나보낼 수 있었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그가 결혼할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물론, 내가 지나치게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정말, 그일까? 나는 그를 몇번이고 바라봤다. 하지만 인간은 분석하고 관찰하기 쉽지 않은 대상이었고 나이가 들수록 인생은 겹겹이 신비였다. 주위의 어떤 커플은 4년을 한번도 안 싸우고 사귀다 결혼에 조용히 골인했다. 어떤 커플은 장기연애를 하다 회의감에 서로 다른 사람까지 만나보는 실험을 했다가 결국 서로뿐이라 결혼했다. 어떤 커플은 만난 지 얼마 안돼 운명을 직감했다. 어떤 커플은 소울메이트 급으로 대화가 잘 통했지만 경제적 조건이 안 맞아 이별했다. 정답은 없었다. 이건 수학의 정석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예상 외의 파경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소식도 속속들이 들려왔다. 아무리 내가 피하려해도 인생은 피할 수 없는 것. 인터넷에서 떠드는 무슨무슨 이론 같은 거로 얄팍하게 절대 싸잡을 수 없는 것. 어느새 30대가 된 나에게 그런 생각들이 손 안에 남았다. 같이 산 세월이, 시간이, 그동안 있었던 모든 놀랍고 충격적인 일들이 알려주는 건 우리는 인생의 지휘자가 아니란 사실뿐이었다. 절대 아빠 같지 않은 남자를 만나려던 나의 소박한 마음조차 사치라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다. 파산이든 도박이든 무슨 일이든 인생에는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되기 싫어했던 직업이 의외로 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노동의 고됨은 나의 정신을 더 단련시켜줬다. 힘겨운 하루들을 버티며 어느순간 내가 깨달은 건,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도 “다음 하루를” 살 기력을 주는 사람이면 충분히 결혼해도 될 것 같단 것이었다. 아. 그냥 이 사람을 보고 싶어서라도 살아야겠다 싶어지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남편은 그냥 내가 자기 운명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일본 만화에서처럼 결혼을 하게 될 남자를 보게 되면 머릿속 빵빠레가 울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건 조용한 8년의 노동과 병, 싸움, 집안일, 노력 끝에 오는 작은 깨달음이었다. 여전히 남편은 자전거를 타러가주지 않고, 하루종일 일에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한다. 낭만적이지 않은 때도 많다. 낭만적인 때도 많다. 물론 아직도 바란다. 이 길을 걷다 우리 중 하나가 쓰러지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쳐도 우리가 웃으며 산책이라도 할 수 있기를. 그런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는 마음이 결혼 같다. 그렇게 나는 유부녀가 되었다. 오늘은 남편이 오면 환히 웃으며 반겨주어야겠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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