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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07 18:47:22
Name   nickyo
Subject   [7주차 조각글] 정신과 의사 준석이




주제 _ 선정자 : 린

글 이어쓰기

카페 왼쪽 게시판 순서대로 아래로, 여태까지 상대가 쓴 글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글쓰기 :
그 글을 보고 연상을 하던지, 칭찬을 하던지, 비평을 하던지, 이어쓰기를 하던지 뭐든 맘대로.
홍차넷에는 여태까지 올라온 조각글 모음을 대상으로 한다.


녹색문 → 마스터충달
마스터충달 → 레이드
레이드 → 린
린 → 범준
범준 →삼공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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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 얼그레이
얼그레이 → nickyo
nickyo → *alchemist*
*alchemist* → 녹색문

*참여못하시는 분은 상대방 닉네임이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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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평 방식

상대 닉네임+내 닉네임으로 삼행시 짓기


합평 받고 싶은 부분
표현과 문장과 인물의 드러냄

하고싶은 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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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코트를 벗어 털었다. 쌍년. 코트 단추 두어 개가 너덜거리며 반쯤 뜯어져 있다. 동아줄을 쥐고 옷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단추를 우악스러운 손으로 잡아 뜯어낸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단추는 바지춤의 주머니 구석으로 박힌다. 장례식장을 뒤로한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준석은 그제야 굽은 어깨를 좀 편다. 아, 끝났다. 코트를 다시 입으려 하자 주머니에서 라이터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준석의 시선도 라이터를 따라 움직인다. 그 시선의 길을 따라 장례식장의 입구가 스치듯 지나간다.


경찰의 지루한 조사, 그는 경찰이 썩 달갑지 않다. 경찰은 멍청하고, 멍청하고. 아, 뇌를 해부하고 싶다. 진절머리가 났다. 몇 번이고 같은 소리를 한다. 자살을 방조한 것은 아니냐, 당신이 죽인 것 아니냐. 사전에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느냐. 제기랄. 정신과 의사가 그런 걸 모를 수 있냐. 씨발. 왜 하필 정신과 의사는 그런 걸 몰라서. 잘난 경찰분들은 왜 그럼 미제사건이 생기게 내버려둡니까? 하고 들이받아 버리고 싶지만, 그놈의 의사 선생님, 선생님. 환자들의 예약을 급히 미뤄두고 하루를 경찰서 구석에서 같잖은 소리에 예의 바른 소리로 답변하다가 정신병을 얻겠다 싶을 때쯤 겨우 풀려났더니, 다음날에는 예약이 취소된 정신병자들의, 혹은 정신병자는 아니지만 나한테 뭔가를 쏟아내고 돈을 쥐여주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의 의사 선생님이 되어, 물론 그 의사 선생님이라는게 사실은 비위나 맞춰주고 알랑방귀나 뀌어주며 말동무 해주는, 이를테면 거 사창가의 고급 창녀랑 뭐 특별히 다른가 하면 걔들보다 좀 못생기고 벌려줄 곳이 없다는 점뿐인...그러니까 쌍년아 자살은 내가 하고 싶은 건데. 하고 이를 바드득 간다. 그래도 또 사회적으로 의사 선생님이란 아주 모범적인 사회화를 배운 사람들이라는 상징이 있다 보니, 마음을 몇 번이고 곱씹어 먹어 장례식까지 갔더니만, 처음부터 끝까지 멱살을 잡고 흔드는 인간들만 천지 빼까리다. 야, 뒈질 거면 좀...알아서 지우든가. 끝까지 짜증이다.



준석과 희주가 사귈 때는, 그러니까.. 스무 살 언저리 정도의 앳된, 그 나잇대의 사랑다운 사랑을 하던...그런 시절이다. 그 준석이 대체 어디에 있는 준석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그게 있었던 사실 자체는 존재한다. 일종의 역사 같은 셈이다. 어쨌든 그런 준석은.. 순진하고, 착하고, 다 삶아 퍼진 라면 면발이나 혹은 김빠진 콜라의...뭐 하나가 아쉬운 그런 사내였던 걸로 기억한다. 요는 스무 살의 사랑이란 그런, 뭐가 좀 부족하지만 맛있는... 라면이 좀 퍼져도 간이 잘 맞고 뜨끈하면 먹을 만 하듯이, 김빠진 콜라도 얼음 가득 채운 잔으로 여름에 들이키면 그만한 별미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희주는 유독 준석을 대단하게 느꼈었고, 준석은 그게 참 힘들었으니. 준석은 모든것이 어렵기만 한 나이었고, 희주에게 준석은 퍼진 라면같은 섹스를 제외하면 그다지 어려운 게 없어 보였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물론 준석에게도 희주가 김빠진 콜라 같은 섹스를 하는 여자였음에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스무 살이란 어련히 그런 거 아니겠는가. 서로가 김빠지고 퍼진것도 모르던.



어쨌거나 오해는 시간을 쌓아 로맨스가, 환상이, 그리고 이내 욕망이 되어버린 듯하다. 준석은 희주와의 헤어짐 이후에도 희주에게만큼은 어쩐지 순진한 사내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준석은 사실 아주, 아주 순진함과는 거리가 먼 사내로 살아왔다. 그의 매 해는 그의 특권적이고, 그가 누릴 수 있는 장점을 어떻게 활용하며 살아가는지를 배우는 실천적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적 연인관계의 심심함, 일주일에 세 번의 잠자리가 모두 다른 나날들. 의대 선배들을 통해 배운 임신한 여자를 뒤처리 하는 법.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는 곳들. 놀아볼 여자를 만나는 곳들. 그리고 어울리는 여자도 노는 여자도 될 수 없는... 일종의 성인용품을 구하는 느낌의 곳들까지. 준석은 희주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철저하게 어른이 되어갔다. 언제나 무가치한 섹스가 끝나면 희주와 나눴던 사랑이 그리워졌지만, 그걸 부정하는 것이 준석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와중에 지나친 여자들 역시 아마 비슷한 이해관계였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과도하게 쿨한 전도유망한 정신과 의사, 훤칠한 키에 맑은 눈으로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 심드렁한 자태를 드러낸. 다만 몇 가지 아픔과 몇 가지 외로움을 너무나 쉽게 자극할 수 있었던, 마귀와도 같은 달콤하고 섹시한 말들을 건조하게 부릴 줄 알았던 준석. 주머니의 지갑은 튼실했고, 사회적 지위도 얼굴도 나쁘지 않았던 지극히 유복한 청년기. 그래서 희주가 결혼을 할 때는 자신의 선택이 더할 나위 없이, 명백히 옳은 방향이었음을 다시금 확신하기도 했다.




희주가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만큼 실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불쾌함이라는 세 음절로는 도무지 담지 못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준석은 그나마 남겨져 있던 작은 순진함을 보관해 둔 타임캡슐을 누군가 훔쳐가기라도 한 듯이 허탈해했다. 그에게 희주란 분기점이자, 결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이름 하나로 삶의 이정표가 되었을 여자. 그래서 준석은 희주와 만남부터 헤어짐까지의 그 모든 과정 바깥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희주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태도, 희주에게는 행하지 않았던 일들, 희주에게는 주지 않았던 것들, 희주처럼 다루지 않았던 모든...준석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금 입에 물었다. 담배로도 모자라 몇 가지 숨겨둔 마약들을 꺼내본다. 어떤 년을 부르지, 하고 전화번호를 굴려본다. 하지만 흥이 동하지 않는다. 두어 개비 핀 담배가 영 맛이 없다. 짜증이 삭질 않는다. 그는 결국 스무 살의 준석이처럼, 다만 편지 몇 글자를 코카인에 취해 적어보았다. 코카인이 없었다면 그런 준석이는 등장하지 못했을 텐데. 킁킁대는 그의 콧소리와 일정하게 타닥이는 키보드 소리만이 적막한 방 안을 채운다. 딱 외로움의 크기를 적당히 밀어낼 만큼이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야 코카인의 효과가 쫘악 말초신경까지 퍼지는 듯 준석은 의자에 추욱 기대어 늘어진다. 아, 누가 좀 빨아줬으면 좋겠다. 전화기가 손에 닿는 거리에 없다는 게 아쉽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는 손으로 몇 번 주물럭대다 이내 잠들어 버린다.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준석은 점점 깨달아간다. 희주가 꽉 쥐고 있던 스무 살의 순정이 2015년의 희주로 인해 조각나고 준석은 마치 강간을 당하는 듯하여 슬픔과 화가 자꾸 뒤섞였다. 점점 답장은 하기 싫어지고, 이내 아는 정신과에 가서 치료나 받으라는 말을 겨우 공손하게 남겨내었다. 그때만큼 뿌듯하고, 그때만큼 공허할 때가 없었다. 그 날, 준석은 집에서 난교파티를 벌였다. 남녀 여럿을 모아 코카인과 엑스터시를 술에 타 먹어가며 비아그라와 시알리스를 먹은 남자들이 온갖 여자를 방바닥과 침대와 소파에서 굴려댄다. 괴성인지 교성인지 모를 악다구니들이 적막한 준석의 방을 가득 채우지만, 어쩐지 준석의 방에서 외로움은 단 한 줌도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준석은 기억하기도 어려운 수 번의 키스와, 헐은건지 찢어진 것인지 따끔거릴 만큼 써먹은 귀두의 감각에도 한쪽으로는 여전히 스무 살의 준석을 그리워한다. 스무살의 희주가 사라져버린 곳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준석만이 있다. 세피아 톤으로 점점 흐려지기는 했어도 정말 많은 것이 있던 공간들에 희주가 없다. 이내 화면은 흑백이 되고, 준석의 외곽선도 블러로 문지르듯 하나하나 찢어져 간다. 여자는 귀를 깨물고, 코를 깨물고, 준석의 등을 할퀴고, 준석의 엉덩이에 달라붙지만 준석의 눈은 여전히 허공 어딘가에 심드렁히 멈춰있다.




희주의 마지막 편지를 받았을 때 준석은 더 이상 희주가 히읗과 으와 이와.. 자음과 모음의 조합만큼 의미 없어 보였다. 모를 리가 있나. 준석은 그 잘난 정신과 의사시고... 죽을 셈인가. 대충 그려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히 그녀를 구원치 않은 것은...글쎄. 구원을 할 수나 있었을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희주가 죽은건 남편의 문제가 가장 컸을 테고... 그러나 이미 준석에게는 그 남편이 밉지조차 않은, 어쩌면 희주에게 뭐 그런걸로 그러느냐고 싶어할 정도의 꼰대만이 남은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희주가 지워졌을 때는 이미 준석도 지워졌다는 것이 그가 알게 된 유일한 사실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희주는 죽었다. 차가운 동해는 수심도 꽤 깊고 파도도 높다. 며칠이 지나면 시체는 탱탱 불고 플랑크톤이 여기저기 뜯어 먹은.. 몰골을 알 수 없는 유해가 되었을 텐데 유능한 경찰들이 그 넓은 동해에서 용케도 불어터지기 직전인 시체를 찾아서는 장례를 치웠다. 울고불고하는 가족들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남편과, 고작 바람피는 제의를 거절한 옛사랑의 젊은 의사를 미워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준석은 그만 지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로 봐도, 문제는 내가 아니잖아.




장례식장을 벗어나 길모퉁이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가로등이 거의 없는 어두운 길가의 으슥한 곳에서 준석의 두 눈과 빨간 담뱃불만이 번뜩인다. 깊게 들이마신 연기가 코로 약하게 흐트러져 나온다. 역시 종이 담배보단 대마가 좀 더 깔끔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뻐근해진 뒷목을 한 손으로 주무른다. 희주에 대한 생각들이 뜨문뜨문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더는 묻혀있던 감정의 찌꺼기조차 없어 깊게 바라볼 겨를이 없다. 이젠 스무 살의 준석이 아닌 밀린 환자들과, 사석에서의 술 약속만이 담배를 태우며 생각해야 할 유일한 그리움들이다. 희주의 발인은 내일이라고 한다. 불어터진 몸뚱이다 보니 화장을 한다고 한다. 물에 빠져 죽었더니 불에 태우는 건 좀 악취미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불에 타 연기로 오르고 하얀 뼛가루만 물에 뿌릴 때 즘에는 준석은 희주를 완전히 까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희주의 얼굴이 희미하다. 어떻게 생겼더라...준석은 다 태운 담배를 발로 비벼끈다. 스마트폰을 누르니 몇 개의 오빠 하는 카톡들이 있다. 목록을 주르륵 내려 희주의 얼굴을 찾는다. 몇 번을 뒤적거려도 한눈에 띄질 않는다. 겨우 준석이 희주의 얼굴을 찾았을 때, 확대된 사진의 이목구비를 보며 어색함을 느낀다. 이질적이다. 그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끄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한걸음, 두 걸음. 희주의 시체를 뒤로하고 가로등이 꺼져가는 어두운 길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준석이었을지, 준석일지, 준석인지 모를 한 정신과 의사의 발걸음이 점점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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