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2/14 19:39:14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진술> - 하일지


‘내가 체포되어 경찰에 끌려오다니, 정말이지 내 생애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소.'

첫 구절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소설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일인칭 화자 '나'의 하룻밤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여행 온 한 도시에서 살인 혐의로 체포된 남자가 그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진술하는 형식의 이야기죠.

여기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나’의 진술을 시간상으로 살펴보면 국악고등학교의 선생으로 재직하던 시절, 당시 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 아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극심한 반대 의사를 보이던 장인과 처남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인정하게 되죠. 그 후 아내와 ‘나’는 나의 학업 때문에 외국에서 생활하게 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긴 했으나 무사히 귀국하여 ‘나’는 교수직에 임용됩니다. 부부는 아이가 없다는 걱정이 있긴 하지만 10년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고, 최근엔 기다리던 아내의 임신 소식까지 듣게 되면서 더욱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왔던 차에, 처남의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그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나’가 지목되면서 알 수 없는 장소로 끌려오게 된 것이죠.

중요한 점은 이것이 소설 속에서 오롯이  ‘나’가 진술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나’는 대학교수이자 철학박사인데, 그 신분으로 인한 권위가 일정 정도 진술의 신뢰성을 높입니다.)

그러나 ‘나’를 추궁하는 측의 심문이 진행될수록 ‘나’의 진술은 점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나’는 전처와 아직 이혼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 따른 장인에 반대로 아내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나’는 “사실을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한 진술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거짓 진술을 인정합니다. 또한 아내(전처가 아닌)가 사망 처리된 호적 등본과 같은 명백한 물증을 들이밀어도 그러한 상황을 부정하는 ‘나’의 태도에 ‘나’의 진술뿐만이 아니라 ‘나’라는 화자 자체에 대한 의심마저 생겨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화자 ‘나’의 진술은 서사적 권위를 상실합니다. 그리고 화자의 진술이 권위를 상실하면서 이제 독자는 드러난 화자가 아닌 텍스트 속에 위치한 내포저자의 의도를 알아내고 추리해야 합니다.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진술은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나’가 아내의 죽음을 부정하는 정신적 착란 상태에 있음이 밝혀집니다. 진술 중 ‘나’가 사랑에 대해 정의했듯이 사랑을 어떤 대상에 대한 과장된 심리의 지속이라고 인정한다면, ‘나’는 과장된 심리의 지속 상태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니, 그것으로부터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는 8년 전에 일어난 어린 아내의 죽음을 몹쓸 악몽을 꾸었다고 인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그 미몽 속에서 끊임없이 아내의 죽음을 언급하며 자신을 치료하고자 하는 손위 처남인 정신병원 원장을 허상으로 치부합니다. 상상과 실재가 뒤섞여 그의 병을 치료하려 하는 현실의 처남을 허상으로, 그들 부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환상 속의 처남을 실재로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과 아내의 행복을 위협하는 허상 속 처남을 없애려 마음먹게 되고, 처남의 사무실에서 그를 흉기로 때려죽이는 끔찍한 사건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진술 과정에서 살인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소설 속 ‘나’는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허상을 제거했을 뿐이니까요. ‘나’에게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기에 하늘에 맹세코 자신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나’는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습니다.

소설 속의 ‘나’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환상을 통해 대체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아내의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스스로의 이성을 죽이는 애처로운 몸부림입니다. 깊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인간이란 부조리하고, 이성은 나약합니다. 대학교수이자 철학박사인 ‘나’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아내와 함께 환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택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저자는 독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믿을만한가? 살인자가 된 ‘나’를 보며 혐오와 분노가 아니라 끝없는 슬픔과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까닭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겠죠.  



















2
  •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하일지인데!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79 일상/생각논란의 사진;; 33 눈부심 15/10/17 8882 0
513 요리/음식저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입니다. 한국음식 중에선... 14 이젠늙었어 15/07/05 8885 0
577 정치김다운이라는 학생. 26 헤칼트 15/07/13 8885 0
1104 기타어떤 똥휴지회사의 잔머리 16 눈부심 15/09/26 8885 0
3295 스포츠[NBA] 하킴 올라주원의 드림 쉐이크 8 Leeka 16/07/20 8886 0
568 기타장기 묘수풀이 한번 더 풀어 보세요. (댓글에 해답있음) 13 위솝 15/07/11 8889 0
1325 일상/생각[고민]같이 수업 듣는 사람한테서 술냄새가 너무 나요.. 43 얼그레이 15/10/23 8890 0
1768 도서/문학<진술> - 하일지 40 마르코폴로 15/12/14 8892 2
48 기타(데이터 주의) 간지남 6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5/05/30 8894 2
247 기타보글보글 6 헬리제의우울 15/06/07 8897 0
315 기타저딴 것도 교수인가 - 홍익대 기말고사 사건 28 바코드 15/06/12 8897 0
493 문화/예술처음 써보는 2분기 애니 이야기 12 술먹으면동네개 15/07/02 8904 0
336 기타와이프의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57 세인트 15/06/15 8906 0
1295 음악Arcade Fire - Awful Sound (Oh Eurydice) / It's Never Over (Hey Orpheus) 8 새의선물 15/10/20 8906 2
62 기타일본서 가입및 인증 올려봅니다 9 Leeka 15/05/30 8912 1
7704 의료/건강의사쌤이 시킨 한달간의 금주+다이어트 후기 27 tannenbaum 18/06/17 8914 26
1299 정치문대표의 내로남불? :문재인"안철수 말속엔 DJ-盧 비하 담겨있어" 39 양웬리 15/10/20 8915 0
7952 사회가짜학회에 논문을 내는 한국 교수들 39 CIMPLE 18/07/26 8929 11
370 과학/기술혜성탐사로봇 '필레'가 일어났습니다 15 눈시 15/06/20 8930 0
203 기타한국이 기록적인 속도로 메르스 감염자를 늘리고 있습니다 31 Leeka 15/06/04 8942 0
7533 게임보드게임 "아그리콜라" 구판(2007) 및 개정판(2016) 후기 16 알탈 18/05/17 8944 3
276 기타여름휴가 계획 다들 세우셨나요? 57 회전목마 15/06/09 8946 0
10 기타가입했습니다!! 이럴때 아니면 가입 인사도 못쓰겠죠! 6 쉬군 15/05/29 8947 2
1226 문화/예술새벽 3시에는 역시 우울한 노래죠. 12 Lionel Messi 15/10/11 8947 1
331 기타흔한 경제학자의 미래 예측 7 낭만토토로 15/06/15 8955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