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2/15 16:49:25
Name   레이드
Subject   변했을까?
편의상 반말과 약간의 비속어를 사용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0.
오래간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고등학교 거의 내내 같이 붙어다니곤 했던 아이들이다. 물론 대학교가 갈라지면서 잘 못 만났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친구들이었다. 나 까지 포함해서 넷, 시커먼 남자놈들끼리 저녁 아홉시에 모여서 뭘 하겠는가?
당연히 술을 먹으러 가야지. 술도 잘 못 마시면서 그래, 가자 하곤 따라나섰다.

뭐 먹을래? 이렇게 묻자, 놈들의 대답이 한곁같이 다 똑같다. 아무거나-
아니 xx 이 새끼들은 왜 자기 주체성이란 게 없나. 이제 뭐 먹고 싶은지 정도는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 그렇지 싶어
이럴 때 늘 고민없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 치맥을 먹기로 했다.

1.
근처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앉아 메뉴와 술을 시키니 직원이 저기 민증좀.. 하고 말을 꺼낸다.
와- 시바 어렸을 땐 민증 보여달라는 게 창피했는데 이젠 기쁘다.
내가 어려보여서 그런거야 새끼들아- 형한테 잘 보여. 뭐 이렇게 킬킬대고 보여주니 주방으로 돌아간다.
(물론 놈들은 내가 아니라 서로 자기들이 어려보여서 그런거라며 말하지만 그런건 무시해주도록 하자)

2.
메뉴를 시키고 이제야 찬찬히 애들 얼굴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와 시바- 확 늙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다들 삭긴 삭았더라. 뭔가 이제 고딩같은 풋풋함이 없어 이제 다들 아저씨야 아주 그냥,
안어울리는 코트같은거나 입고.. 바바리냐?
셋 중 한 놈은 그래도 가끔 연락해서 얼굴을 보곤 했으니까 익숙했지만, 나머지 두 놈은 대학 들어간 이후로 만난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대전으로 학교를 간 C는 진짜 오래간만이었다. 한 3년? 아니 4년만인가?

C에게 요즘 뭐하고 사냐고 물었더니 아직도 학교 다닌다고 한다.
야, 너 학번이 어떻게 되냐? 10, C가 대답한다.
10? 10 이라고? 너 그럼 삼수한거냐? 사수한거냐?
삼수. 주억거리며 C가 대답했다.
그럼 졸업은?
아직 3학년 2학기야. 멀었지 뭐.
야 이 미친xx야 너 그럼 스물 아홉되야 졸업이냐? 존나 아.. 답 안나오는 새끼..
옆에 있던 B가 C의 대답을 가로채며 말했다.

듣고 있던 D가 B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뭐하냐? 저번에 전화로 대학원 간다고 그랬던거 같은데
나? 지금 대학원 다니지 뭐, 이제 막 한 학기 다녔어.
너도 얘 못지 않게 답 안나오는 새낀데.. D가 비아냥 댔고 B는 괜찮아, 난 하고싶은 걸 하니까. 하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음식이 나왔고, 짠 술 잔이 한 순 번 돌았다.
나는 B에게 물었다.

대학원 생활은 할 만 하냐? 좀 어떠냐?
아직까진 할 만하지 뭐 다음 학기부턴 돈 없어서 알바 뛰고 조교하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때부터가 사이즈 안나오는거지.
근데 니가 뭘 전공한다고 했더라?

어, 일본사. 그 중에서도 아마 근대 일본사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 맞다. 이 새낀 태평양전쟁에 꽂힌 밀덕이었지..시팔..
대학원도 좀 더 알아보고 갈 것이지, 한 군데 꽂혀서 가놓고 가서 후회하는 새끼가 이 놈이었다.
교수들도 대학원을 왜 거길 갔냐며 자기를 병신 취급한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병신..

술이 한 순 번 더 돌았다.

B가 내게 물었다.
야 너는 공무원 준비한다매. 붙었냐?
어, 운이 좋았지 뭐.
올, 새끼.. 어디 붙었는데
어? 여기지 뭐, 앞으로 계속 여기 살려고 쓴거지.
와 시바 인생 폈네 발령은?
아직, 그리고 뭘 또 그거 된 걸로 인생까지.. 그냥 자기 앞가림 하는거지 뭐 임마.

B는 이윽고 다시 D에게 물었다.

넌 뭐하냐?
나? 졸업 유예하고 공부해.
공부? 뭔 공부?
토스랑. 이거 저거. 취준하는거지 뭐.
크크크 너도 딱히 다를게 없구나.

D는 B에게 얼른 짠을 권했고 또 다시 술이 한 바퀴 돌았다.

3.
우리는 이제, 각자 어느 정도 취했으므로 여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너 연애 사업은 좀 잘되냐? 걔중에 그나마 잘생긴 C에게 물었고
C가 어, 요즘 연애는 안하는데 썸 타는 애가 있어. 하고 대답했다.

올- 몇 살인데?
어? 스무 살.

뭐?
스무 살

스무 살? ...96년생? 96년생? 이 XX 도둑놈 XX 너 일부러 학교 안 그만둔거지
시팔 스무살.. 내 사촌 동생이 지금 스무 살인데...
얼굴 좀 보자. 안돼. 뭐가 안돼 새끼야. 좀 보자.

그렇게 본 여자 아이의 얼굴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뻤다.
이런 애가 C랑 썸을?
존나 어리버리하고 존나 이상한 존나 4차원인 얘랑 왜?

불쌍해서 그런건가? 마더 테레사의 현신인가? 아님 뭐 돈으로 꼬셨나?
아닌데.. 이새끼가 돈은 좀 있지만 쳐 바를만큼 있는 건 아닌데?
아.. 시팔.. 부럽다.

갑자기 현자 타임이 오더라.
개가튼거..

술을 한 잔 더 먹기로 했다.

4.
D가 풀린 눈으로 말했다,
난 사실 XX가 공무원 할 줄은 몰랐는데.
C가 이어 말했다.
어, 그러게 사실 이 새끼 PD하겠다고 존나 깝치고 다닐때 존나 이상한 짓거리 많이 했잖아 뭐했드라?
B가 연달아 말했다. 이 새끼 뭐 보러간다고 학교 조퇴하고 그랬었는데? 상호(담임샘 가명)가 존나 이 새끼 골때리는 새끼라고 욕하고 그랬잖아.

아 맞다. 나 영화젠가 보러간다고 고2때 조퇴하고 그랬었지. 근데 이 새끼들이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는거지. 스토커새끼들..
.. 뭐. 어찌 됐든

XX가 제일 이상할 거 할 줄 알았더니 가장 재미없는 걸 하는거보면 변하긴 했나보다.
C의 말에 B가 동의를 표했다. "아까 담배 피우면서 얘기헸잖아. 쟤 뭔가 변했다고, 뭔가 어른스러워졌달까? 뭔가 분위기가 변했어."
D는 애들의 말에 "난 잘 모르겠는데" 하고 말했지만, 넌 임마 쟤랑 종종 봤잖아 한 마디에 다시 조용해진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내가 변했나?
내 자신은 뭔가 바뀌었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무언가 꿈이 여러차례 수정되긴 했지만, 내 스스로는 항상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느낌이 묘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상해보이냐고 물으려다
그건 너무 오그라들고 이상한 물음이라 입을 닫고
그냥 술을 먹었고

또 술을 먹었고
또 먹었고

결국 나는 택시를 잡고 집에 돌아왔다.

고등학생 때 우리는 각자 이 맘 때쯤 무엇이 되어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얘기하곤 했는데
막상 되고나니 ... 그저 술만 먹었다.
나는 변했을까?
아니면 세상이 변한걸까?

열심히 살아야 되는데 갈수록 좀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592 게임보드게임 - Heaven and ale (천국과 맥주) 8 Redcoffee 18/05/27 5943 4
    3538 영화보다 나는 국산 아니메. <카이 : 거울 호수의 전설> 2 맷코발스키 16/08/20 5287 1
    514 기타보는 웹툰 29 헬리제의우울 15/07/05 13466 0
    5564 육아/가정보네이도 무인양품 에어 서큘레이터 비교 4 빠른포기 17/05/03 27712 3
    13085 꿀팁/강좌보기싫은 유튜브 채널 안보이게 치우기 9 메리메리 22/08/15 4089 2
    11277 경제보금자리론 기본 금리가 1월에 추가 인상됩니다. 6 Leeka 20/12/26 3950 1
    13537 일상/생각보글보글에 얽힌 추억^^ 5 큐리스 23/02/03 2074 0
    247 기타보글보글 6 헬리제의우울 15/06/07 8970 0
    3462 기타보고(수신자 : NULLPointer님) 11 givemecake 16/08/06 4318 3
    14740 일상/생각보고 들은 주취자 응급실 난동 5 방사능홍차 24/06/12 1228 0
    14966 일상/생각병원을 다녀와서 2 4시30분퇴근 24/10/07 697 0
    5422 의료/건강병원을 다녀온 환자의 넋두리 16 pinetree 17/04/12 5787 5
    4560 일상/생각병원은 왜? 간만에 친구를 만난 단상 1. 10 홍차의오후 17/01/07 4703 7
    2697 음악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서 듣는 음악 3 Beer Inside 16/04/27 3603 0
    2679 의료/건강병원에서 피진어 현상 54 리틀미 16/04/23 6801 3
    5892 의료/건강병문안 문화 개선, 가능한 일일까? 33 Zel 17/07/05 6633 0
    5540 일상/생각별점 테러를 받아보니 신선하네요. 11 givemecake 17/04/28 3930 1
    2380 일상/생각별일 없이 산다. 6 쉬군 16/03/11 3426 6
    7116 도서/문학별의 계승자 / 제임스 P. 호건 14 임아란 18/02/14 4392 7
    7280 도서/문학별을 먹자 발타자르 18/03/26 4135 6
    13483 일상/생각별개의 환대 하마소 23/01/16 1781 5
    15012 일상/생각변화의 기술 8 똘빼 24/10/31 540 9
    12244 IT/컴퓨터변화무쌍한 웹 기술 역시 톺아보기 - 1 13 nothing 21/11/05 3999 7
    1778 일상/생각변했을까? 2 레이드 15/12/15 4462 0
    11268 정치변창흠 국토부장관 청문회 - 오늘의 해명들. 13 Leeka 20/12/23 3191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