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2/19 11:53:34
Name   ohmylove
Subject   [종교]나는 왜 기독교를 거부하게 되었나
솔직히 이 글 쓰면서 제 얕은 학문적 깊이가 드러날까봐 두렵긴 한데, 그래도 나름 대화의 장을 여는 정도로는 이 글이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종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불쾌하신 분은 이 글을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릴때부터 성경 학교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어릴때 다른 애들은 딴짓도 하고 목사님 말씀도 잘 안 들었지만
저는 정말 열심히 목사님 말씀도 듣고 또 성경의 논리가 그럴듯해서 또 멋져서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아,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이 세상에 친히 내려와 죽임을 당하셨구나. 멋있다.')

제 교회 사람들은 대부분 신실하게 기독교를 믿고(아니면 믿는다고 생각하고) 또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교회에서 문제 일으키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뭐 물론 대형교회의 예는 알고 있었지만 제가 직접 겪지 않다보니 실감이 안 났습니다.
또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교회 안에서 외치지만(이건 솔직히 교리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불교 등 다른 종교도 존중했고요.

문제는 성경의 말씀은 결코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기독교를 믿으면 상당부분 이 성경의 말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사람이 썼기 때문이죠.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왠만하면 곧이곧대로 해석하려는 게 기독교 신자의 당연한 마음이기 때문에,
만약 세상의 어떤 새로운 생각이 (곧이곧대로 해석할 때의) 성경 말씀과 충돌한다면, 그 새로운 생각과 성경 말씀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물론 무신론적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요.(신이 최초에 빅뱅 이전의 무(無)의 상태를 만들었고, 빅뱅 후에 세계가 알아서 진화를 거듭했다 하는..) 그런데 제 생각에,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굳이 신의 존재를 도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신의 존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또, 인격체가 아닌 존재가 단지 오랜 시간 동안의 진화로 이렇게 정밀한 생명체와 세계를 이룩해놨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을 조금만 봐도 그 논리적 전개의 아름다움이며 또 과학적 근거가 너무 탄탄하기 때문에,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정말 0.0000001%의 확률로 진화론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성경이 틀릴 확률이 훨씬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 허무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또 내가 죽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못 가고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허무한 것도 끌어안을 수 있는 게 진정한 아름다움이구나, 하구요.

과학은 여러 사람이 자유롭게 많은 의견을 내놓고, 또 자신의 오류를 적극 수정해 지속적으로 update를 합니다. 반면 성경은 2천년 전의 version 그대로 있고,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자면, 특히 동성애 같은 게 문제가 되죠. 과연 동성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 것이냐, 뭐 이런 판단을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오바마는 기독교인이나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죠. 하지만 극단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은 아니겠죠. 이렇게 고민하느니 그냥 세상 도덕을 받아들이고 맘편하게 열린 마음으로 사는 게 낫다고 봅니다. 성경의 도덕적 명령은 기독교인에게는 진리이나 일반 사람에게 폭력일 수 있겠죠.

과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기독교를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아니 받아들이면 더 안 좋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를 거부하게 되었고, 몇년째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누가 예수님에 대해 욕하고 저주할 때 반사적으로 분노가 끓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742 철학/종교다윗왕과 밧세바 이야기 구약 시대의 가장 큰 섹스 스캔들 16 기쁨평안 16/09/21 6543 8
    3642 철학/종교손오공과 프로도 배긴스 31 기아트윈스 16/09/04 6382 17
    3544 철학/종교주디 버틀러가 말하는 혐오언어의 해체 73 눈부심 16/08/21 8499 3
    3533 철학/종교분할뇌 문제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 35 April_fool 16/08/18 5834 0
    3519 철학/종교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15 Ben사랑 16/08/15 6533 0
    3516 철학/종교중2병의 원인에 대해서 제 멋대로 고찰 13 Ben사랑 16/08/15 6093 0
    3389 철학/종교. 51 리틀미 16/07/29 6787 5
    3137 철학/종교제가 느낀 것 주절주절 7 전기공학도 16/06/27 5629 1
    2716 철학/종교개신교 저격 이단, 신천지 93 ArcanumToss 16/04/30 7668 3
    2573 철학/종교종교, 도덕적 결벽증의 저항 2 커피최고 16/04/08 5647 1
    2458 철학/종교진화론을 인정하는 창조론들 41 Toby 16/03/23 9029 0
    2307 철학/종교매너의 진화 9 눈부심 16/02/28 6162 7
    2043 철학/종교인류의 진보, 미래는 낙관적인가-하편 25 눈부심 16/01/17 6426 2
    2042 철학/종교인류의 진보, 미래는 낙관적인가-상편 10 눈부심 16/01/17 7302 2
    1889 철학/종교恥不脩 不恥見汙 5 삼공파일 15/12/30 7786 8
    1863 철학/종교<크리스마스 기념> 알기 쉬운 종교와 사회 이야기 8 삼공파일 15/12/24 6708 3
    1816 철학/종교[종교]나는 왜 기독교를 거부하게 되었나 33 ohmylove 15/12/19 8417 0
    1763 철학/종교과학의 역사로 읽어보는 형이상학의 구성과 해체 30 뤼야 15/12/13 8229 6
    1706 철학/종교5분으로 완성하는 현대 철학 족보 15 삼공파일 15/12/04 8912 0
    1705 철학/종교정신분석학 관련 읽으면 재밌는 글 8 삼공파일 15/12/04 9151 1
    1700 철학/종교무위자연에 대한 착각 4 커피최고 15/12/04 6765 1
    1585 철학/종교사사키 아타루 [야전과 영원]이 출간되었습니다. 21 뤼야 15/11/18 8979 1
    1534 철학/종교라틴아베로에스주의에 대한 단죄와 학문 풍토의 변질 1 커피최고 15/11/12 9525 1
    1489 철학/종교 종교적/무교 가정 중 어디가 더 관대할까? 25 모여라 맛동산 15/11/07 10326 0
    1437 철학/종교무인자동차와 도덕적 딜레마 62 눈부심 15/11/03 12689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