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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2/22 20:55:06
Name   김나무
Subject   루살카에 대한 기억, 하일지의 진술을 읽고
홍차넷에서 하일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삼일에 걸쳐 그의 소설을 두권 읽었습니다. 경마장 가는 길과 진술. 아주 재밌었어요.
이 글은 독후감이기도 하고,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가 본 하일지의 형식이기도 하고 제 기록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다른 재밌는 소설 쓰는 작가를 소개시켜주시면 좋겠네요. 올 초에는 박상륭을 재밌게 봤습니다.

그러고보니 첫글이네요.
반갑습니다. 가입인사를 쓴지가 한참인데...

저는 몇년동안 그림만 그리다가 최근에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책이나 영화등을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홍차넷은 문서재단기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들어오게 됐어요.
헌책방에서 산책이 제본이 뜯어져서 아마 재단에 대해 찾다가 오게된 것 같아요.
책은 아랍에 관한 짧은 역사이고, 지금 중동이 그렇듯이 펼치자마자 쪼개져서 합쳐지길 바라고 있네요.

이 글을 문학, 이라는 분류에 넣어야할지 창작, 이라는 분류에 넣어야할지
혹은 나는 그림그리는 사람이니까 문화/예술란에 넣어야할지
분류가 많아서 생각할 게 많아지네요.
독후감이니까 문학에 넣습니다.

글이 좀 길어서 소설 진술에 관한 부분은 앞에 따로 올립니다.


우선 이에 앞서 나는 하나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건 굉장히 중요한 오해이기도 하고 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직접적인 동기이기도 하다.

하일지의 소설 진술의 8장은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Schizoid Personality라고요?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라는 고유명사는 4장 막바지에 나오는 환상과 실제라는 고유명사와 같이 이 소설 전체의 스토리를 암시하는 장치인데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그저 넘어갈지 모르나 나는 그걸 읽는 순간 책 전부를 이해했다. 아이덴티티라는 영화와 같다.

그런데 이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다. 혹은 고의적으로 잘못 사용한 것이다.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는 번역하면 분열성적 성격장애를 뜻한다. 이와 유사한 단어로는 분열증적 성격장애가 있다. 분열증적 성격장애는 schizophrenic으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우리가 정신병자, 정신분열증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떠올릴 때 해당하는 것이 후자의 분열증적 성격장애이고 진술에서 주인공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병적인 증상이다.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고,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분열성 성격장애는 고독한 방랑자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혼자 지내며 혼자 살아간다. 자신의 세계를 쌓고-이 문장을 쓰며 귤껍질을 벗긴다- 그것에 만족한다.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지는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관계가 무서워서 사람을 피하는 은둔형외톨이들과도 다르다. 그들은 관계의 필요성을 남들만큼 강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과연 용어를 착각해서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글의 후기를 볼때에 혹은 그의 처녀작인 경마장 가는 길을 관통하는 '오해'에 비추어볼 때에 저자는 자신의 분열성-분열증이 아닌-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들어야 하는데-타인에게 나의 논리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루살카에 대한 기억. 하일지의 소설 진술을 읽고. 이 글은 희미한 기억과 오해와 궁금함으로 쓰인다.



22일 오전 4시 31분...



내가 눈을 뜨면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우선 몸의 불균형을 확인한다. 몸의 기울기를 확인하는 것인데 이때 수평자의 물방울은 내 안에, 아마도 배꼽 근처에 있어서 나는 바깥 것에 의지하지 않고도 이 수평을 똑똑히 의식할 수 있다. 물방울은 중심을 가리키는 눈금에서 왼쪽으로 삼분의 일만큼이 기울어져 있다. 남자의 성기를 '자지' 라고 부를 때, 이는 좌지, 왼쪽으로 향해 기울어져 있다는 뜻인데 나는 온몸이 왼쪽으로 삼분의 일 발자국 만큼 기울어져 있어서, 이대로 하나의 거대한 성기, 호사가들이 보기에는 나라는 인간 전체가 발기의 가능성을 내재하는 쭈그라든 상징체인 것이다.



22일 오전 4시 31분 전북 익산에서는...



귀마개를 빼고-한 쪽은 늘 어디론가 사라져있다- 이불을 왼발로 걷어차고 책상에 있는 두개의 컵중, 누런 자국이 말라붙어 있는 사기컵을 들고 커피를 탄다. 보통 때는 얇은 추리닝 한장으로 족하지만, 막 일어났을 때는 몸의 체온이 떨어져 있어서-쪼그라든 불알처럼- 그 위에 덧옷 한겹을 더 껴 입고 슬리퍼를 끌며 밖으로 나간다. 아파트는 감금 시설을 연상케하는 긴 복도로 되어있고, 복도와 마주한 창은 방범을 위한 쇠창살이 덧대어있다. 복도는 바로 경치와 마주하는데 그 사이에 커다란 창문이 닫혀 있어서, 온기를 보존하는데는 적합할지 모르나, 대신 자유, 공동체, 이웃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섬, 빌어먹을 섬...



22일 오전 4시 31분 전북 익산의 한 섬에서는...



긴 복도는 끝에서  T자로 꺾여 그 사이에 엘레베이터가 있고 층계로 난 문이 있다. 이상한 건 나는 이곳에 유배 될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약 이년동안 엘레베이터로 향하는 출구의 문이 닫힌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문은 복도로 뚫린 창문이 좌우로 각 네개씩은 들어갈 정도로 넓은 것이어서 여기에는 좀 더 많은 수의 창살과 남색 유니폼의 경비원 한명쯤은 필요할 것인데 그런 것은 없다. 아마 복도에 가득한 쇠창살을 뜯어 녹인다면 저까짓 출입문쯤이야 단단히 틀어막는 것은 물론이고 감시하는 경비원을 위해 바퀴달린 의자 하나쯤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데 그런 것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껍데기에 싸여 쪼그라든 채로 층계로 난 문을 열고 창문을 열고 차가움에 감탄하며 담배를 길게 피고 커피를 마신다.

방으로 돌아와 밥통을 열고 남은 밥을 확인하여 나는 내가 먹을 양과, 저녁에 먹을 양, 동생이 먹을 양을 계획한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고 블로그며 즐겨찾는 사이트를 방문한다. 내 블로그는 최근까지도 지독히 폐쇄적인 공간이었으나 최근 '내'가 어떤 마음을 먹음에 따라 약간의 분칠을 하고 알록달록한 옷-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랑한-을 입기도 하는 등 상대방을 위한 배려를 하고 있다. 나는 쪽지창을 열어 그녀가 쪽지를 읽었나 확인해보는데 읽지 않음, 으로 표시되어 다소 실망하고 섬, 빌어먹을 섬을 되뇌이며 내 블로그의 관리창에 들어간다.




22일 오후 12시 31분에 나는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기 세시간 전쯤에, 그러니까 아홉시 오십구분에 새로운 댓글이 달려있는데, 나는 Русалка란 아이디를 보고 그것이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추측해보다가 검색한다. 그것은 루살카 혹은 루살까라고 읽는다. 러시아어로 인어공주란 뜻인데 언뜻 떠오른 인어공주는 빨간머리에 빨간 입술을 한 디즈니의 인어공주고, 검색창을 내려보니 나는 인어공주 라는 어떤 영화의 포스터가 나온다. 나는 그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어떤 영화들은 영화에 정보가 빠삭한 사람들이 아니면 언제 어디서 개봉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이다. 이천구년 혹은 이천십년에 학교를 마치고 가려는데 동기 여자애 두명이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였다. 나도 꼈고 우리는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이화여대에 가 그안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 들어갔다. 거기서 표를 끊고 기다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무슨 얘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두 여자애들은 예술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한명은 인문학자의 딸이었고 다른 한명은 신문기자의 딸이었는데 아마도 어렸을적부터 미술이나 영화 영상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학원에 매여서 입시에 홍역을 치루다가 겨우 합격한 이들과는 입는 옷이며 듣는 음악이며 말투가 달랐는데, 그것이 그들을 매력적이게 했다.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같이 영화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을때, 나는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이며 재미있느냐, 그런 것들을 묻기보다는 그자리에서 바로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이 경험하려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극장은 이태껏 내가 경험한 극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작고 촘촘한 자리를 따라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로 여성들이었는데 여대 내부에 위치한 극장이어서도 그랬고 앞으로 내가 보게 될 영화가 일반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전제하는 일반 남성들, 이란 단어의 편견은 이 단어를 사용한 내 자신까지도 편견지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그 영화는 쭈그러든 불알을 커지게 하는, 발기시키는 그런 종류의 영화는 아니었다.

약 오년 육년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내가 그 영화를 기억할때에 기억나는 심상이란 어둡고 파란 분위기와, 침대에서 우는 여자의 모습, 풍선, 거리를 비척비척 걷는 여자의 모습 따위의 단편적인 것이 전부다.



22일 오전 4시 31분 전북 익산에서는 중심을 향해 솟은 탑이...



나는 루살카가 링크된 블로그를 들어가 몇 되지 않은 글을 읽어 루살카가 누군지를 추측한다. 우선 주소가 눈에 띈다. 루살카는 자신의 블로그를 찾는 이에게 루살카의 사람이 되어달라고 하고 있다. 그녀는 물에서 건져올려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내가 그녀, 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이미 그녀의 기록을 읽어 루살카가 그녀라는 것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루살카는 악몽을 자주 꾸고 많은 시선 속에 있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자주 운다.

루살카는 영화에서 따온 이름인걸까? 영화 속의 푸름과 악몽을 자주 꾸는 루살카를 연결지으며 생각한다. 구겨진 하얀 이불과 비척거리며 거리를 걷는 모습 러시아어의 낯선 억양을 떠올린다. 그녀는 영화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혹시 내가 그 영화를 보던 그 작은 극장의 촘촘한 의자에 내가 앉았던 좌석의 앞, 뒤 삼분의 일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영화를 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그녀가 감정을 배설하기 위하여 연 블로그가 그녀가 영화를 보았다는 데에 확증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오년전의 루살카도 어제의 루살카처럼 울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루살카에게 그녀를 대신하는 물, 깊은 물이어서 그녀는 물로 가득 가라앉아있는데 참지 못하고 뛰쳐 나온 것이다. 사람은 물 속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귤을 까먹으며 이런 추측들을 했다.



22일 오전 4시 31분 전북 익산에서는 중심을 향해 솟은 탑이 왼쪽으로 삼분의 일만큼 기울어져...



내가 귤을 까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초록색 꼭지부분 바로 밑에 엄지손톱을 쿡 박고 꼭지의 심을 들어낸다. 그리고 사분의 일만큼을 아래로 벗긴다. 방향을 돌려 사분의 일을 벗기고, 방향을 돌려 남은 사분의 일과 사분의 일을 벗긴다. 그러면 귤껍질은 십자 모양을 하는데 꼭지가 달린 사분의 일이 좀더 긴 직방형의 십자가 모양이다. 꼭지가 달린 부분이 위로 가게 해서 나는 껍질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는다. 등산로의 돌탑같은 것인데, 겨울이면 내 방은 곳곳에 쌓인 귤탑들로 소란스러워진다.

나는 귤을 씹으며 루살카를 꼭지가 위로 가게 벗기어 포개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동기여서, 루살카가 어떻게 내 블로그에 들어와서 그림이 좋다, 는 댓글을 남기게 되었는지를 추측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 블로그는 복도를 향해 마주하고 있는 폭 삼미터의 정방형의 공간으로, 복도를 향해 이중창이 나있고 먼지가 낀 모기장과 쇠창살이 단단하게 틈을 막고 있다. 나는 창에 검은색 암막을 둘러놨는데 그것은 커튼이 아니고 단순한 천으로, 창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주문한 탓에 창의 삼분의 일은 뚫려 햇빛이 들어온다. 그 틈은 쇠창살 두개분의 틈이어서 사람이 들락거리기에는 가당치 않으나 섬세한 손, 작은 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틈에 손을 넣어 잔뜩 쌓여있는 귤을 한 두개쯤 따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루살카가 어찌하여 물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내 틈의 주황색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반문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면 인물의 동기를 밝히는 것은 귤을 십자로 벗기는 것만큼 규칙적이고 중요한 일이어서 맘대로 하다간 결코 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은 겨울풀, 이라는 게시물에 댓글로 달려 있는데 그것은 가장 최근의 그림이어서 블로그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인다. 내가 그림, 이라는 분류에 올린 게시물은 총 삼십구개다. 왜 그녀는 가장 먼저 보이는 게시물에 댓글을 단 것일까? 댓글은 비밀댓글이어서 관리자만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나에게만 댓글을 남긴 게 분명하다.

이를테면 층간소음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엘레베이터에서 특정호수를 언급하며 주의를 요구하는 벽보를 붙인 경우에, 그 사람은 자신처럼 소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공감을 구하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한 도덕적인 우위를 통해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힘을 행사한다. 그러면 특정인은 자신의 내밀한 행위가 공적인 공간에 까발려졌다는것이 부끄러워서 정중히 사과를 하고 그러면 벽보는 떨어진다. 그런데 특정인에게 직접 가서 얘기를 하거나 경비원을 통해 주의를 주는 경우에는 소란이란 그 둘 사이에만 일어나는 것이어서 힘의 관계는 대등해진다.

루살카는 그림의 감상자로 내 그림에 감상을 표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를 원하는 하나의 인격으로 나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림 좋아요, 라는 문장 자체는 그 자체로는 감탄사에 불과하다. 겨울풀이 좋다는 것인지 다른 삼십구개의 게시물 전부가 좋다는 것인지 그림의 방향성이 좋다는 것인지, 색이나 특정 대상이 좋다는 것인지 아무런 정보도 없다. 그녀는 '루살카가 당신의 블로그를 보고 있다'는 뜻을 감탄사와 같은 문장을 통해 암시한 것이지, 그림은 별로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의 어떤 것을 본 것일까?



섬의 중심을 향해 솟은 탑은 왼쪽으로 삼분의 일만큼 기울어져 흔들리고 있다.



우선 이에 앞서 나는 하나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건 굉장히 중요한 오해이기도 하고 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직접적인 동기이기도 하다.

하일지의 소설 진술의 8장은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Schizoid Personality라고요?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라는 고유명사는 4장 막바지에 나오는 환상과 실제라는 고유명사와 같이 이 소설 전체의 스토리를 암시하는 장치인데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그저 넘어갈지 모르나 나는 그걸 읽는 순간 책 전부를 이해했다. 아이덴티티라는 영화와 같다.

그런데 이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다. 혹은 고의적으로 잘못 사용한 것이다. 스키조이드 퍼스날리티는 번역하면 분열성적 성격장애를 뜻한다. 이와 유사한 단어로는 분열증적 성격장애가 있다. 분열증적 성격장애는 schizophrenic으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우리가 정신병자, 정신분열증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떠올릴 때 해당하는 것이 후자의 분열증적 성격장애이고 진술에서 주인공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병적인 증상이다.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고, 가상과 실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분열성 성격장애는 고독한 방랑자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혼자 지내며 혼자 살아간다. 자신의 세계를 쌓고-이 문장을 쓰며 귤껍질을 벗긴다- 그것에 만족한다.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지는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관계가 무서워서 사람을 피하는 은둔형외톨이들과도 다르다. 그들은 관계의 필요성을 남들만큼 강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과연 용어를 착각해서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글의 후기를 볼때에 혹은 그의 처녀작인 경마장 가는 길을 관통하는 '오해'에 비추어볼 때에 저자는 자신의 분열성-분열증이 아닌-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들어야 하는데-타인에게 나의 논리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탑이 무너질 위험이 있으니 주민들은 하루 빨리...

섬, 빌어먹을 섬의 중심에는 확성기가 있어 아침이면 꽥꽥 소리지르고 사람을 깨운다.



중요한 것은 루살카가 아침 아홉시 오십구분에 내 블로그에 들어와 감탄사를 남기고 떠난 사실이다. 내 방에는 분열성 성격장애라는 이름의 분류가 있다. 여기에 나는 몇개의 귤껍질을 쌓아 놨는데, 환기를 통해 살짝 열어 놓은 틈, 암막에 가리지 않은 그 틈 사이로 아마  선명한 주황색이 비쳤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로 여기는 과일의 껍질은 누군가에게는 과육보다 선명한 빛깔로 느껴진다. 루살카는 지금부터 사년 혹은 오년 전에 내가 동기 두명과 같이 영화를 보던 그 촘촘한 자리, 내 기댄 자리에서 삼분의 일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와 같은 루살카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내가 열어둔 틈 너머로 내가 쌓아둔 귤껍질을 바라보고 있다. 루살카는 밤새 악몽을 꾼 모양인지 눈물자국이 붉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더 열어 그녀를 좀 더 잘 볼 수 있게 혹은 그녀가 나를 좀더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몇마디 지나가는 말을 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잠깐을 응시하다가 그녀는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몇 명의 루살카가 복도를 지나갔다. 그때마다 나는 창문을 조금씩 열었으나 그들은 바쁜 모양이었다. 섬의 주민들은 늘 탑을 쌓느라 바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가끔 틈을 통해 경치나 지나가는 루살카들을 바라볼때가 아니면 탑을 쌓고 있다. 나는 희미한 기억에 의지해 사건에 일련번호를 매기고 사건의 동기를 파헤쳐 순서를 쌓는다. 그러나 사건은 언제나 한발 앞서서 우연을 가장하고 지축을 가르고 탑을 흔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잠에서 깬후에 읽지 않은 쪽지를 바라보며 실망하는 것 뿐이다. 섬, 빌어먹을 섬.



22일 오전 4시31분쯤 전북 익산시 북쪽 팔킬로미터 지역(북위 삼십육점영이, 동경 백이십육점구오)에서 규모 삼과 삼분의 일의 지진이 발생했다.


루살카는 틈사이로 귤껍질을 바라보는데, 껍질이 켜켜이 쌓여 만든 원탑은 왼쪽으로 삼분의 일만큼 기울어져 있다. 간밤의 소란을 피하지 못한 모양이다. 루살카의 손은 작고 섬세하다. 틈 사이로 그녀는 방금 먹은 귤껍질 하나를 탑 위에 포갠다. 간밤의 소란을 중심에 맞게 반듯이 세워 놓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방, 울기 좋은 침대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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