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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3/01 08:34:54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자화자찬(自畫自贊)
<대각국사 의천>



불교 용어로 스님들의 초상화를 부르는 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정상頂相 진真 상像 영影 등등.

진真 상像 영影 은 모두 불교와 무관하게 중국문화권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로 다 그냥 "초상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상만은 본래 불교전통에서 나온 말로 석가모니 부처의 볼록 올라온 정수리를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인 unisa의 번역어입니다. 부처에게서만 보이는 정신/신체적 특이점이 크게 32가지, 작게 80가지라고 해서 32상相 80종호種好 라고하는 데 정상은 그 32상 중 하나입니다. 불상을 가만히 보면 꼭 상투를 튼 것처럼 정수리가 볼록 올라온 경우가 많은데 그거 상투가 아니라 살...(;;)입니다. 여튼 이 용어는 후에 어쩌다보니 선불교 전통에서 초상화를 가리키는 말로 차용되게 되었습니다.

상이나 영이나 진이나 모두 피사체의 진수를 옮겨왔다거나 피사체의 완벽한 모사(그림자처럼)라는 의미에서부터 초상화라는 뜻이 파생되었어요. 말하자면 피사체와 그림간의 일치감, 동일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취급받았다는 거지요. 일종의 리얼리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불교 초상화 최고의 모토가 리얼리즘이었던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게 죽은 승려의 의례(ritual)상의 대용물이었거든요.

원래 승려뿐 아니라 카리스마가 넘치는 종교지도자/성직자가 죽으면 그 유품은 물론이고 그 시신의 전부 혹은 일부분조차 아주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그 카리스마를 되새기게끔 해주는 모든 실제적/상징적 물체들이 그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나누어갖는 셈이지요. 따라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성직자가 죽은 뒤엔 시체가...어... 박살이 납니다 'ㅅ';;

카톨릭 성인들을 미이라로 만드는 건 물론이고 고승의 시신을 태우고난 재에서 사리를 찾는 것도 그 일환이지요. 서양 중세 때는 어떤 여자성인이 죽은 뒤에 젖꼮지도 잘라서 성물화했다고도 해요. 물론 이런 유물(?)들은 망자의 생전의 카리스마의 수준, 사후의 평가에 따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하지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음에따라 모조품이 만들어지는 것 역시 당연지사입니다. 십자군이 비잔틴을 점령했던 이유가 그곳이 죽은 성인의 시신의 일부의 모조품을 만드는 산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에요.

중국의 불교도들도 이런 일들에 종사했습니다. 수행의 수준이 높은 승려의 육신은 무척 깨끗하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믿음이 있었어요. 4-5세기 무렵의 고승들의 행적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인 고승전 高僧傳 을 보면 이런 문화가 잘 나타나있지요. 죽고나서도 안색이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거나 식탁에 앉은채로 입적했는데 몇년 후에 찾아왔는데도 모습이 그대로였다거나 하는 기사들이 꽤 있어요. 그러다보니 약간(?) 인위적인 방법으로 죽은 승려의 육신을 오래 보존하려는 움직임 역시 나타났어요. 바로 미이라로 만드는 거에요. 내장을 제거하고 옻칠을 아주 두껍게 해서 시신을 보존(한다기보단 밀봉) 하는 건데요, 이런 방법으로 제작된 것으로서 가장 유명한 건 역시 7세기의 레전설적인 선사 육조 혜능 六祖慧能의 미이라에요.


물론 진지한 학자라면 그 누구도 이 미이라가 진짜 육조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하지만 어쨌든 수많은 불교도들이 그렇게 믿었고 믿어왔고 믿고있어요.

이런 미이라들은 상례/장례/제례의 중심이 됩니다. 상례 자체가 미이라제작과정이요 장례 이후엔 잘 만들어진 조사당에 미이라를 안치하고 아침/점심/저녁으로 공양을 드리지요. 마치 망자가 살아있기라도 한 양 망자가 하던 역할을 미이라가 그대로 하는 거에요. 의례(ritual)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이라=망자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이런 문화가 변하게 된 건 시대적 요청/기술적 문제 때문이었어요. 일단 이런 미이라제작이... 비싸요... -_-;; 옷칠이란게 결코 싼 것도 쉬운 것도 아니라서 단가도 비쌌을 뿐더러 실패확률도 높았어요. 사실 성공률만 높다면 단가가 높아도 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이게 실패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단 말이지요. 아무리 잘 해봐도 시신이 미이라화하지 않고 썪어버린다거나 하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아예 그냥 화장을 하고 그 뼛가루를 섞은 점토로 소조 塑造를 한다든지 아니면 그냥 대충 점토로 소조를 하고 그 속의 빈공간에 뼛가루를 담은 비단주머니를 넣는다든지 등등의 대안이 등장했어요. 물론 이러한 상들 역시 의례적 관점에서는 망자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지요.

하지만 이런 방법들도 결국 죽은 선사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등장한게 초상화에요. 큰스님이 입적 직전 즈음 되면 화가를 불러서 초상화를 그리게하고 그걸 말하자면 미이라(점토상)의 대용으로 쓰는 거지요. 초상화는 값도 싸고 보관도 편리하고 복제도 쉬워서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점들이 있지요. 물론 미이라가 주는 강렬한 종교적 감흥과 카리스마가 없다는 점은 약점이었어요. 하지만 시대의 변화로 인해 장점과 단점을 놓고 경중을 재보았을 때 장점이 단점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게 송나라 (10세기~11세기) 직전 즈음이었습니다.

송나라의 중국 재통일(980년즈음) 전까지 중국대륙은 각종 군벌들이 점유하고 서로 땅따먹기 하던 삼국지 같은 상황을 한 100년 정도 겪었어요. 이 때 그나마 상황이 양호한 남방, 특히 복건성 언저리로 온갖 선불교 종파들이 몰렸고, 이들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려다보니 너네 스승님도 인정해주고 니네 스승님도 인정해주는 식으로 너좋고 나좋은 통합주의가 발전했어요. 그 전까지는 "A선사의 적법한 후계자는 B선사 뿐이야" "아니야 C야" "아니야 역시 D 아니겠어" 같은 식으로 싸우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부터는 "그냥 A선사의 제자 15명이 모두 다 법통을 이었다고 하지 뭐" 처럼 된 거지요. 자 이제... 모셔야 할(?) 죽은 선사들이 어마어마한 수로 늘어나버렸어요. 이걸 다 미이라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떡하겠어요. 이렇게 된 이상 초상화로 가야지요..!

그런데 송나라 들어서 생긴 국가 정책상의 변화로 인해 승려가 죽기 한참 전에 초상화를 미리 그려 놓는 문화가 생기게 되었어요. 이게 뭔고 하면 조정에서 주요 절들의 주지스님 자리의 임명권을 휘두르게 되면서 마치 오늘날 공립학교 선생님들이 4년 주기로 (맞나요?) 자리를 옮기듯이 주지스님들도 임기가 생긴 거지요. 예전 같았으면 주지스님이 입적할 적에 그림 그려서 걸어놓으면 됐는데 이제는 주지스님이 임기 끝나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에 미리 그림을 그려 놓을 필요가 생긴거지요. 그 주지스님이 어디 멀리 갔다가 돌아가시면 그 때 가서 그 돌아가신 곳까지 사람을 파견해서 그림을 얻어오고 하려면 너무 번거롭지 않았겠어요?

이렇게 초상화를 미리 그려놓게 되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가 이젠 초상화를 하나가 아닌 여러 장을, 수십 수백장을 그려도 상관 없게 된거지요. 상/장/제례에 묶여있던 초상화 문화가 해당 예식으로부터 약간 벗어나게 되면서 생긴 변화에요. 헌데 이렇게 초상화를 수백장씩 그리면 각각의 초상화의 가치는 당연히 떨어지겠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가 소장한 초상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초상화의 주인공 본인에게 가서 싸인을 받는 거였어요. 내가 소장한 어떤 선사의 초상화가 아무리 세상에 흔하다 하더라도 친필싸인만 붙어있다면 바로 특급 레어템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당시 관행으로 초상화에 붙이는 글귀를 찬讚이라고 불렀어요. 찬은 일종의 한문학 쟝르인데, 옛사람의 초상화의 한 구석에다 주인공의 덕성/업적 등을 찬양하는 내용의 싯구를 써넣는 걸 말해요. 오늘날 칭찬 稱讚 찬송 讚頌 찬양 讚揚 할 때의 찬讚 이 바로 이거에요. 이 글의 첫 번째 사진의 좌상단을 보시면 뭔가 글이 깨작깨작 적혀있지요? 그게 찬이에요. 

다른 사람의 초상화에 찬을 써 줄 때는 별 문제가 없어요. 그냥 찬양하는 문구를 잘 맞추어서 시를 쓰면 되니까요. 그런데 자기 초상화에 찬을 쓰는 건 약간 문제가 되지요. 자기 자신을 찬양해야하잖아요. 얼마나 멋적겠어요. 그래서 선사들은 기존의 쟝르를 비틀어서 자찬自讚 이라는 새로운 쟝르를 만들어냈어요. 예컨대 이런 식이에요.

입은 거지놈 부댓자루가 벌어진 것 같고
코는 뜰 앞의 똥 닦는 막대기 같네
화가께서 혼신의 힘으로 그려냈으니
세상사람들 맘대로 헤아려보시게

似乞兒席袋。鼻似園頭屎杓。勞君神筆寫成。
一任天下卜度

양기 방회 (楊岐方會, 992∼1049) 선사의 자찬이에요. 재밌지요? ㅎㅎ

이런 식의 자찬이 송나라 들어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요. 돈있고 빽있는 사람들은 너나 나나 유명한 스님, 혹은 사후에 더 유명해질 게 분명한 스님을 찾아가서 화가를 시켜 그 스님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그 초상화에 자찬을 받아가곤 했어요. 절 안의 주요 보직 인사들 역시 주지스님의 초상화 + 자찬을 받아 소장하는 걸 영광으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구요. 또 일부의 경우는 초상화 + 자찬을 물려주는 걸 법통을 물려주는 것처럼 간주하기도 했어요. 남송 대의 어떤 유명한 선사의 경우는 현재 문집에 남아있는 자찬의 수가 수백편에 달하기도 해요.

하지만 이렇게 자찬 쟝르가 성행하는 와중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림 자체는 자기가 직접 그리거나 누굴 직접 시켜서 그리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초상화가 미이라에서 유래했다는 걸 명심해야 해요. 이건 장례용품이에요. 자기가 직접 그려서 뿌리면 안되는 거였지요. 또 이건 언제까지나 자신의 덕/수행/위엄을 사모한 다른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려 가져와서 싸인을 부탁해야만 하는 거에요.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괜히 자기 자신의 덕/수행/위엄을 고평가(?) 해서 미리 초상화를 직접 그리고 찬을 달고 하면 비웃음거리가 되기 딱 좋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혹 후에 유명해지시거든 자찬 自讚은 해도 자화 自畫는 하지 마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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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있네요! 앞으로 자화자찬이라는 단어 쓸 때마다 이 글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 재미지다~~~ 추천드려요
  • 와하 넘 재밌어요!
  • 오오 추천 오오
  • 잘 봤습니다. 앞으로 자화자찬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이 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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