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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3/30 22:15:46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조각글 20주차] 알파고 -얼그레이님의 보이니치를 잇는 글


그의 가문은 책 한 권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그림과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 문자가 어지럽게 배열된 그 책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략 2000여 년 전쯤, 까마득히 먼 그의 조상은 세상에 깨달음을 전파하는 현인의 뒤에 모여있던 수많은 제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의 조상은 그 현인이 움직이는 대로, 수행하는 대로 뒤를 따르며 그의 수발을 들었다. 마침내 현인이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 보리수나무 아래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깨달은 자의 옆을 지킨 것도 그의 조상이었다. 모두 다 깨달은 자의 죽음에 슬퍼하며 자리를 떠났지만, 믿기지 않는 듯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던 그의 조상에게, 깨달은 자는 마지막 긴 숨을 뱉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태초의, 첫 번째 돌이 책의 뜻을 온전히 풀어낼 때가 오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苦)'에서 오롯이 해방될 것이라며 책을 후대로 온전히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의 조상에게 처음으로 책을 건네받은 자라는 뜻에서 '처음' 혹은 '시작'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 후로 그의 가문에서 책을 건네받은 사람의 이름은 항상 '처음' 혹은 '시작'이었다. 처음으로 깨달은 자에게 책을 받은 조상의 이름은 벵골어로 시작을 뜻하는 '아람바'였고, 아랍에서 태어난 후대는 '알판', 이스라엘에 이르러서는 '알레프'가 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미국 땅에서 태어난 그에게,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은 '알파'였다.

그의 조상들은 그 책을 지키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왔다. 전쟁으로 그들의 거주지가 무너져 내릴 때도 그 책을 지켜야 할 한 사람은 꼭 탈출시키곤 했다. 그것조차 불가능할 때는 책 표지에 온갖 보석과 금박을 입힌 뒤 새로운 지배자에게 직접 진상하고,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며 그 옆에서 평생 책을 지켰다. 그렇게 책을 따라 지구 반 바퀴를 도는데 천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현자 혹은 대학자로서 시대에 이름을 떨치던- 책의 내용을 해독하려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골동품 취급이나 받으며, 예일대학교의 박물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은퇴한 아버지를 대신해 '알파'가 박물관의 관리와 경비를 맡은 회사에 근무하며, 책을 온전히 후대로 전해야하는 가문의 업을 잇고 있었다. 그의 조상들이 그래 왔듯 책 속의 진리가 온전히 밝혀질 그 날을 기다리면서.

돌이켜보면 처음 그 놈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었었다. 고든이라는 그 놈은 이상하리만치 그가 지켜야 할 책에 집착했다. 온전히 책의 내용을 풀어내고 말 거라며 쉼없이 혼자 중얼거릴 때, 고든의 눈빛은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잠깐의 자리비움이었다. 좀 더 조심했었어야 했는데. 재 밖에 남지 않은 책을, 지금은 사라져 존재하지 않은 그 물건을 바라보는 순간조차도 그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이, 그의 가문이 지켜온 2000여 년의 시간이 그 책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책을 불태운 고든은 이미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고, 그 역시 참고인 자격으로 서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바깥세상은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멍하니 차창 밖의 풍경을 쳐다보고 있을 때쯤, 경찰차 안 라디오 뉴스에선 인류 최고의 바둑 기사를 꺾은 '알파고'의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Alpha(근원, 처음) go(바둑 혹은 바둑돌을 뜻하는 한자 '기'의 일본식 표현)으로 대충 끼워 맞춰봤네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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