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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5/11 23:38:04 |
Name | 리틀미 |
Subject | 곡성 해설 (강스포) |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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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넘는 기간동안 후속 편집 작업에 매달렸다는 작품이라고 하기엔 편집이 좀 잘못된게 아닌가 싶은 영화입니다. 일단 러닝타임이 156분까지 갈 필요는 없겠다 싶거든요. 본 게임이 시작되기전의 전초전 느낌의 전반부가 특히 그렇구요. 살인의 추억 느낌을 어설프게 집어넣은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메인 매치가 시작되는 황정민 등장 이후도 편집이 매끄럽냐고 하면 그게 아닌게,
예를들어 삼공파일님이 언급하신 부분인 [이걸 나홍진, 곽도원, 천우희, 황정민이라는 생각에 자꾸 리얼리즘 스릴러라고 믿고 봐서 망한 것 같습니다.]같은 것도 느낌도 편집때문일 가능성이 크구요. 괜히 관객보고 추리를 해보라고 간보는거 같죠.
그렇다고 메인 매치가 시작되는 황정민 등장 이후도 편집이 매끄럽냐고 하면 그게 아닌게,
예를들어 삼공파일님이 언급하신 부분인 [이걸 나홍진, 곽도원, 천우희, 황정민이라는 생각에 자꾸 리얼리즘 스릴러라고 믿고 봐서 망한 것 같습니다.]같은 것도 느낌도 편집때문일 가능성이 크구요. 괜히 관객보고 추리를 해보라고 간보는거 같죠.
http://blog.naver.com/hunthink/220706843525
이 글이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글이 아닌가 싶구요.
그런데 참 오묘한건, 무명이 실패를 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천우희가 절망에 빠진 표정같은걸 지으면서 벽에 기대서 쓰러져있는 장면이죠. 귀신 잡는 덫을 쳐놨다고 계속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곽도원이 천우희의 손을 뿌리치고 떠날때 울부짖는 듯한 씬을 넣은것도 그렇구요. 이런거보면 감... 더 보기
이 글이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글이 아닌가 싶구요.
그런데 참 오묘한건, 무명이 실패를 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천우희가 절망에 빠진 표정같은걸 지으면서 벽에 기대서 쓰러져있는 장면이죠. 귀신 잡는 덫을 쳐놨다고 계속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곽도원이 천우희의 손을 뿌리치고 떠날때 울부짖는 듯한 씬을 넣은것도 그렇구요. 이런거보면 감... 더 보기
http://blog.naver.com/hunthink/220706843525
이 글이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글이 아닌가 싶구요.
그런데 참 오묘한건, 무명이 실패를 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천우희가 절망에 빠진 표정같은걸 지으면서 벽에 기대서 쓰러져있는 장면이죠. 귀신 잡는 덫을 쳐놨다고 계속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곽도원이 천우희의 손을 뿌리치고 떠날때 울부짖는 듯한 씬을 넣은것도 그렇구요. 이런거보면 감독은 신이 이 재앙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의도한게 아닌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또 천우희와 곽도원이 처음 만나는 씬에서 굿을해서 다죽었어란 말을하고, 굿판을 벌인 곳에선 모두 처참한 현장만이 남았던걸로 봐선 굿이란 행위 자체가 악마의 행위라고 규정하는 거일수도 있겠네요.
이 글이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글이 아닌가 싶구요.
그런데 참 오묘한건, 무명이 실패를 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천우희가 절망에 빠진 표정같은걸 지으면서 벽에 기대서 쓰러져있는 장면이죠. 귀신 잡는 덫을 쳐놨다고 계속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곽도원이 천우희의 손을 뿌리치고 떠날때 울부짖는 듯한 씬을 넣은것도 그렇구요. 이런거보면 감독은 신이 이 재앙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의도한게 아닌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또 천우희와 곽도원이 처음 만나는 씬에서 굿을해서 다죽었어란 말을하고, 굿판을 벌인 곳에선 모두 처참한 현장만이 남았던걸로 봐선 굿이란 행위 자체가 악마의 행위라고 규정하는 거일수도 있겠네요.
천우희가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고 대리인이라고 해야할까요? 천우희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자고 감정을 가진 존재라고 봐야죠.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나 곽도원이 가지 않았어도 재앙은 계속 됐을거라고 감독이 직접 말했더군요.
배우들은 뭔가 다층적 해석이 가능하거나 모호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장르적 캐릭터를 확실히 소화한 것 같아요. 당연하겠지만요. 그러니까 행동이 어떤 인간적이고 감정적 동기에 의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한 거죠. 천우희, 황정민의 감정선을 깊게 따라가서 이해하려고 하면 개연성에 조금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가령 말해주려면 처음부터 말해주던가...)
굿판은 이단으로 영화 내내 악마의 의식으로 사용된 걸로 보입니다.
배우들은 뭔가 다층적 해석이 가능하거나 모호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장르적 캐릭터를 확실히 소화한 것 같아요. 당연하겠지만요. 그러니까 행동이 어떤 인간적이고 감정적 동기에 의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한 거죠. 천우희, 황정민의 감정선을 깊게 따라가서 이해하려고 하면 개연성에 조금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가령 말해주려면 처음부터 말해주던가...)
굿판은 이단으로 영화 내내 악마의 의식으로 사용된 걸로 보입니다.
해석에 여러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1. 이 영화의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들을 과연 성聖과 악으로 명백히 나누는 기독교적 이분법을 과연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도 GV에서 물어봤습니다. 마지막에 쿠니무라 준이 \"악마\"의 형상을 띄는데, 이 악마의 형상은 그를 찾아온 인간이 \"이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찾아온 인간이 종구나 다른 인간이었어도 기독교에서 그리는 악마의 형상을 띄었을 것인가, 하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마지막에 시각화된 악의 모습이 그 악... 더 보기
1. 이 영화의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들을 과연 성聖과 악으로 명백히 나누는 기독교적 이분법을 과연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도 GV에서 물어봤습니다. 마지막에 쿠니무라 준이 \"악마\"의 형상을 띄는데, 이 악마의 형상은 그를 찾아온 인간이 \"이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찾아온 인간이 종구나 다른 인간이었어도 기독교에서 그리는 악마의 형상을 띄었을 것인가, 하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마지막에 시각화된 악의 모습이 그 악... 더 보기
해석에 여러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1. 이 영화의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들을 과연 성聖과 악으로 명백히 나누는 기독교적 이분법을 과연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도 GV에서 물어봤습니다. 마지막에 쿠니무라 준이 \"악마\"의 형상을 띄는데, 이 악마의 형상은 그를 찾아온 인간이 \"이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찾아온 인간이 종구나 다른 인간이었어도 기독교에서 그리는 악마의 형상을 띄었을 것인가, 하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마지막에 시각화된 악의 모습이 그 악의 실체가 아니라 믿음에 따라 악을 투사하는 \"보는 이\"의 관점에 대한 의문일 겁니다. 리틀미님의 해석을 따라가면 이 영화가 그리는 \"인간의 의심과 믿음\"의 주제가 휘발되지 않냐는 것이죠. 쿠니무라 준(외지인으로 지칭) 역시도 말합니다. 내가 누구라고 한들, 너가 그 말을 믿겠냐고. 심지어 이 대사를 종구와 이삼에게 각각 말하며 두번 강조합니다. 이것이 악마로서의 자신의 정체와 인간의 나약한 회의에 대한 조롱 섞인 질문일수도 있겠지만, 이해 불가의 존재를 완성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아닌, 거기에 불안과 절망을 투영하는 인간의 조력이 더 본질일 수도 있다고 하는 거죠.
신과 악마가 정해져있다면 외지인에게 신성과 마성의 흔적을 모두 부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선악의 모호함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되지요. 그리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샤머니즘과 토속 신앙에 대한 해석 역시도 가로막히게 됩니다. 토속신앙은 땅,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이들이 만들어낸 공간적 개념인데 이를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해석할 수 없게 됩니다. 악마라고 해석되는 이는 \"외지인\"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국적에서도 다른 이들과 확연히 구분되고, 곡성 내의 거주지도 산 속 깊은 곳입니다. 종구는 그를 찾아가서 \"떠나라\"라고 경고합니다. 불길한 일이 있으면 이사를 가면 되는데도 종구를 비롯한 곡성의 사람들은 그 곳을 떠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해요. (곡성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속세라는 소우주를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거기다가 이 영화의 성과 악이 부딪히는 방식은 모두 샤머니즘으로 표현이 되지요.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표현만 샤머니즘을 빌려왔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2. 이건 오컬트 장르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컬트 장르는 기독교 가치관 아래에서 인간과 악이 싸우는 식으로 구도를 그립니다. 신의 존재는 희미합니다. 악은 뚜렷하죠. 현상으로서 그 실체가 있습니다. 악이 있고 신은 잘 모르겠는 상황에서 오로지 믿음을 도구로 그에 맞서야 하는 것이 오컬트의 최대 딜레마고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제나 신의 대리인들은 무기력한 속성을 띌 수 밖에 없다고 보는데... 원래 오컬트 장르에서 인간은 신과 소통하지 못하는 게 정석 아니던가요. 인간은 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으로서밖에 남지 못한 상황에서 악과 대립하니까요. <엑소시스트>에서도 최후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악과 동반자살하는 것을 보면 사제, 신의 대리인이 신과 접촉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설정 같습니다.
리틀미님의 말씀대로 천우희의 무명을 \"신\"으로 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인간\"이 \"신\"과 직접 닿기 때문에 더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더더욱 기독교적 오컬트의 관점에서 벗어나 한국의 토속신앙으로 보는 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3. 무명의 해석은 이 영화를 오컬트 장르로 규정한 리틀미님의 전제와 더욱 더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무명이 신인지 뭔지를 떠나 종구의 조력자로서 \"악\",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현상에 저항합니다. 그런데 이 존재와 이 존재가 속한 기독교적 진영 논리에 따라 전지전능의 존재가 모든 것을 상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거죠. 이는 해석 그 자체로서도 너무나 무자비하고 이 영화가 설명하려는 부조리에 대해서도 존재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규정하려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무명은 일광을 막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주체의 의지가 분명하죠. 그가 얼마만큼 힘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그는 일광과 일광의 편인 외지인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명과 종구의 조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명은 종구가 의심을 품을 때부터 피부톤이 변합니다. 떠나려는 종구를 잡은 무명의 촉감에 깜짝 놀라죠. 그리고 종구가 떠나버리자 무명은 주저앉습니다. 이를 \"모든 것을 알지만\" 하는 행동으로 놓고 보면 굉장히 자기기만적인 연출이죠. 종구가 떠날 것을 아는데 신이 그렇게 부여잡고 애절하게 말린다?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치면 무명이 일광을 굳이 막고 피 섞인 토를 쏟게 하면서 일광을 쫓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시간적 텀도 크지 않습니다. 이를 \"구원의 기회\"라고 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이 부분을 굳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저는 자유의지와 인간의 나약함이 인과를 만든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정해놓고 인간을 이리저리 굴린다고 보기에는 무명의 인간적인 묘사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부조리에 대해 초월적 존재의 고의성을 전제해놓고 묻는 질문이라 너무 공격적인 것 같기도 하구요. 이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을 안배하고 다스리는 저 위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면 영화 속 부조리는 그 존재의 악취미로 변질되어버립니다. 베드로와 예수의 이야기는 그 뒤에 \"부활\"이라는 초대형 이벤트, 인간의 나약함이 결코 어지럽힐 수 없는 절대적 신성이 뒤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전지전능의 표출이지만 이를 그대로 <곡성>의 무명과 종구에게 대입하면 전지전능하나 사악한 절대적 존재로 귀결이 되고 마는 걸요. 오히려 전지하지만 무능한, 혹은 한계가 있는 초월적 존재들끼리 인간을 두고 시험을 벌이는 토속신앙의 이야기로 보는 게 영화 속 연출을 더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4. 제가 가장 의아한 부분은 일광과 외지인의 굿이 교차편집되는 장면입니다. 영화는 결국 영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집이 불타고 있고 모든 사람이 발만 동동 구르는데 어떤 사람이 그걸 보면서 씨익 웃는 걸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고 치죠. 그러면 이건 누가 봐도 그 남자가 방화범이다 - 라는 문장을 영상으로 말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중에 \"이 남자가 사실 그 때 엄청 웃긴 유머가 생각이 났을 뿐이다\" 라거나 \" 방화범을 목격했고 그를 신고해서 잡을 포상금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라는 후술을 한다면 이건 기만인거죠. 그 어떤 다른 텍스트나 영상을 부연한다 해도 처음 보여주는 영상은 하나의 설득으로 기능합니다. 이 남자가 방화범이다 - 라는 문장처럼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남자가 방화범이다, 만약 진범이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미소를 봤다면 그렇게 오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라는 문장을 첨언한다고 해서 하나의 사실이 반전으로 온전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중의성을 띄는 것과, 사실관계를 뒤집는 연출은 다릅니다. 저는 일광의 굿판 장면이 이런 식의 트릭으로 관객을 기만하는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밖에 없는 장면을 보이고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라고 뒤집는 이야기가 좀 치사하다는 거에요. 일광의 훈도시나 사진을 쓸어담는 장면의 설득력이 굿판에서의 교차편집이 보여주는 설득력을 온전히 회수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일광과 외지인의 깊은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일만한 설정도 전혀 나오지 않지요. 이는 오로지 플롯 상에서 \"사실은 그랬다\"는 것을 위한 증거자료이지 그것이 이야기 조각으로 전체 서사에 온전히 포함되지는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현실적으로 일광이 굳이 장독을 깨서 까마귀를 보여주고, 살을 날린다 어쩐다 하면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지요. 이 부분은 오로지 관객을 속이기 위한 느낌이 강한, 일종의 기능적 시퀀스로 보인다는 거죠. 일광이 혼자 쌩쑈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5. 저는 나홍진 감독이 절대신성에 대한 회의를 인간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리틀미님의 해석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신성모독, 그리고 신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가족이고 인생이고 다 박살난 인간을 통해 신성을 \"공격\"하려하는 걸까요? 저는 여기서 기독교적 관점, 그러니까 \"신은 존재한다\" 라는 것을 나홍진 감독이 가정했다고 보고 리틀미님이 그리 해석했다 생각합니다. 저는 나홍진 감독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신이 있다면\" 이런 일들은 대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지 신성과 마성의 혼재를 통한 존재를 통해 사실 그 모든 게 신의 뜻이기도 하다, 라는 이중성의 고발이라고까지는 보기 어렵다는 거죠.
이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삼은 (이 이름에 대해서도 자꾸 곱씹게 되는데 1, 즉 모든 것의 시작인 숫자가 빠진 존재라는 뜻에서 불완전함을 가리키는 텍스트가 아닐련지요) 박춘배 좀비에게 볼을 물어 뜯깁니다. 그 전까지는 박춘배 좀비를 봤을 때도 사람한테 왜 몽둥이를 휘두르냐고 일행을 막아섰죠. 그리고 볼따구가 뜯긴채로 돌아와 교회에서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상을 본 후 낫을 들고 외지인에게 향합니다. 신을 믿는 자가 분노한 이후 악을 처단하러 간 거죠. 여기서 그 분노란 순수하게 악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가 폭력이라는 부조리로, 즉 악의 수단으로 악을 제거하러 갈 리가 없으니까요. 신에 대한 회의 역시 크게 작용해서 (종구의 동료이자 삼촌인 경찰관이 괴이쩍은 현상에 휘말렸기 떄문에) 외지인에게 악을 투영하면서도 신을 투영하는 거죠. 한마디로 이것은 신과 악의 존재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 절망한 인간의 분노가 신과 악 모두를 향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외지인이 사실 예수고 하나님의 대리인인데 재앙을 일으키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외지인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데 거기에 신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투영되기 때문에 \"성흔\" 역시도 이삼의 그런 마음을 형상화한다는 거죠.
6. 저는 일본인의 정체가 무엇인가 - 에 대한 질문을 빠트릴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이동진 평론가도 질문을 던진 것 같습니다. 왜 내내 현실적인 톤을 취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만 그렇게 신화적으로 돌변하는가, 하는 질문을 했지요. 이 부분에서 텍스트에 대한 고민이 충분했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현상을 증거로 리얼리즘을 설득하던 이야기가 이 부분에서는 허구를 명백하게 들이밀기 때문에 좀 이질적이라고 느꼈고 이 균열이 여러 해석이 갈릴 수 있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억지로 좁혀버리는 것 같다고도 느꼈습니다. 그가 누구이며, 왜 이런 일을 하는가, 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이 영화를 더 깊이 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1. 이 영화의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들을 과연 성聖과 악으로 명백히 나누는 기독교적 이분법을 과연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도 GV에서 물어봤습니다. 마지막에 쿠니무라 준이 \"악마\"의 형상을 띄는데, 이 악마의 형상은 그를 찾아온 인간이 \"이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냐, 만약 찾아온 인간이 종구나 다른 인간이었어도 기독교에서 그리는 악마의 형상을 띄었을 것인가, 하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는 마지막에 시각화된 악의 모습이 그 악의 실체가 아니라 믿음에 따라 악을 투사하는 \"보는 이\"의 관점에 대한 의문일 겁니다. 리틀미님의 해석을 따라가면 이 영화가 그리는 \"인간의 의심과 믿음\"의 주제가 휘발되지 않냐는 것이죠. 쿠니무라 준(외지인으로 지칭) 역시도 말합니다. 내가 누구라고 한들, 너가 그 말을 믿겠냐고. 심지어 이 대사를 종구와 이삼에게 각각 말하며 두번 강조합니다. 이것이 악마로서의 자신의 정체와 인간의 나약한 회의에 대한 조롱 섞인 질문일수도 있겠지만, 이해 불가의 존재를 완성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아닌, 거기에 불안과 절망을 투영하는 인간의 조력이 더 본질일 수도 있다고 하는 거죠.
신과 악마가 정해져있다면 외지인에게 신성과 마성의 흔적을 모두 부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선악의 모호함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되지요. 그리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샤머니즘과 토속 신앙에 대한 해석 역시도 가로막히게 됩니다. 토속신앙은 땅,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이들이 만들어낸 공간적 개념인데 이를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해석할 수 없게 됩니다. 악마라고 해석되는 이는 \"외지인\"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국적에서도 다른 이들과 확연히 구분되고, 곡성 내의 거주지도 산 속 깊은 곳입니다. 종구는 그를 찾아가서 \"떠나라\"라고 경고합니다. 불길한 일이 있으면 이사를 가면 되는데도 종구를 비롯한 곡성의 사람들은 그 곳을 떠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해요. (곡성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속세라는 소우주를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거기다가 이 영화의 성과 악이 부딪히는 방식은 모두 샤머니즘으로 표현이 되지요.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표현만 샤머니즘을 빌려왔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2. 이건 오컬트 장르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컬트 장르는 기독교 가치관 아래에서 인간과 악이 싸우는 식으로 구도를 그립니다. 신의 존재는 희미합니다. 악은 뚜렷하죠. 현상으로서 그 실체가 있습니다. 악이 있고 신은 잘 모르겠는 상황에서 오로지 믿음을 도구로 그에 맞서야 하는 것이 오컬트의 최대 딜레마고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제나 신의 대리인들은 무기력한 속성을 띌 수 밖에 없다고 보는데... 원래 오컬트 장르에서 인간은 신과 소통하지 못하는 게 정석 아니던가요. 인간은 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으로서밖에 남지 못한 상황에서 악과 대립하니까요. <엑소시스트>에서도 최후에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악과 동반자살하는 것을 보면 사제, 신의 대리인이 신과 접촉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설정 같습니다.
리틀미님의 말씀대로 천우희의 무명을 \"신\"으로 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인간\"이 \"신\"과 직접 닿기 때문에 더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더더욱 기독교적 오컬트의 관점에서 벗어나 한국의 토속신앙으로 보는 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3. 무명의 해석은 이 영화를 오컬트 장르로 규정한 리틀미님의 전제와 더욱 더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무명이 신인지 뭔지를 떠나 종구의 조력자로서 \"악\",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현상에 저항합니다. 그런데 이 존재와 이 존재가 속한 기독교적 진영 논리에 따라 전지전능의 존재가 모든 것을 상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거죠. 이는 해석 그 자체로서도 너무나 무자비하고 이 영화가 설명하려는 부조리에 대해서도 존재를 선악의 이분법으로 규정하려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무명은 일광을 막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주체의 의지가 분명하죠. 그가 얼마만큼 힘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그는 일광과 일광의 편인 외지인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무명과 종구의 조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명은 종구가 의심을 품을 때부터 피부톤이 변합니다. 떠나려는 종구를 잡은 무명의 촉감에 깜짝 놀라죠. 그리고 종구가 떠나버리자 무명은 주저앉습니다. 이를 \"모든 것을 알지만\" 하는 행동으로 놓고 보면 굉장히 자기기만적인 연출이죠. 종구가 떠날 것을 아는데 신이 그렇게 부여잡고 애절하게 말린다?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치면 무명이 일광을 굳이 막고 피 섞인 토를 쏟게 하면서 일광을 쫓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시간적 텀도 크지 않습니다. 이를 \"구원의 기회\"라고 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이 부분을 굳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저는 자유의지와 인간의 나약함이 인과를 만든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정해놓고 인간을 이리저리 굴린다고 보기에는 무명의 인간적인 묘사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부조리에 대해 초월적 존재의 고의성을 전제해놓고 묻는 질문이라 너무 공격적인 것 같기도 하구요. 이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을 안배하고 다스리는 저 위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면 영화 속 부조리는 그 존재의 악취미로 변질되어버립니다. 베드로와 예수의 이야기는 그 뒤에 \"부활\"이라는 초대형 이벤트, 인간의 나약함이 결코 어지럽힐 수 없는 절대적 신성이 뒤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전지전능의 표출이지만 이를 그대로 <곡성>의 무명과 종구에게 대입하면 전지전능하나 사악한 절대적 존재로 귀결이 되고 마는 걸요. 오히려 전지하지만 무능한, 혹은 한계가 있는 초월적 존재들끼리 인간을 두고 시험을 벌이는 토속신앙의 이야기로 보는 게 영화 속 연출을 더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4. 제가 가장 의아한 부분은 일광과 외지인의 굿이 교차편집되는 장면입니다. 영화는 결국 영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집이 불타고 있고 모든 사람이 발만 동동 구르는데 어떤 사람이 그걸 보면서 씨익 웃는 걸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고 치죠. 그러면 이건 누가 봐도 그 남자가 방화범이다 - 라는 문장을 영상으로 말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중에 \"이 남자가 사실 그 때 엄청 웃긴 유머가 생각이 났을 뿐이다\" 라거나 \" 방화범을 목격했고 그를 신고해서 잡을 포상금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라는 후술을 한다면 이건 기만인거죠. 그 어떤 다른 텍스트나 영상을 부연한다 해도 처음 보여주는 영상은 하나의 설득으로 기능합니다. 이 남자가 방화범이다 - 라는 문장처럼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남자가 방화범이다, 만약 진범이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미소를 봤다면 그렇게 오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라는 문장을 첨언한다고 해서 하나의 사실이 반전으로 온전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중의성을 띄는 것과, 사실관계를 뒤집는 연출은 다릅니다. 저는 일광의 굿판 장면이 이런 식의 트릭으로 관객을 기만하는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밖에 없는 장면을 보이고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라고 뒤집는 이야기가 좀 치사하다는 거에요. 일광의 훈도시나 사진을 쓸어담는 장면의 설득력이 굿판에서의 교차편집이 보여주는 설득력을 온전히 회수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일광과 외지인의 깊은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일만한 설정도 전혀 나오지 않지요. 이는 오로지 플롯 상에서 \"사실은 그랬다\"는 것을 위한 증거자료이지 그것이 이야기 조각으로 전체 서사에 온전히 포함되지는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현실적으로 일광이 굳이 장독을 깨서 까마귀를 보여주고, 살을 날린다 어쩐다 하면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지요. 이 부분은 오로지 관객을 속이기 위한 느낌이 강한, 일종의 기능적 시퀀스로 보인다는 거죠. 일광이 혼자 쌩쑈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5. 저는 나홍진 감독이 절대신성에 대한 회의를 인간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리틀미님의 해석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신성모독, 그리고 신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가족이고 인생이고 다 박살난 인간을 통해 신성을 \"공격\"하려하는 걸까요? 저는 여기서 기독교적 관점, 그러니까 \"신은 존재한다\" 라는 것을 나홍진 감독이 가정했다고 보고 리틀미님이 그리 해석했다 생각합니다. 저는 나홍진 감독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신이 있다면\" 이런 일들은 대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지 신성과 마성의 혼재를 통한 존재를 통해 사실 그 모든 게 신의 뜻이기도 하다, 라는 이중성의 고발이라고까지는 보기 어렵다는 거죠.
이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삼은 (이 이름에 대해서도 자꾸 곱씹게 되는데 1, 즉 모든 것의 시작인 숫자가 빠진 존재라는 뜻에서 불완전함을 가리키는 텍스트가 아닐련지요) 박춘배 좀비에게 볼을 물어 뜯깁니다. 그 전까지는 박춘배 좀비를 봤을 때도 사람한테 왜 몽둥이를 휘두르냐고 일행을 막아섰죠. 그리고 볼따구가 뜯긴채로 돌아와 교회에서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상을 본 후 낫을 들고 외지인에게 향합니다. 신을 믿는 자가 분노한 이후 악을 처단하러 간 거죠. 여기서 그 분노란 순수하게 악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가 폭력이라는 부조리로, 즉 악의 수단으로 악을 제거하러 갈 리가 없으니까요. 신에 대한 회의 역시 크게 작용해서 (종구의 동료이자 삼촌인 경찰관이 괴이쩍은 현상에 휘말렸기 떄문에) 외지인에게 악을 투영하면서도 신을 투영하는 거죠. 한마디로 이것은 신과 악의 존재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 절망한 인간의 분노가 신과 악 모두를 향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외지인이 사실 예수고 하나님의 대리인인데 재앙을 일으키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외지인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데 거기에 신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투영되기 때문에 \"성흔\" 역시도 이삼의 그런 마음을 형상화한다는 거죠.
6. 저는 일본인의 정체가 무엇인가 - 에 대한 질문을 빠트릴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이동진 평론가도 질문을 던진 것 같습니다. 왜 내내 현실적인 톤을 취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만 그렇게 신화적으로 돌변하는가, 하는 질문을 했지요. 이 부분에서 텍스트에 대한 고민이 충분했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현상을 증거로 리얼리즘을 설득하던 이야기가 이 부분에서는 허구를 명백하게 들이밀기 때문에 좀 이질적이라고 느꼈고 이 균열이 여러 해석이 갈릴 수 있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억지로 좁혀버리는 것 같다고도 느꼈습니다. 그가 누구이며, 왜 이런 일을 하는가, 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이 영화를 더 깊이 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일광이 외지인과 처음부터 한통속인 이상, 애초에 그를 원흉으로 지목하여 위장 살굿을 벌일 이유조차 없죠. 그냥 얼렁뚱땅 그럴 듯한 이유 갖다 붙이든가 아니면 대놓고 무명을 원흉으로 지목한다든가 해서 어떤 명분으로든 종구가 헛짚게 유도하여 굿판 벌여서 효진이를 저주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것인데 쓸데없이 외지인을 지목하는 바람에 늙은 쿠니무라 준이 고생스럽게 도망자 액션 찍게 만들고...
이 영화의 본질은 오프닝에서 다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나홍진이 관객들을 낚은 거죠. 모든 장면들이 반전 장난질을 위한 장치들로 꽉꽉 채워져 있지요. 결국 관객 뒤통수 때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알맹이가 없지요.
이 영화의 본질은 오프닝에서 다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나홍진이 관객들을 낚은 거죠. 모든 장면들이 반전 장난질을 위한 장치들로 꽉꽉 채워져 있지요. 결국 관객 뒤통수 때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알맹이가 없지요.
이거... 또 시빌워 욕하려는 건 아니고요 ㅋㅋ 명백한 장르 영화에 너무 개연성을 따지면 시시비비가 이상한 데로 흐르는 것 같아서 그게 안 좋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그 전부터 ㅠㅠ) 황정민도 그냥 이 영화에서 오컬트의 악마의 하수인 같은건데 왜 그렇게 디테일하게 행동했냐고 따지고 골머리 싸는 것 자체가 괜한 짓이라는 거죠. 이걸 정말 뭔가 신에 대비되는 악마성이라고 해석하면서 황정민의 행동을 쫓아가면 불필요하게 종교 논쟁 같은 게 생기는 건 정해진 수준 같아요. 솔직히 굿판씬은 인정하고 굿판씬을 찍으려고 황정민이 열심히 굿을 했다고 받아들이고 한국형 오컬트에서 굿판씩 그렇게 잘 찍었다니 칭찬해줍시다로 넘어가요 ㅋㅋ 저도 정말 이해가 안됐는데 GV에서 나홍진이 얘기하는 거 보고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이건 영화평론가들이 장르 영화라는 것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 그리고 장르 영화에 대중성을 얼마나 녹여내는지를 기준으로 영화의 작품성을 판단하는 약간 이중적인 잣대 때문에 이렇게 극호평이 나왔다고 봐요.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 데리고 오컬트 영화를 완성도 있게 찍은건데 얼마나 신나겠어요. 검은사제들 같은 경우에는 시작부터 오컬트 형식을 빌려온 대중 영화라고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평단에 자극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고요.
장르 영화 계급장 떼고 붙으면 곡성을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죠. 그 영화들... 더 보기
장르 영화 계급장 떼고 붙으면 곡성을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죠. 그 영화들... 더 보기
이건 영화평론가들이 장르 영화라는 것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 그리고 장르 영화에 대중성을 얼마나 녹여내는지를 기준으로 영화의 작품성을 판단하는 약간 이중적인 잣대 때문에 이렇게 극호평이 나왔다고 봐요.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 데리고 오컬트 영화를 완성도 있게 찍은건데 얼마나 신나겠어요. 검은사제들 같은 경우에는 시작부터 오컬트 형식을 빌려온 대중 영화라고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평단에 자극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고요.
장르 영화 계급장 떼고 붙으면 곡성을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죠. 그 영화들은 다루는 것과 다루는 방법 모두 그 야심을 이룬 것들이니까요. 생각해보면 평론가들이 다루는 것, 그러니까 어려운 주제 의식들에 대해서 일반인보다 많이 아는 척하지만 실제로 그것에 대한 깊이가 뛰어나거나 통찰력 있는 전문가 집단은 아니구나 싶기도 하네요. 영화를 많이 보고 영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죠 ㅋㅋ
장르 영화 계급장 떼고 붙으면 곡성을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죠. 그 영화들은 다루는 것과 다루는 방법 모두 그 야심을 이룬 것들이니까요. 생각해보면 평론가들이 다루는 것, 그러니까 어려운 주제 의식들에 대해서 일반인보다 많이 아는 척하지만 실제로 그것에 대한 깊이가 뛰어나거나 통찰력 있는 전문가 집단은 아니구나 싶기도 하네요. 영화를 많이 보고 영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죠 ㅋㅋ
곡성이 다루는 주제 의식은 신과 악마, 재앙처럼 근원적인 물음인데 그 깊이는 그에 반해 얕아 보였거든요. 재앙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하나님은 우리 죄를 어떻게 사하시는가...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는데 여기에 성실하게 대답하는 영화도 아니고 더욱이 성실하게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 것 같아요. 이 주제 의식을 오컬트라는 장르적 이해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초점을 맞추면 좋은 감상이 될 것 같고 평단의 극호평도 그런 연유로 보여요.
그런데 주제 의식만 놓고 보면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은 그 자체로만 어떤 논의가 가능할 ... 더 보기
그런데 주제 의식만 놓고 보면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은 그 자체로만 어떤 논의가 가능할 ... 더 보기
곡성이 다루는 주제 의식은 신과 악마, 재앙처럼 근원적인 물음인데 그 깊이는 그에 반해 얕아 보였거든요. 재앙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하나님은 우리 죄를 어떻게 사하시는가...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는데 여기에 성실하게 대답하는 영화도 아니고 더욱이 성실하게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 것 같아요. 이 주제 의식을 오컬트라는 장르적 이해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초점을 맞추면 좋은 감상이 될 것 같고 평단의 극호평도 그런 연유로 보여요.
그런데 주제 의식만 놓고 보면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은 그 자체로만 어떤 논의가 가능할 정도의 깊이와 무게가 있어요. 이걸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영화들과 동일선 상에서 호평하면 불공평하다는 거죠.
박찬욱 복수극은 참돔으로 맛있고 정교하게 회를 뜬 거라면 곡성은 광어로 맛있는 매운탕을 끓였달까요. 근데 참돔이랑 광어는 뭔가 다른데... 똑같이 맛있다고 해도 되나 그런 느낌이랄까요.
주제 의식은 철학이라면 영화는 영화고 평론가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영화 전문가라는 거죠. 미식가들이 참돔이랑 광어 분류하는 어류 전문가가 아니듯이요. 가끔 사람들이 참돔이랑 광어 놓고 어류 도감 대결하는 게 엉뚱한 짓일 수 있는데 평론가들은 이 싸움을 중재하거나 해결하진 않겠죠.
그런데 주제 의식만 놓고 보면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은 그 자체로만 어떤 논의가 가능할 정도의 깊이와 무게가 있어요. 이걸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영화들과 동일선 상에서 호평하면 불공평하다는 거죠.
박찬욱 복수극은 참돔으로 맛있고 정교하게 회를 뜬 거라면 곡성은 광어로 맛있는 매운탕을 끓였달까요. 근데 참돔이랑 광어는 뭔가 다른데... 똑같이 맛있다고 해도 되나 그런 느낌이랄까요.
주제 의식은 철학이라면 영화는 영화고 평론가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영화 전문가라는 거죠. 미식가들이 참돔이랑 광어 분류하는 어류 전문가가 아니듯이요. 가끔 사람들이 참돔이랑 광어 놓고 어류 도감 대결하는 게 엉뚱한 짓일 수 있는데 평론가들은 이 싸움을 중재하거나 해결하진 않겠죠.
1. 저는 공격적인 표현이 합당할 만큼의 근거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아는 척을 한다\" 고 했으니 \"아는 척\"의 증거를 제시해달라는 거지요. 저 해당 문장은 \"평론가\"들을 평가하는 문장이지요. 평론가들은 아직 별점밖에 안줬습니다. 그 별점을 무슨 연유에서 줬는지, 텍스트 말고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그 심중을 어떻게 다 파악했는지, 이를 \"아는 척\"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저는 그 공격성의 합리에 대해 묻는 겁니다.
2. 텍스트의 깊이가 어떤 영화의 가치를 온전하게 다룰 수 있나요? 그렇게 치면 ... 더 보기
2. 텍스트의 깊이가 어떤 영화의 가치를 온전하게 다룰 수 있나요? 그렇게 치면 ... 더 보기
1. 저는 공격적인 표현이 합당할 만큼의 근거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아는 척을 한다\" 고 했으니 \"아는 척\"의 증거를 제시해달라는 거지요. 저 해당 문장은 \"평론가\"들을 평가하는 문장이지요. 평론가들은 아직 별점밖에 안줬습니다. 그 별점을 무슨 연유에서 줬는지, 텍스트 말고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그 심중을 어떻게 다 파악했는지, 이를 \"아는 척\"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저는 그 공격성의 합리에 대해 묻는 겁니다.
2. 텍스트의 깊이가 어떤 영화의 가치를 온전하게 다룰 수 있나요? 그렇게 치면 텍스트가 얕은 작품들은 그냥 다 쓰레기가 되죠. 듀나의 평 인용합니다. 그렇게 치면<싱잉 인 더 레인> 이 어떻게 걸작이 되겠습니까. 그 영화에 무슨 주제 의식 같은 건 쥐뿔도 없는데요.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모든 영화는 다루려는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갈 것인지 대충 선을 그어놓습니다.곡성은 이야기가 질문 자체에서 끝나고 그 질문과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이들의 회한이 주를 이루는 영화입니다. 중요한 건 어떤 작품이 자신이 계획한 만큼의 야심을 온전히 펼쳐보이느냐죠. 그렇다면 곡성이라는 작품 자체의 텍스트와 야심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더 엄밀한 평가죠. 어떻게 말하면 텍스트에서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과 비교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측면의 기술적 완성도를 따질 때만 비교선상에 놓일 수 있죠. 주제 의식 자체도 신과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가 인간들끼리의 아웅다웅을 그리는 이야기와 비교될 이유가 없구요.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과 비교하던가요.
3. 영화를 논할려면 영화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리틀미 님의 비판에서 영화를 영화적으로 읽을려는 시도를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면의 이해를 두고 \"장르적으로 퉁치자\" 라고 건성으로 넘어가려는 해석을 대신 봤을 뿐입니다. 그것도 작품의 내재적 해석이 아니라 다른 작품과 애매한 비유를 통한 비교뿐이지요. 저는 광어나 참돔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회도 안먹구요. 대신 \"설명\"을 해달라는 겁니다. 텍스트의 깊이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지, 박찬욱의 작품이 도달한 지점에 나홍진의 은 어디서 도달하지 못했는지를요. 저는 리틀미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수십가지는 됩니다. 저같은 아마츄어도 리틀미님의 단정적인 카톨릭 일변도 해석에 궁금한 지점이 많고, 거기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지 않으셨는데 아직 나오지도 않은 평론가들의 평론은 어찌 알고 그들을 폄하하시나요.
4. 안녕하세요 삼공파일님. 그런데 저희가 굳이 지난 아이디를 서로 통성명해야 하는지요.
2. 텍스트의 깊이가 어떤 영화의 가치를 온전하게 다룰 수 있나요? 그렇게 치면 텍스트가 얕은 작품들은 그냥 다 쓰레기가 되죠. 듀나의 평 인용합니다. 그렇게 치면<싱잉 인 더 레인> 이 어떻게 걸작이 되겠습니까. 그 영화에 무슨 주제 의식 같은 건 쥐뿔도 없는데요.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모든 영화는 다루려는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갈 것인지 대충 선을 그어놓습니다.곡성은 이야기가 질문 자체에서 끝나고 그 질문과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이들의 회한이 주를 이루는 영화입니다. 중요한 건 어떤 작품이 자신이 계획한 만큼의 야심을 온전히 펼쳐보이느냐죠. 그렇다면 곡성이라는 작품 자체의 텍스트와 야심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더 엄밀한 평가죠. 어떻게 말하면 텍스트에서 이 영화는 살인의 추억과 비교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측면의 기술적 완성도를 따질 때만 비교선상에 놓일 수 있죠. 주제 의식 자체도 신과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가 인간들끼리의 아웅다웅을 그리는 이야기와 비교될 이유가 없구요.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살인의 추억이나 박찬욱 복수극과 비교하던가요.
3. 영화를 논할려면 영화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리틀미 님의 비판에서 영화를 영화적으로 읽을려는 시도를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면의 이해를 두고 \"장르적으로 퉁치자\" 라고 건성으로 넘어가려는 해석을 대신 봤을 뿐입니다. 그것도 작품의 내재적 해석이 아니라 다른 작품과 애매한 비유를 통한 비교뿐이지요. 저는 광어나 참돔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회도 안먹구요. 대신 \"설명\"을 해달라는 겁니다. 텍스트의 깊이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지, 박찬욱의 작품이 도달한 지점에 나홍진의 은 어디서 도달하지 못했는지를요. 저는 리틀미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수십가지는 됩니다. 저같은 아마츄어도 리틀미님의 단정적인 카톨릭 일변도 해석에 궁금한 지점이 많고, 거기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지 않으셨는데 아직 나오지도 않은 평론가들의 평론은 어찌 알고 그들을 폄하하시나요.
4. 안녕하세요 삼공파일님. 그런데 저희가 굳이 지난 아이디를 서로 통성명해야 하는지요.
123에 대해서 쓰려다가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말래요. 왕천군님 혼자 \"굉장히 오만\"이라는 공격성의 합리나 고민해보세요.
처음에는 그냥 영화 좋아하니까 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오만이니 어쩌구하시니까 삼공파일이라고 얘기한 거에요. 홍차넷에서 왕천군님이 제 사건에 끼셔갖고 깽판 치신 것 때문에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 좋았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영화에 대해서 토론의 장이 열린 것마냥 행동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정말 짜증나서 다른 사람들 보는데 댓글로 써야 겠네요. 몇개월만에 갑자기 등장해서 이런 식으로 댓... 더 보기
처음에는 그냥 영화 좋아하니까 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오만이니 어쩌구하시니까 삼공파일이라고 얘기한 거에요. 홍차넷에서 왕천군님이 제 사건에 끼셔갖고 깽판 치신 것 때문에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 좋았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영화에 대해서 토론의 장이 열린 것마냥 행동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정말 짜증나서 다른 사람들 보는데 댓글로 써야 겠네요. 몇개월만에 갑자기 등장해서 이런 식으로 댓... 더 보기
123에 대해서 쓰려다가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말래요. 왕천군님 혼자 \"굉장히 오만\"이라는 공격성의 합리나 고민해보세요.
처음에는 그냥 영화 좋아하니까 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오만이니 어쩌구하시니까 삼공파일이라고 얘기한 거에요. 홍차넷에서 왕천군님이 제 사건에 끼셔갖고 깽판 치신 것 때문에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 좋았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영화에 대해서 토론의 장이 열린 것마냥 행동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정말 짜증나서 다른 사람들 보는데 댓글로 써야 겠네요. 몇개월만에 갑자기 등장해서 이런 식으로 댓글 쓰시는 거 이 사이트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요.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진짜 ㅋㅋㅋㅋ 지금 이러고 또 여기 안 나타날 거잖아요? 곡성 보고 요즘 드는 생각인데 님처럼 뻔뻔하고 자기 성찰이 불가능한 사람한테도 기독교적 구원이 가능할까요? 인간이 하긴 힘드니까 종교의 영역이겠죠?
처음에는 그냥 영화 좋아하니까 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오만이니 어쩌구하시니까 삼공파일이라고 얘기한 거에요. 홍차넷에서 왕천군님이 제 사건에 끼셔갖고 깽판 치신 것 때문에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 좋았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영화에 대해서 토론의 장이 열린 것마냥 행동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정말 짜증나서 다른 사람들 보는데 댓글로 써야 겠네요. 몇개월만에 갑자기 등장해서 이런 식으로 댓글 쓰시는 거 이 사이트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요.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진짜 ㅋㅋㅋㅋ 지금 이러고 또 여기 안 나타날 거잖아요? 곡성 보고 요즘 드는 생각인데 님처럼 뻔뻔하고 자기 성찰이 불가능한 사람한테도 기독교적 구원이 가능할까요? 인간이 하긴 힘드니까 종교의 영역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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