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5/25 06:34:47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덴뿌라인듯 덴뿌라 아닌 덴뿌라 같은 이야기 (덴뿌라는 거들뿐)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희곡 ‘젊은이여 되살아나라’ 에서 “평화로운 시대의 사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원하면 수돗물처럼 쓸 수 있고 사치의 극치를 맛볼 수 있는 물건을 팔지. 바로 죽음이야. 나는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청춘의 특권에 취해버려. (…) 젊은 놈들의 죽음만이 호기롭고 사치스러운 거야. 남은 일생을 한 번 에 다 써버리는 거니까. 젊은 놈들의 죽음만이 아름다운 거야. 그건 일종의 예술이지. 가장 자연에 반하는 일이면서도 자연의 한 상태니까.” 라고 쓰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죽는 일, 젊어서 죽는 일, 이것이야말로 미시마에게 아름다움의 극한이었던 셈이죠. 한 순간, 찰나의 영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밀어 넣는 인생을 찬미하는 거죠. 이러한 미시마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은 훗날 소설 ‘금각사’(정신 나간 방화범 이야기) 로 이어집니다.

일시적인 영원성, 자기 파괴적인 탐미주의는 문학뿐 아니라 일본의 문화 곳곳에 드러납니다. 여름이 되면 일본인을 열광하게 하는 ‘고시엔’ 역시 이런 속성을 담고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계절과 고등학생이라는 나이는 모두 다, 인생과 계절에서 청춘을 뜻합니다. 그리고 ‘고시엔’을 위해 그 청춘을 불사릅니다. ‘고시엔’을 배경으로 하는 하이틴 만화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이유는 이런 문화적 맥락에서 찾을 수 있겠죠. 비단 야구 만화 뿐만이 아닙니다. ‘내일의 죠’ 라는 만화를 아시나요? 만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새하얗게 불태웠어’라는 대사와 링의 코너에 팔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낯이 익을 겁니다.



유명한 만화인 ‘슬램덩크’에서도 이런 류의 장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2차 대전 때 가미가제 특공대가 일본식 탐미주의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황을 위해 아름다운 사쿠라 꽃잎처럼 져라”라는 군부의 구호 아래, 특공대는 군복에 한 가닥의 벚나무 가지를 꽂고 미 항공모함을 향해 전투기를 몰고 돌진했었죠. 목숨에 연연하지 않듯 쉬이 피고 사그라지는 벚꽃을 상징물로 선택한 것 또한, 절대자를 위해 죽는 것 자체가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행위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겠죠.



그리고 음식 문화에서도 이런 맥락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기껏 바삭하게 튀겨낸 덴뿌라를 일부러 국물에 적셔 먹는 덴차즈케는 그 자체로 부조리의 현현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부조리해 보이는 음식에도 역시 일본 특유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튀김이 국물에 젖어 눅눅하게 해제되기 전, 그 찰나에 튀김의 바삭함과 국물의 시원함이 공존하는 지점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 바로 '덴차즈케' 입니다. 찰나의 한 순간을 위해 덴뿌라를 튀기고 국물에 적시는 과정을 수행하는 거죠. 마치 온 계절을 기다려 벚꽃이 지는 단 한 순간을 만끽하는 일본식 탐미주의를 음식으로 표현한 듯 합니다. ‘덴차즈케’야말로 일본 식문화의 헤도니즘적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음식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덴차즈케



11
  • 이제 이분이 홍차넷 황교익이 아니라 황교익씨가 지상파 마르코폴로인 것!
  • 오오 이런 글이라니
  • 튀김 먹으면 기분이 튀김튀김
  • 오오 놀랍네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958 역사붉은 건 [ ]다 12 눈시 17/02/22 4851 11
4886 생활체육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59 Rosinante 17/02/16 9452 11
4871 일상/생각[벙개후기] 어제 만났던 분들 44 와이 17/02/15 3683 11
4841 과학/기술지금까지 본, 기억에 남는 공룡들 (사진많아유) 13 엘에스디 17/02/11 7903 11
4681 꿀팁/강좌읍,면,동 주민센터 방문시 알아두면 좋을 팁. 4 레이드 17/01/23 5756 11
4549 일상/생각냉장고에 지도 그린 날 4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7/01/06 3813 11
4526 사회대리모 문제 37 烏鳳 17/01/03 6816 11
8939 의료/건강버닝썬 사건에서 언급된 물뽕, 그리고 마약 이야기 9 모모스 19/03/06 8657 11
4305 일상/생각이것은 실화다. 8 성의준 16/12/06 4871 11
4230 기타캐리커처 표정 바꾸기 28 민달팽이 16/11/25 4450 11
4003 의료/건강너무 착한 병 17 눈부심 16/10/25 4184 11
3902 일상/생각보름달 빵 6 tannenbaum 16/10/14 3229 11
3790 정치미국의 트럼프 열풍에 대한 소고 21 길도현 16/09/28 7955 11
8867 일상/생각요 근래 재밌게 본 유튜브 채널과 영상 11 kaestro 19/02/15 5415 11
3689 기타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2): 디제이디제이 드랍 더 비트 30 기아트윈스 16/09/12 5356 11
3484 기타원어민도 못푸는 수능34번 문제? 34 Event Horizon 16/08/09 6663 11
3447 정치성별과 투표참여, 그리고 정치지식과 선거관심도 9 난커피가더좋아 16/08/04 4297 11
3387 도서/문학히틀러 <나의 투쟁>을 읽고 6 DrCuddy 16/07/28 8707 11
3356 IT/컴퓨터어느 게임 회사 이야기 (18) 24 NULLPointer 16/07/26 17378 11
9010 오프모임끝) 쭈꾸미 같이 드실 사람! 82 우리온 19/03/28 5367 11
3121 일상/생각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2 켈로그김 16/06/25 3894 11
8875 스포츠[사이클] 랜스 암스트롱 (3) - 고소왕 랜스 15 AGuyWithGlasses 19/02/17 5259 11
3033 게임[Don't Starve] 이것만 알면 원숭이도 10일내로 정착지를 만든다! 14 Xayide 16/06/14 10586 11
2887 기타덴뿌라인듯 덴뿌라 아닌 덴뿌라 같은 이야기 (덴뿌라는 거들뿐) 29 마르코폴로 16/05/25 7058 11
2876 일상/생각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49 nickyo 16/05/24 7097 1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