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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6/19 02:30:46 |
Name | 리틀미 |
Subject | . |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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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심리학 쪽을 공부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으나 정신의학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대증적 접근을 취할 수 밖에 없어서, 심리상담을 통한 치료가 확실히 병행되는 수 밖에 없어 보이긴 하더군요. 심각한 경우에는 약물 치료등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경우도 많지만 약물보다 원인해결이 우선되어야 하는 경우에도 약물 처방만으로 해결코자 하는 상황에서 문제가 커지는 걸 자주 봅니다. 물론 본문의 조현증이나 아스퍼거 같은 건 유전적 요인이 워낙 커서 심리상담의 처리 역량을 완전히 벗어나 버리는 경우도 잦고...
양쪽의 병행과 협업이 중요할 건데 이게 사회적 구조 탓인지 쉽지가 않습니다.
양쪽의 병행과 협업이 중요할 건데 이게 사회적 구조 탓인지 쉽지가 않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난 이후에 이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이 인터넷에서 다뤄질 때 저는 철저하게 무관심했습니다. 사실은 약간은 무의미하고 지나치게 소모적이라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그 어떤 글에서도 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서 제가 느낀 그 막연한 느낌이 구체화 되는 느낌이라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주절거려 볼까 합니다. 사실 제가 이 댓글에서 말하고자 할 내용의 대부분은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에 나온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라 그렇게 새로운 관점이라고 생... 더 보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난 이후에 이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이 인터넷에서 다뤄질 때 저는 철저하게 무관심했습니다. 사실은 약간은 무의미하고 지나치게 소모적이라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그 어떤 글에서도 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서 제가 느낀 그 막연한 느낌이 구체화 되는 느낌이라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주절거려 볼까 합니다. 사실 제가 이 댓글에서 말하고자 할 내용의 대부분은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에 나온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라 그렇게 새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요.
우선 저는 분과학문의 영역이 깔끔하게 분절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게는 일부 중첩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여기에 ‘환원주의’라는 개념을 넣어서 생각해본다면 일종의 계층구조까지 상정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좋은 환원주의(또는 계층적 환원주의라 불린다.)는 한 분야의 지식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두 분야의 지식을 연결 또는 통합한다. 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건축 자재를 다른 분야로 가져와 현미경 아래 놓는다. 블랙 박스가 열리고, 약속 어음이 현찰로 지불된다. 지리학자는 아프리카의 해안선이 남아메리카의 해안선과 맞는 이유에 대해, 두 대륙이 한때 인접해 있었지만 서로 다른 판 위에 있었기 때문에 판을 따라 이동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판들이 왜 이동하는가가 지질학자에게 넘겨지면, 지질학자는 마그마의 용승 작용으로 판이 밀려난다고 설명한다. 마그마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뜨거워졌는가에 대해서는 물리학자에게 지구의 핵과 맨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어떤 과학자도 이 사슬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고립된 지리학자는 대륙의 이동을 설명하기 위해 마술에 의존해야 할 것이고, 고립된 물리학자는 남아메리카의 형태를 예측하지 못한다.
스티븐 핑커는 ‘나쁜 환원주의’(또는 ‘탐욕스런 환원주의’, ‘파괴적 환원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사회학은 결국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는 거고 이는 우리가 신경막의 생물 물리학이나 시냅스의 분자 구조를 통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사회학은 무가치하고 결국 생물학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와 같은 주장이 이에 해당하겠죠.
핑커는 이런 나쁜 환원주의의 오류, 혹은 월권이 쉽게 입증하고 논파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말하고 넘어갑니다. 핑커의 주장들을 보다 보면 간혹 가다가 지나치게 나이브하거나 낙관적인 지점들을 볼 수 있는데 이도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학문끼리 충돌하는 쟁점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경우 양측 모두 과학적 엄밀성이 부족하거나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대립되는 경우에는 이를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그를 합리적으로 인지하고 판별할 수 있지도 의문입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핑커가 그런 사회적 현상들은 이러한 과학의 파괴적 환원주의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개념을 막론하고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긴 합니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의 사건을 분석함에 있어서 모든 것이 저 위에 핑커가 예시로 든 지리-지질-물리학자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계층구조로 깔끔하게 요약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니 환원이 실제로 되긴 하겠지만 그게 그 주제를 더 심층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그저 다른 영역에서 파악하는 수준에 그칠 수 있습니다.
가령 경제학의 경우 결국 인간의 이기심과 그에 기반한 행동들을 원자적 단위로 해서 전체 학문이 구성됩니다. 하지만 경제학 자체의 성질은 인간의 유전이나 뇌의 성질을 파악한다고 해서 이해가 더 높아지기가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학 자체가 일종의 인위적인 약속과 그 상호작용에 따라 파생되는 ‘뇌’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복잡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원의 고리가 굉장히 약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했듯이 이러한 접근이 아예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죠. 다만 ‘월권’(사실 아까부터 월권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지만 이것은 저의 관점이고 핑커는 이를 월권보다는 ‘오류’라고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인지 ‘통섭’인지 분간해내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경제학의 예시를 들었지만 이건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 치환을 해봐도 구체적인 형태가 다를 뿐 마찬가지일 겁니다.
핑커도 그렇게 논리가 허술한 사람은 아니라 본인도 이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습니다.(저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성한 관점에서 이를 인지하고 있겠죠.) 결국 그가 이에 대해서 결론 내리는 건 서로 설명하는 층위가 다르다는 것만 인지하면 ‘월권’을 잡아내기 쉽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월권을 잡아내지 못하는 건 사람들이 다른 층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가 자주 사용하는 예시는 ‘궁극적 원인’과 ‘근인’의 차이에 관한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이 여성을 강간했다고 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근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남성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다양한 경험과 그에 따른 가치관의 형성, 허술한 치안, 형벌제도, 성매매 합법의 유무 등등 수 많은 근인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 원인은 유전적으로 남성이 강간하고 싶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죠.
이 둘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습니다. 근인도 궁극적 원인도 모두 특정 주제에 대한 이해의 층위를 높여주는 요소가 있으니까요. 핑커가 우려했던 지점은 궁극적 원인을 통해서 근인이 모두 무마된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갖는 맹목적인 공포, 그리고 그에 따라서 궁극적 원인의 분석 자체를 가로막는 행태들이었겠죠.
서론이 길었죠. 근데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면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저의 입장은 간단합니다. 그냥 이 사건은 ‘여혐 범죄’이자, ‘정신분열증에 의해서 야기된 범죄’ 모두 아닐까요? ‘여혐 범죄’라는 말하는 것이 ‘정신분열증 때문에 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쇄시키는 것도 아니며, 정신분열증에 의해서 범죄가 일어났다는 것이 여혐 범죄였다는 것을 상쇄시키기 어렵다고 봅니다.(가해자가 초기 범행 진술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가정을 오컴의 면도날로 날려버린다면요.) 마치 남자가 강간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게끔 유전자가 설계되어있다는 사실이 강간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빈 서판>에서는 거의 한 장을 할애해서 결정론과 범죄의 책임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유전적인 결정론이 범죄행위에 대해서 개인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죠. 여기서 핑커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특정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범죄에 대한 자제력이 낮다는 것에 대하여, 자제력이 약한 사람은 매를 더 맞아야지 말을 듣기 때문에 더 때려야 한다는 논리와 자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처벌을 약하게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두 논리로 갈리는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은 나름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가 가져다 줄 피해를 정신질환자가 ‘인지’할 수 있다면 처벌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인지가 불가능하다면 처벌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범죄의 처벌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범죄의 방지, 즉 범죄가 덜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구이자 장치로 생각한다면 묘한 역설이 성립합니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너 이거 하면 엄청 큰 처벌을 할거야’라고 엄포를 내린다고 치죠. 근데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 자체의 예방적 가치는 사라지죠. 애초에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위협을 통한 범죄의 ‘예방’이었는데 예방이 실패한 순간 처벌은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해버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처벌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그가 지금 저지른 범죄 이외의 범죄에 대한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법적으로 특정 범죄에 대한 처벌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엄포가 갖는 신뢰성을 위해서 그 범죄자는 실제 처벌로서 일종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죠.
<빈 서판>에 나온 올리버 웬델 홉의 인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교수대에 설(혹은 전기 의자에 앉을) 사람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행동을 당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희생시키고자 합니다.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병사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그러나 법은 약속대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범죄 자체가 갖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예방적 가치에 포섭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금치산자, 어린아이, 동물, 무생물에 대해서는 처벌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죠. 그들에게는 처벌 정책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쟁점은 범죄의 예방에 있다고 봤을 때 지금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제가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건 가해자가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의 경우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닌가 정도겠죠. 만약 그렇다면 지진이 났다고 땅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꼴인데 이건 당연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정신분열증 환자는 충동 장애가 있다, 자제력이 약하다,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것은 여혐 범죄라고 보는 시각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범죄자도 그들의 자제력을 허무는 어떤 생물학적 요소가 당연히 있었겠죠. 심지어 일베, 아니 그보다 더한 나치즘, 각종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도 내가 그 사람과 똑같은 생물학적 특성과 똑같은 경험을 했을 때 나는 다르게 행동했으리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었기 때문에 까는 것이죠. 그리고 반대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해도 거기에 어떤 원인이 있는 건 당연하고 그걸 분석해야 우리 사회적 문제를 더 객관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도 당연하고요. 대립되는 양 지점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 까지 한데 서로를 서로를 통해서 상쇄시키려고 발악을 하다 보니 제 입장에선 비약이고 무의미한 소모일 뿐이었던 것이죠.
우선 저는 분과학문의 영역이 깔끔하게 분절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게는 일부 중첩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여기에 ‘환원주의’라는 개념을 넣어서 생각해본다면 일종의 계층구조까지 상정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좋은 환원주의(또는 계층적 환원주의라 불린다.)는 한 분야의 지식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두 분야의 지식을 연결 또는 통합한다. 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건축 자재를 다른 분야로 가져와 현미경 아래 놓는다. 블랙 박스가 열리고, 약속 어음이 현찰로 지불된다. 지리학자는 아프리카의 해안선이 남아메리카의 해안선과 맞는 이유에 대해, 두 대륙이 한때 인접해 있었지만 서로 다른 판 위에 있었기 때문에 판을 따라 이동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판들이 왜 이동하는가가 지질학자에게 넘겨지면, 지질학자는 마그마의 용승 작용으로 판이 밀려난다고 설명한다. 마그마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뜨거워졌는가에 대해서는 물리학자에게 지구의 핵과 맨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어떤 과학자도 이 사슬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고립된 지리학자는 대륙의 이동을 설명하기 위해 마술에 의존해야 할 것이고, 고립된 물리학자는 남아메리카의 형태를 예측하지 못한다.
스티븐 핑커는 ‘나쁜 환원주의’(또는 ‘탐욕스런 환원주의’, ‘파괴적 환원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사회학은 결국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는 거고 이는 우리가 신경막의 생물 물리학이나 시냅스의 분자 구조를 통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사회학은 무가치하고 결국 생물학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와 같은 주장이 이에 해당하겠죠.
핑커는 이런 나쁜 환원주의의 오류, 혹은 월권이 쉽게 입증하고 논파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말하고 넘어갑니다. 핑커의 주장들을 보다 보면 간혹 가다가 지나치게 나이브하거나 낙관적인 지점들을 볼 수 있는데 이도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학문끼리 충돌하는 쟁점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경우 양측 모두 과학적 엄밀성이 부족하거나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대립되는 경우에는 이를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그를 합리적으로 인지하고 판별할 수 있지도 의문입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핑커가 그런 사회적 현상들은 이러한 과학의 파괴적 환원주의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개념을 막론하고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긴 합니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의 사건을 분석함에 있어서 모든 것이 저 위에 핑커가 예시로 든 지리-지질-물리학자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계층구조로 깔끔하게 요약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니 환원이 실제로 되긴 하겠지만 그게 그 주제를 더 심층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그저 다른 영역에서 파악하는 수준에 그칠 수 있습니다.
가령 경제학의 경우 결국 인간의 이기심과 그에 기반한 행동들을 원자적 단위로 해서 전체 학문이 구성됩니다. 하지만 경제학 자체의 성질은 인간의 유전이나 뇌의 성질을 파악한다고 해서 이해가 더 높아지기가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학 자체가 일종의 인위적인 약속과 그 상호작용에 따라 파생되는 ‘뇌’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복잡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원의 고리가 굉장히 약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했듯이 이러한 접근이 아예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죠. 다만 ‘월권’(사실 아까부터 월권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지만 이것은 저의 관점이고 핑커는 이를 월권보다는 ‘오류’라고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인지 ‘통섭’인지 분간해내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경제학의 예시를 들었지만 이건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 치환을 해봐도 구체적인 형태가 다를 뿐 마찬가지일 겁니다.
핑커도 그렇게 논리가 허술한 사람은 아니라 본인도 이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습니다.(저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성한 관점에서 이를 인지하고 있겠죠.) 결국 그가 이에 대해서 결론 내리는 건 서로 설명하는 층위가 다르다는 것만 인지하면 ‘월권’을 잡아내기 쉽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월권을 잡아내지 못하는 건 사람들이 다른 층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가 자주 사용하는 예시는 ‘궁극적 원인’과 ‘근인’의 차이에 관한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이 여성을 강간했다고 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근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남성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다양한 경험과 그에 따른 가치관의 형성, 허술한 치안, 형벌제도, 성매매 합법의 유무 등등 수 많은 근인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 원인은 유전적으로 남성이 강간하고 싶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죠.
이 둘은 서로를 상쇄하지 않습니다. 근인도 궁극적 원인도 모두 특정 주제에 대한 이해의 층위를 높여주는 요소가 있으니까요. 핑커가 우려했던 지점은 궁극적 원인을 통해서 근인이 모두 무마된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갖는 맹목적인 공포, 그리고 그에 따라서 궁극적 원인의 분석 자체를 가로막는 행태들이었겠죠.
서론이 길었죠. 근데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면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저의 입장은 간단합니다. 그냥 이 사건은 ‘여혐 범죄’이자, ‘정신분열증에 의해서 야기된 범죄’ 모두 아닐까요? ‘여혐 범죄’라는 말하는 것이 ‘정신분열증 때문에 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쇄시키는 것도 아니며, 정신분열증에 의해서 범죄가 일어났다는 것이 여혐 범죄였다는 것을 상쇄시키기 어렵다고 봅니다.(가해자가 초기 범행 진술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가정을 오컴의 면도날로 날려버린다면요.) 마치 남자가 강간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게끔 유전자가 설계되어있다는 사실이 강간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빈 서판>에서는 거의 한 장을 할애해서 결정론과 범죄의 책임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유전적인 결정론이 범죄행위에 대해서 개인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죠. 여기서 핑커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특정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범죄에 대한 자제력이 낮다는 것에 대하여, 자제력이 약한 사람은 매를 더 맞아야지 말을 듣기 때문에 더 때려야 한다는 논리와 자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처벌을 약하게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두 논리로 갈리는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은 나름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가 가져다 줄 피해를 정신질환자가 ‘인지’할 수 있다면 처벌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인지가 불가능하다면 처벌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범죄의 처벌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범죄의 방지, 즉 범죄가 덜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구이자 장치로 생각한다면 묘한 역설이 성립합니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너 이거 하면 엄청 큰 처벌을 할거야’라고 엄포를 내린다고 치죠. 근데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 자체의 예방적 가치는 사라지죠. 애초에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위협을 통한 범죄의 ‘예방’이었는데 예방이 실패한 순간 처벌은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해버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처벌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그가 지금 저지른 범죄 이외의 범죄에 대한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법적으로 특정 범죄에 대한 처벌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엄포가 갖는 신뢰성을 위해서 그 범죄자는 실제 처벌로서 일종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죠.
<빈 서판>에 나온 올리버 웬델 홉의 인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교수대에 설(혹은 전기 의자에 앉을) 사람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행동을 당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희생시키고자 합니다. 원한다면 당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병사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그러나 법은 약속대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범죄 자체가 갖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예방적 가치에 포섭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금치산자, 어린아이, 동물, 무생물에 대해서는 처벌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죠. 그들에게는 처벌 정책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쟁점은 범죄의 예방에 있다고 봤을 때 지금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제가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건 가해자가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의 경우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닌가 정도겠죠. 만약 그렇다면 지진이 났다고 땅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꼴인데 이건 당연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정신분열증 환자는 충동 장애가 있다, 자제력이 약하다,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것은 여혐 범죄라고 보는 시각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범죄자도 그들의 자제력을 허무는 어떤 생물학적 요소가 당연히 있었겠죠. 심지어 일베, 아니 그보다 더한 나치즘, 각종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도 내가 그 사람과 똑같은 생물학적 특성과 똑같은 경험을 했을 때 나는 다르게 행동했으리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었기 때문에 까는 것이죠. 그리고 반대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해도 거기에 어떤 원인이 있는 건 당연하고 그걸 분석해야 우리 사회적 문제를 더 객관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것도 당연하고요. 대립되는 양 지점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 까지 한데 서로를 서로를 통해서 상쇄시키려고 발악을 하다 보니 제 입장에선 비약이고 무의미한 소모일 뿐이었던 것이죠.
살인범의 정신분열증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가령 예를 들면 표창원 씨의 주장 같은 것들이 마치 여성혐오 범죄를 가리기 위해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는 못된 짓처럼 몰린 것이 당시 여론의 분위기였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서로 상쇄시키는 것이 아닐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정신분열증 이슈는 제기하는 사람에게 부당한 비판까지 가하면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지요.
저도 핑커 좋아하는데요, 만약에 핑커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해줬다면 아마 당연하게도 정신분열증에 집중했을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인용구도 주로 그런 부분입니다. ... 더 보기
저도 핑커 좋아하는데요, 만약에 핑커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해줬다면 아마 당연하게도 정신분열증에 집중했을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인용구도 주로 그런 부분입니다. ... 더 보기
살인범의 정신분열증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가령 예를 들면 표창원 씨의 주장 같은 것들이 마치 여성혐오 범죄를 가리기 위해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는 못된 짓처럼 몰린 것이 당시 여론의 분위기였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서로 상쇄시키는 것이 아닐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정신분열증 이슈는 제기하는 사람에게 부당한 비판까지 가하면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지요.
저도 핑커 좋아하는데요, 만약에 핑커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해줬다면 아마 당연하게도 정신분열증에 집중했을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인용구도 주로 그런 부분입니다. 범죄 행위 자체를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으며 얼마나 이를 사법적 판단에 적용할 것인지는 오히려 상당히 임의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외계인이 정신을 조정하여 완전히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정신질환이 감형과 참작의 이유는 될 지언정 책임을 완전히 잃는 게 아니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정신질환의 충동 장애나 폭력성에 대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 대한 편견과 싸워야 한다는 부분에 더 가깝습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제대로 사회에 합류될 수 있는가 그리고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나 제도적 뒷받침이 현재 매우 부실한 상황입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폭력성이나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높지 않고 오히려 낮다는 연구 결과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건 관리와 치료가 이뤄질 때 얘깁니다. 환자가 아닌 사람도 사회적 환경에 따라 폭력성과 범죄율이 달라지는데 만성 정신질환자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성 정신질환자는 사회가 책임지고 관리하면서도 인권을 침해하지 말아야 하는 아주 민감하고 어려운 대상의 사람들입니다. 살인범의 병력을 보면 개인이 치료를 하다가 포기하고 사회적으로 방기된 상태에 놓인 것으로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회에 복귀시키면서도 적절한 치료를 개인의 부담을 최소화해서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건 어렵기 때문에 자꾸 이들을 사회의 어두운 쪽으로 몰아 넣고 모르는 척해버리는 것이죠. 정신질환자의 인권과 관리의 균형 사이에서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이런 종류의 범죄에서도 이 부분에 집중하는 반면에 강남역 사건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살인범에게 어떤 의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요소가 있는지 관심 없다고 하셨는데, 저 역시 같은 이유로 살인범의 망상 내용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경증에서는 환자가 실제로 시달리는 내용이 중요하지만, 정신증을 겪는 환자의 경우에는 망상 내용은 환자의 정신병리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해도 살인범이 여자만 특정해서 죽이지 않았으리라고는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텍스트인 성경만 열어봐도 여성혐오에 가까운 내용을 수두룩합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망상 내용을 말한 것으로 보이는 게 거의 확실시 되는데 그 이야기에 온 사회가 집중하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파고드는 것 자체가 그닥 옳은 방향은 아닙니다. 물론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 환기와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에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지구의 핵과 맨틀 정도에 해당하는 코어의 과학적 사실들을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줄리님 같은 분들에게 지금 만성 정신질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얼마나 위험과 생활고에 노출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이 사건의 이슈가 제대로 포커싱되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보입니다. 대단히 사회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의학적인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나는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부분에는 크게 관심없다. 특히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갖기는 싫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단절된 것이 아주 슬픈 일입니다.
저도 핑커 좋아하는데요, 만약에 핑커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해줬다면 아마 당연하게도 정신분열증에 집중했을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인용구도 주로 그런 부분입니다. 범죄 행위 자체를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으며 얼마나 이를 사법적 판단에 적용할 것인지는 오히려 상당히 임의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외계인이 정신을 조정하여 완전히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정신질환이 감형과 참작의 이유는 될 지언정 책임을 완전히 잃는 게 아니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정신질환의 충동 장애나 폭력성에 대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 대한 편견과 싸워야 한다는 부분에 더 가깝습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제대로 사회에 합류될 수 있는가 그리고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나 제도적 뒷받침이 현재 매우 부실한 상황입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폭력성이나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높지 않고 오히려 낮다는 연구 결과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건 관리와 치료가 이뤄질 때 얘깁니다. 환자가 아닌 사람도 사회적 환경에 따라 폭력성과 범죄율이 달라지는데 만성 정신질환자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성 정신질환자는 사회가 책임지고 관리하면서도 인권을 침해하지 말아야 하는 아주 민감하고 어려운 대상의 사람들입니다. 살인범의 병력을 보면 개인이 치료를 하다가 포기하고 사회적으로 방기된 상태에 놓인 것으로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회에 복귀시키면서도 적절한 치료를 개인의 부담을 최소화해서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건 어렵기 때문에 자꾸 이들을 사회의 어두운 쪽으로 몰아 넣고 모르는 척해버리는 것이죠. 정신질환자의 인권과 관리의 균형 사이에서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이런 종류의 범죄에서도 이 부분에 집중하는 반면에 강남역 사건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살인범에게 어떤 의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요소가 있는지 관심 없다고 하셨는데, 저 역시 같은 이유로 살인범의 망상 내용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경증에서는 환자가 실제로 시달리는 내용이 중요하지만, 정신증을 겪는 환자의 경우에는 망상 내용은 환자의 정신병리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해도 살인범이 여자만 특정해서 죽이지 않았으리라고는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텍스트인 성경만 열어봐도 여성혐오에 가까운 내용을 수두룩합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망상 내용을 말한 것으로 보이는 게 거의 확실시 되는데 그 이야기에 온 사회가 집중하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파고드는 것 자체가 그닥 옳은 방향은 아닙니다. 물론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 환기와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에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지구의 핵과 맨틀 정도에 해당하는 코어의 과학적 사실들을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줄리님 같은 분들에게 지금 만성 정신질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얼마나 위험과 생활고에 노출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이 사건의 이슈가 제대로 포커싱되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보입니다. 대단히 사회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의학적인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나는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부분에는 크게 관심없다. 특히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갖기는 싫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단절된 것이 아주 슬픈 일입니다.
제가 댓글 마지막 부분에서 살짝 제 의도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는 발언을 했네요. [결국 쟁점은 범죄의 예방에 있다고 봤을 때 지금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제가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건 가해자가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의 경우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닌가 정도겠죠.] 이 부분에 있어서 제가 말하고자 했던건 이걸로 여혐 범죄라는걸 완전하게 상쇄시킬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면 제가 관심 갖는 유일한 부분은 저거일거다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봐도 도저히 그렇게 읽힐 수가... 더 보기
제가 댓글 마지막 부분에서 살짝 제 의도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는 발언을 했네요. [결국 쟁점은 범죄의 예방에 있다고 봤을 때 지금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제가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건 가해자가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의 경우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닌가 정도겠죠.] 이 부분에 있어서 제가 말하고자 했던건 이걸로 여혐 범죄라는걸 완전하게 상쇄시킬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면 제가 관심 갖는 유일한 부분은 저거일거다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봐도 도저히 그렇게 읽힐 수가 없는 문장이니 완전히 저의 실수죠.
사실 저 댓글을 쓴 동기는 본문 글을 향해서나 특정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대상을 상대로 썼다기 보다는 그냥 이 주제가 인터넷을 강타하고 돌아가는 양상에 쭉 지켜보다가 그에 대해서 한번 제 생각을 정리해본다는 차원에서 쓴 것이었습니다. 리틀미님의 글은 제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요. 댓글에 쓰신 의견에 완벽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걸 사회적으로 여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하는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세련되고 실질적인 주제겠죠. 말씀하신대로 핑커 역시 똑같이 접근 했을 것입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다양한 범죄 확률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그를 관리하는데에서 오는 사회적 비용을 분석해서 옵티멀을 찾아야한다- 정도의 주장을 했겠죠. 저 역시 여기에는 완벽하게 동의하고요.
그런데 '정신분열증'이냐 '여혐' 이냐 논란이 일단 제 기억에는 모두가 이렇게 생산적인 흐름으로 전개되진 않았던 것 같아서요. 오히려 매우 감정적이었고 그를 통해서 제가 원 댓글에서 단 것과 같은 오류가 엄청나게 파생되는 느낌이어서 그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일단 정치권부터가 문제였죠 이 사건은.
사실 저 댓글을 쓴 동기는 본문 글을 향해서나 특정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대상을 상대로 썼다기 보다는 그냥 이 주제가 인터넷을 강타하고 돌아가는 양상에 쭉 지켜보다가 그에 대해서 한번 제 생각을 정리해본다는 차원에서 쓴 것이었습니다. 리틀미님의 글은 제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요. 댓글에 쓰신 의견에 완벽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걸 사회적으로 여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하는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세련되고 실질적인 주제겠죠. 말씀하신대로 핑커 역시 똑같이 접근 했을 것입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다양한 범죄 확률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그를 관리하는데에서 오는 사회적 비용을 분석해서 옵티멀을 찾아야한다- 정도의 주장을 했겠죠. 저 역시 여기에는 완벽하게 동의하고요.
그런데 '정신분열증'이냐 '여혐' 이냐 논란이 일단 제 기억에는 모두가 이렇게 생산적인 흐름으로 전개되진 않았던 것 같아서요. 오히려 매우 감정적이었고 그를 통해서 제가 원 댓글에서 단 것과 같은 오류가 엄청나게 파생되는 느낌이어서 그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일단 정치권부터가 문제였죠 이 사건은.
조현증이 도파민의 과잉 발생으로 뉴런 구조물이 오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걸 프로이트나 심리학쪽 시각으로 본다면 무의식이 의식의 조정 작용 없이 무작위로 수면 위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물론 사회적 맥락에 의해 무의식의 조성에서 특정 관점이나 사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 수 있고, 그러면 저런 무작위 발현에서 겉으로 드러날 확률은 높아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개인의 무의식이 어떤 비율로 구성되어 있는지가 사회현상의 기술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전 흔히 말...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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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증이 도파민의 과잉 발생으로 뉴런 구조물이 오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걸 프로이트나 심리학쪽 시각으로 본다면 무의식이 의식의 조정 작용 없이 무작위로 수면 위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물론 사회적 맥락에 의해 무의식의 조성에서 특정 관점이나 사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 수 있고, 그러면 저런 무작위 발현에서 겉으로 드러날 확률은 높아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개인의 무의식이 어떤 비율로 구성되어 있는지가 사회현상의 기술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전 흔히 말하는 키 크고 몸매 좋은 서구형 미인 분들과 마주할 때 급격한 위축이 일어나는 걸 스스로 느끼는데, 저 자신도 딱히 이 현상에 대한 이유를 모릅니다. 무의식 레벨에서 뭔가 역동이 일으키고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하죠. 그 역동은 리비도일 수도 있고 각인된 공포일 수도 있고 분노일 수도 있을 것인데, 이게 조현증 등으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사건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통상적인 상황 하에서 의식적 레벨에서의 발현 방식과 그 pc여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뭐 이런 경우 방아쇠 역할을 한 요소가 중요한지, 장약이 중요한지에 대해 노동법 법리에서는 결정적 원인설과 상당인과관계설 뭐 이런 식으로 학설 이름을 붙이기도 하더군요.
여튼 간에 (대부분은 책 제목만 보고 욱할 지라도) 도킨스가 역설한 것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은 무의식에 대한 의식적 통제의 가능성이니까요.
그런 고로 전 이 부분에 대한 논의 자체가 비생산 그 자체라고 보긴 합니다. 여성주의 진영이 서울여성노조 같은 활동보다 시선강간의 정의에 몰두하는 걸 옆에서 볼 때와 같은 그런 갑갑함을 느끼게 되요.
예컨대 전 흔히 말하는 키 크고 몸매 좋은 서구형 미인 분들과 마주할 때 급격한 위축이 일어나는 걸 스스로 느끼는데, 저 자신도 딱히 이 현상에 대한 이유를 모릅니다. 무의식 레벨에서 뭔가 역동이 일으키고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하죠. 그 역동은 리비도일 수도 있고 각인된 공포일 수도 있고 분노일 수도 있을 것인데, 이게 조현증 등으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사건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통상적인 상황 하에서 의식적 레벨에서의 발현 방식과 그 pc여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뭐 이런 경우 방아쇠 역할을 한 요소가 중요한지, 장약이 중요한지에 대해 노동법 법리에서는 결정적 원인설과 상당인과관계설 뭐 이런 식으로 학설 이름을 붙이기도 하더군요.
여튼 간에 (대부분은 책 제목만 보고 욱할 지라도) 도킨스가 역설한 것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은 무의식에 대한 의식적 통제의 가능성이니까요.
그런 고로 전 이 부분에 대한 논의 자체가 비생산 그 자체라고 보긴 합니다. 여성주의 진영이 서울여성노조 같은 활동보다 시선강간의 정의에 몰두하는 걸 옆에서 볼 때와 같은 그런 갑갑함을 느끼게 되요.
그런 식으로 보면 안돼요. 단순히 도파민이 과잉되는 것도 아니고요. 정신증은 무의식이나 그런 것과 관계 없고 정신분석은 환자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금기입니다. 상담이나 면담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신역동으로 보면 안된다는 겁니다. 약물치료와 입원치료가 중요해요.
간단하게 신경증과 정신증의 차이인데 신경증은 정신분석을 해도 되고 정신증은 안됩니다. 바꿔 말하면 신경증은 무의식과 관련이 있고 정신증은 없는 것이죠. 우울증이 있는 사람과는 우울한 얘기를 해야 겠지만, 환청을 듣는 사람이랑 환청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거나... 더 보기
간단하게 신경증과 정신증의 차이인데 신경증은 정신분석을 해도 되고 정신증은 안됩니다. 바꿔 말하면 신경증은 무의식과 관련이 있고 정신증은 없는 것이죠. 우울증이 있는 사람과는 우울한 얘기를 해야 겠지만, 환청을 듣는 사람이랑 환청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거나... 더 보기
그런 식으로 보면 안돼요. 단순히 도파민이 과잉되는 것도 아니고요. 정신증은 무의식이나 그런 것과 관계 없고 정신분석은 환자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금기입니다. 상담이나 면담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신역동으로 보면 안된다는 겁니다. 약물치료와 입원치료가 중요해요.
간단하게 신경증과 정신증의 차이인데 신경증은 정신분석을 해도 되고 정신증은 안됩니다. 바꿔 말하면 신경증은 무의식과 관련이 있고 정신증은 없는 것이죠. 우울증이 있는 사람과는 우울한 얘기를 해야 겠지만, 환청을 듣는 사람이랑 환청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거나 망상이 있는 사람과 망상 얘기를 하면 안되겠죠. 정말 환청이나 망상이 무의식의 발현 때문이라면 정신분석이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상당히 기초적인 내용인데 가끔 전문가라고 하면서 매칭이 안되는 분야의 사람을 연결해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더군요. 마치 한센병이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대중적으로 좀 널리 알려져야 되는데 오해만 퍼진 것 같아요.
간단하게 신경증과 정신증의 차이인데 신경증은 정신분석을 해도 되고 정신증은 안됩니다. 바꿔 말하면 신경증은 무의식과 관련이 있고 정신증은 없는 것이죠. 우울증이 있는 사람과는 우울한 얘기를 해야 겠지만, 환청을 듣는 사람이랑 환청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거나 망상이 있는 사람과 망상 얘기를 하면 안되겠죠. 정말 환청이나 망상이 무의식의 발현 때문이라면 정신분석이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상당히 기초적인 내용인데 가끔 전문가라고 하면서 매칭이 안되는 분야의 사람을 연결해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더군요. 마치 한센병이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대중적으로 좀 널리 알려져야 되는데 오해만 퍼진 것 같아요.
아예 의미 없지는 않겠죠. 어떤 실효성 있는 차원에서 논의하는 역량이 부족할 뿐이라고 봅니다. 근데 이런 역량이 부족한게 꼭 여성주의 진영만이 아니라서...
이건 완전한 제 개인적인 가설일 뿐이지만 한국에서 남성/여성 갈등 문제는 어느정도는 남학교/여학교 등처럼 젠더에 따라 사회적으로 같은 생활 공간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심화되는 측면도 저는 있다고 보거든요. 지금과 같은 극단주의적 여초 사이트의 탄생도 사실은 주민등록번호로 관리되는 현 대한민국 인터넷 시스템에서 인위적으로 여성들만 가입할 수... 더 보기
이건 완전한 제 개인적인 가설일 뿐이지만 한국에서 남성/여성 갈등 문제는 어느정도는 남학교/여학교 등처럼 젠더에 따라 사회적으로 같은 생활 공간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심화되는 측면도 저는 있다고 보거든요. 지금과 같은 극단주의적 여초 사이트의 탄생도 사실은 주민등록번호로 관리되는 현 대한민국 인터넷 시스템에서 인위적으로 여성들만 가입할 수... 더 보기
아예 의미 없지는 않겠죠. 어떤 실효성 있는 차원에서 논의하는 역량이 부족할 뿐이라고 봅니다. 근데 이런 역량이 부족한게 꼭 여성주의 진영만이 아니라서...
이건 완전한 제 개인적인 가설일 뿐이지만 한국에서 남성/여성 갈등 문제는 어느정도는 남학교/여학교 등처럼 젠더에 따라 사회적으로 같은 생활 공간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심화되는 측면도 저는 있다고 보거든요. 지금과 같은 극단주의적 여초 사이트의 탄생도 사실은 주민등록번호로 관리되는 현 대한민국 인터넷 시스템에서 인위적으로 여성들만 가입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은 것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겠죠. 그리고 사회제도로 인해서 이러한 갈등이 심화되는건 가장 대표적으로 군대가 있죠. 예를 들어 여자가 군대를 간다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대가(세금이든 봉사활동이든) 등을 지불한다면 지금보다는 덜 첨예해지는 효과가 어느정도 있을거라고 봅니다. 이러한 다양한 가설들을 검정을하고 비용을 계산하고 그를 토대로 구체적인 사회적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점을 내놓는게 위에서 제가 말한 역량 안에 들어가겠죠. 다만 그런 차원으로 나아가질 못하니까 거기서 오는 답답함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완전한 제 개인적인 가설일 뿐이지만 한국에서 남성/여성 갈등 문제는 어느정도는 남학교/여학교 등처럼 젠더에 따라 사회적으로 같은 생활 공간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심화되는 측면도 저는 있다고 보거든요. 지금과 같은 극단주의적 여초 사이트의 탄생도 사실은 주민등록번호로 관리되는 현 대한민국 인터넷 시스템에서 인위적으로 여성들만 가입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은 것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겠죠. 그리고 사회제도로 인해서 이러한 갈등이 심화되는건 가장 대표적으로 군대가 있죠. 예를 들어 여자가 군대를 간다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대가(세금이든 봉사활동이든) 등을 지불한다면 지금보다는 덜 첨예해지는 효과가 어느정도 있을거라고 봅니다. 이러한 다양한 가설들을 검정을하고 비용을 계산하고 그를 토대로 구체적인 사회적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점을 내놓는게 위에서 제가 말한 역량 안에 들어가겠죠. 다만 그런 차원으로 나아가질 못하니까 거기서 오는 답답함 아닐까 싶습니다.
성을 기준으로 구분 적용되는 시스템이 문제가 된다는 의견에 매우 동의합니다. 아주 미소한 것으로는 출석번호를 나누어 매기는 것부터도 시작하겠죠. 사안을 매번 그 기준으로 나누는 데에 익숙해지니 문제가 터지면 다른 시각보다는 그냥 맨날 쓰던 기준을 가져다 쓰는 게 사고체계 상 편해져 버리니까요. 거기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대단위의 집단 사고도 한몫 단단히 거들게 되고, 공통 경험의 차이가 그걸 다시금 강화하겠죠.
사실 이건 그냥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 부수적 속성을 개인의 본질로 보는 나쁜 습관에서 모두 비롯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동성애 문제처럼요.
사실 이건 그냥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 부수적 속성을 개인의 본질로 보는 나쁜 습관에서 모두 비롯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동성애 문제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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