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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6/20 20:14:30
Name   nickyo
Subject   정유정 신작 종의 기원을 읽고(스포없음)



정유정 작가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 에 이어서 이번에 새로 나온 종의 기원을 읽었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악을 깊이 탐구하고 그걸 그대로 자신이 '나'가 되어 몰입해 쓰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정유정의 과거 소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유정은 지독히도 꾸준히 '악인'의 질에 탐닉해온 소설가입니다. 그런면에서 전작들의 악인들도 굉장히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잘 표현해냈었기에 이번 작품에 기대를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보다 몰입이 잘 되는 소설은 아니었어서 읽는데는 오래 걸렸고, 중반 이후로 사건이 위기 절정의 흐름을 지나는 동안에는 정유정 특유의 서사를 풀어내는 완숙한 솜씨 덕에 재밌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다 넘기고 났을 때, 아쉬운 점이 많이 남았습니다. 일단 정유정의 소설에 이런걸 바랬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어요. 90년대 이후 일본 사소설과 80년대 사회적 운동, 냉소와 비관 같은 것들이 섞인 한국 현대소설들 사이에서 사소설의 가벼운 느낌을 피해가면서도 묵직한 서사를 몰입도 있게 끌고나갈 수 있는 재능이 독보적이었으니까요. 그런면에서 이번 책은 작가적 욕심이 굉장히 컸던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사람을 서사에 깊게 끌고 들어가는 역량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인물에 훨씬 더 깊게 들어가려는 시도를 한 것 같아요. 반은 성공이고, 반은 실패가 아닐까 감히 생각합니다.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고 말하려니 어렵네요. 감탄했던 점이 있다면, 보통 선악구도의 영향아래 캐릭터를 만들고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한 캐릭터를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일관성을 유지시키기가 쉽지 않은데, 그걸 아주 잘 해냈습니다. 적어도 얘가 왜 이래? 같은 부분이 없었어요. 사실 프로 소설가에게 바라는 가장 기초적인 덕목인데 실제로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캐릭터가 중간중간 붕괴하는 부분이나 상황을 다양성 따위로 묶어내 버리는 유행이 썩 만족스럽지도 않고요. 그런면에서 그런 부분을 잘 지켜줘서 좋았어요. 그리고 묘사나 서술의 형식이랄까, 문장과 단어의 배치도 매우 매력적이었는데, 숨이 멎어들어갈것 같은 긴장감이다 몸을 조여오는 공포, 고독, 스산함 같은 것들을 단어의 길이나 묘사의 치환, 쉼표와 마침표의 배치를 통해서 아주 잘 표현했다고 느꼈어요. 글자를 읽는 과정이 연출처럼 느껴졌죠. 이런 부분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죠.


그렇지만 역시 위의 아쉬운 부분에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악'에 침잠한다는건 사실 한 물 간 유행같은 느낌이잖아요. 악이 다변적이고 중층적이란는것도, 선악을 해체적으로 접근하고 자본주의적 인간관을 투영해서 뜨겁고 차가운 온도를 부여하는것도 좀.. 진부하죠. 이미 이런 시도는 시도될만큼 시도되었고, '근대로의 회귀' 혹은 '근대의 재구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굳이 악을 깊이 파고든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캐릭터가 무너지지 않고 서사의 아귀가 잘 맞고, 묘사와 형식이 아름답다고 한들 핵심적인 주제와 내용이 진부한 느낌이에요. 전형에 가까워서 충격을 느낄 수가 없는? '악'의 인물상이나 장르에 맞는 표준을 이야기하자고 하면 분명히 좋은 예시가 될 것 같지만, 2016 신인 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이 아니라 정유정 신작이잖아요. 그게 좀 아쉽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자체는 꽤 읽을만해요. 하지만 7년의 밤이나 28을 기억하며 기대하는건 손해보는 짓이에요. 부디 정유정이 이제 '나쁜것'에 대한 덕질을 좀 참아줬으면 하는 바램도 들었어요. 아, 그리고 사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고 나서 거의 바로 이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의 주제도 살인과 사이코패스와 정신병이 같이 제재가 엮여있어요. 그래서 출판사도 홍보를 거의 못한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정유정 정도 되는 작가의 신작이라도 시기가 마케팅이 거의 불가능했을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그래도 이 책은 인간 내면의 악과 악에대한 판단, 악에대한 인식, 악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와 악이 사회속에서 점화되는 모습들을 능숙하게 날 것 그대로 잘 보여줬어요. 보여주는 것 자체로도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악에 대한 관점을 한번 더 새롭게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읽은 소설책이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선풍기+수박+아이스커피+소설책 조합으로 쉬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여름에 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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