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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7/23 22:53:47 |
Name | 선비 |
Subject | 백윤식을 용납하기 위해서 |
백윤식을 용납하기 위해서. 팟저님의 “우리는 백윤식을 용납해야하는가(https://redtea.kr/?b=3&n=3330).”에 대한 글입니다. “우리는 백윤식을 용납해야하는가.”는 잘 구성된 글이다. 흥미로운 비유를 통해 독자의 관심을 끌고 수사학적 질문으로 잠정적 결론을 낸다. 그리고 몇 가지 근거를 통해 논지를 강화하고 끝단에는 결론을 한 번 더 강조하며 마무리한다. 그러나 구성의 깔끔함에 비해 논리적으로는 큰 비약을 가지고 있는 데 이 글에선 크게 두 가지 근거를 통해 해당 글의 논지에 대해 비판할 생각이다. 우연의 오류와 역도 우연의 오류 일반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에 일반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나, 이와는 반대로 특수한 경우에만 참인 것을 일반적인 경우에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경우를 말한다. 특히 후자를 가리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부른다(출처: 나무위키). 이건 그냥 가정이다. 백윤식이라는 배우가 있다. 그가 알코올을 섭취한 후, 운전중 교통사고를 냈다. 혈중알코올농도는 훈방조치에 해당되었고, 백윤식은 그 즉시 경찰에 신고를 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고라니는 경상을 입어 동물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에 대해 동물애호가 네티즌들의 비난이 있었지만 백윤식 씨는 곧 스크린으로 복귀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그냥 가정이다. 또, 조형기라는 배우가 있다. 그도 술을 마시고 교통사고를 냈다. 혈중알코올농도는 만취 상태에 해당되었고, 음주음전사고의 피해자가 된 여성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조형기는 그 자리에서 시체를 유기한 후 차에 올라탔으나 그대로 잠들어버려서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이 사건에 대해서 페미니스트 네티즌들의 비난을 받은 조형기 씨는 그러나 곧 스크린으로 복귀했다. 서론에서 작자는 백윤식이 일베 영화에 출연했다는 무리한 가정을 하고 이 비유적 영화와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실제 영화의 사례를 동일시한다. 일견 이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영화고, 검증되지 않은 루머가 섞여있으며, 어느 한쪽의 시각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인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라는 말이 있다. 독일 건축가인 루드비히 반 데어 로에(1886~1969)는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말은 디테일, 즉 세밀한 부분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구(警句)로 쓰이는 말이다. 디테일을 무시하자 논리의 곡예가 벌어진다. 똑같이 음주운전 사고는 맞다. 그러나 백윤식 복귀를 주장하기 위해선 우리는 조형기의 복귀를 함께 주장해야 하는가? 글은 이 부분을 교묘하게 동치 시킨다. 그러나 박정희는 노무현이 아니고, MC현무는 김윤아가 아니고, ‘운지의 꿈’ 또한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니다. 두 고인(故人)의 대한 평가부터 시대, 연출의 적절성까지 전혀 다른 두 가지 경우이다. 적어도 하나를 허용하려면 다른 하나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사례의 다름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작자도 이 부분의 비유가 완벽하다지는 않다는 걸 아는지 몇 가지 단서를 단다. 그리고 각각이 자신들의 소재 및 배경을 형상화하는 정도의 차이 역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영화마다 어느 의견이 부당하고 무엇이 정당한지에 대한 기준이 갈리겠죠. 하지만 ‘운지의 꿈’이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불편한 노래인 만큼,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지지자에게 불편할 영화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이 되었건, 어떤 작품에 걸린 민감한 정치성으로 인해 그 매체에 참여한 배우에 대한 여론이 결정되며, 그 여론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제작자로 하여금 특정 배우를 반려할 정도가 된다면, 전 그 사회를 도저히 건전한 사회라고 말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글의 말미 즈음에서 비슷한 주장이 이어진다. 아르바이트를 뽑는 PC방 사장이 있고, 구직자에게 페이스북 주소를 요구하는 기업이 있고, 직원의 블로그를 감찰하는 회사가 있으며, 그리고 넥슨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과연 여러분은 어디쯤 ‘선’을 그을 생각이신지요. 그리고 그 ‘선’을 어떻게 정당화할 생각이십니까. 이쯤되면 유명한 오류의 이름이 하나 떠오를만하다. 그렇다. 전형적인 미끄러운 비탈길의 오류(Slippery Slope)다. 사실 이러한 오류의 예는 보기 어렵지 않다. 동성애자는 AIDS 보균자들이 되기 십상이고, 사드 배치를 반대하면 종북주의자가 되는 세상 아닌가. 간단히 답해보자. ‘선’은 존재해야한다. ‘선’을 긋는 것은 사람이다. '선'을 정당화하는 것은 논리와 합의이다. 무에타이 선수가 “뺨 클린치도 위험한데 음경을 치는 것은 왜 안 되냐”고 물어선 안 되는 건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선’은 해양경찰이 아니다. 잘못됐다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 그으면 된다. 계속 보자. 그리고 우리 모두는 모두 어떤 부분에선 다들 이 사회가 표준으로 제시하는 건전성을 어기고 있습니다. 아, 어떤 분은 아니라고요. 축하합니다. 하지만 전 그렇습니다. 전 수간물을 즐겨봤고 ‘운지의 꿈’을 들으며 웃어봤고, 장동민의 팟캐스트를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옹달샘을 하나의 문화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아쉬웠습니다. 전 패드립을 즐겼고 살면서 패드립도 많이 쳐봤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로 제 커리어에 타격이 오는 건 원치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야겠네요. 아직 김자연이 어떤 타격을 받을진 구체화된 게 없으니까요. 타격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고 싶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 비겁한 놈입니다. 자기가 건전치 못한 놈인데도 그로 인해 따라올 사회적 무게는 회피하고 싶어하니까요. 하지만 전 이렇게 비겁한 놈이 저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매갈 옹호에 대한 네티즌들의 불매 의사가 기업의 직원에 대한 사생활 침해가 됐고, ‘이 사회가 표준으로 제시하는 건전성을 어긴’ 것들의 대표가 됐다. 전부 ‘선’이 없어서 생긴 일이다. 우연의 오류와 미끄러진 비탈길의 오류를 범한 예가 바로 무분별한 미러링이다. 뺨 클린치가 허용된다고 해서 음경을 가격해도 된다는 게 아니고(다른 사람이 먼저 했다고 해서 괜찮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게 덜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 성폭행범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성매매에 반대해야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르게 대하면 될 일이다. 정리하자. 백윤식을 용납하고 말고는 개인의 선택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한 의견은 따로 밝히면 될 일이다. 그러나 백윤식을 용납하기 위해서 조형기를 용납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말자. 그것을 ‘같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겁한 일이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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