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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04 23:12:09
Name   민달팽이
Subject   장미 세 송이
술맛도 모르고 입에 털어넣기 바빴던 스무 살 언저리의 난 취하기만 하면 찔찔 울곤 했다.
그 날은 성년의 날에 남자친구한테 달랑 꽃 한 송이 받았다고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그저 술 한 잔 사달라고 했던 신입생 앞에서.

그 아이의 첫인상은 미안하지만 꼭 노숙자같았다.
귀 뒤로 넘길 수도 있을 만큼 치렁치렁 긴 머리에 코 밑과 턱이 수염으로 이어져 있는 얼굴로 긴 동아리방 의자에 기대어 누워있었으니.
새로 가입한 신입생이라는 믿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시덥잖은 통성명을 나누고 맞은 편에 앉으려는데
대뜸
선배는 남자친구 있어요?
-네. 있어요.
그럼 내가 꼬시면 되겠네요.
-남자친구 있다니까요?
그러니까요.

이 무례한 애는 뭐지? 어이가 없어서 쏘아보려니 정작 말한 본인은 생글거리며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며칠 후 개강총회에서 만난 그 애는 조금 달라져있었다.
말끔하게 머리와 수염을 자른 모습을 보니 그제서야 눈, 코, 입, 그리고 웃는 입매의 보조개가 눈에 쏙 들어왔다. 눈인사를 건네자 슬쩍 옆자리로 오더니만 내 핸드폰에 자기 번호를 찍고선 종알댄다. 선배, 밥 사주고 싶을 때 연락해요. 아니면 안사주고 싶을 때 연락해도 되고요. 라며. 능청스레 씩 웃던 입가에 나도 모르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후 몇 주 뒤 나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 날 수업이 끝날 무렵 그 아이에게 문자가 왔다. 선배 술 한 잔 사줄래요?ㅋ



대화도 몇 번 나눠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앞에서 울고 있으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럼에도 잠자코 내 얘기를 듣던 그 아이는 내가 우는 동안 남은 술을 다 비우고서 데려다줄테니 그만 울고 이제 가자고 말하며 먼저 일어섰다.

술집을 나서서 전철역으로 한참을 말없이 비틀비틀 걸어가는데 갑자기 뭘 놓고 왔다며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멍하니 쳐다보다가 취기가 올라 힘들어가지고 쪼그려앉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꾸벅꾸벅 졸고 있으려니 갑자기 눈 앞에 장미 세 송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던 파란 색 장미 꽃.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내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꽃만 내 얼굴 앞에 들이대고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주면 서럽다니까 두 송이사려다가 그냥 마음담아 세 송이 주는거야. 빨간 거 보다 파란 게 예뻐보여서 이거 샀어.

거짓말처럼 술기운이 다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울음도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정신차리고 꽃을 받아들고서는 그 애의 손을 잡고 무작정 눈에 보이는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주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나와. 취하지도 서럽지도 않았는데도 또 울음이 터졌다. 훌쩍거리는 내 숨결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배 쪽에 스르륵 들어오는 차가운 손의 감촉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야아... 너무 빠르잖아...!! 흐엉헝.....
나는 그렇게 또 한참을 찔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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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울면 어떡해요...
  • 풋풋해서 좋아요
  • 이런 풋풋한 글은 역시 추게에 박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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