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2/16 17:14:09
Name   민달팽이
Subject   딸바보와 바보딸
쿨쩍. 싸늘한 새벽공기와 입가의 축축한 느낌에 잠에서 깬다. 하도 무거워서 덮으면 가위눌릴 것 같은 그 이불이 또 내 코까지 엎어져 있어. 몇 년을 한결같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일기예보가 나온 날에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잠을 깨곤 한다.

아빠는 유별스럽기로 유명했다. 유별스럽게 예뻐했으면 모르겠는데 내 기억에 아빤 그냥 유난스러웠다.

대학 신입생 오티에서 몇 학번 선배라며 마주앉아 소주잔을 내밀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이걸 내가 따라야 하는 건가. 머릿속엔 아빠 말씀이 맴돌았다. 아람아, 여자는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는 게 아니야. 나중에 커서 결혼 할 사람한테나 하는거지. 늘 스스로 잔을 채우시며 말씀하시던 아빠. 어색하게 잔을 채우고 대충 넘어갔지만, 그 때의 불쾌감은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내가 꼭 아빠를 실망시킨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내내 얹혀 있었다. 그런 불편한 기분을 당시에는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덮어버렸다. 내 잘못이 아니야. 이건 아빠가 유별스럽게 나를 키워서 그런거야. 골목 앞 친구집에서도 외박 한 번 못하게 하고, 밤늦게 연락이 없으면 받을 때 까지 전화하던 우리 아빠. 아빠 때문이야. 한 번은 전철이 끊길 때 까지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다가 전화를 해서 친구집에서 자고 내일 가겠다고 슬쩍 말을 꺼냈더니 아빤 어디냐고 묻고서 곧바로 차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왔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아빠였다.

그럼에도 참 많이도 대들었고 싸웠다. 성인인데 왜 통금시간이 있어야 하나, 통학하는데 10시가 말이 되나, 치마도 아니고 바지인데 이걸 왜 못 입고 다니게 하는지, 이렇게 날 숨막히게 하면 그냥 나가 살겠다 등등... 아빠를, 집을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철없고 어렸던 나.  

그렇게 온갖 싸움을 하며 지켜주려 애썼던 딸이 원하지 않는, 안좋은 일을 겪게 되면 어떨까. 아빤 어땠을까. 전화로 기간을 다 못 채우고 돌아가겠다고하니 왜? 무슨 일 있어? 묻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그냥 울고, 울었고, 우느라 아무 말도 못했다. 왜 그래. 일단 얘기해봐. 무슨 일이야. 계속 내 말을 기다리는 엄마. 그래 네가 힘들면 그렇게 해. 비행기 예약하고 시간 알려줘. 수화기를 낚아챈 듯한 아빠의 목소리에 전화는 끊어졌고 나는 차마 다시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엄마에게만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말씀드렸다. 엄마는 내게 바보같다고 했다. 아빠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직접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동안 그 일은 잊고 지냈다. 아니 한 쪽에 구겨두고 지냈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다니던 학교를 조용히 졸업하고 적당히 취업을 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이것도 사회생활이라면 견뎌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출근하는 아침마다 얼굴이 흙빛이 되어 구역질을 하던 날 보고서 엄마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셨던 모양이다.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고서 치료를 받았다. 고작 그 몇 개월 때문에 몇 년 동안을 잘 먹지도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나만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을 엄마는, 아빠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다시 힘들게 시작한 사회생활을 또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내 말에
그래, 아빠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아빠가 도와줄거니까.
아람아.
아빠는 널 위해 심장도 줄 수 있어. 너는 내 딸이니까.
술냄새 풀풀 풍기며 내 어깨를 두드리는 딸 바보 우리 아빠.  참아도 참아도 계속 눈물이 나와서. 콧물삼키며 겨우 내뱉은 한 마디
아빠 죄송해요.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는 바보 딸이라 미안해.  

어렸을 때는 아빠가 시집 가지말고 아빠랑 살자. 하면 나는 항상 아냐! 시집 갈거야! 이랬다던데. 얼마 전에는 네, 아빠 그렇게 같이 살까요? 라고 대답했더니 아무 말 없이 씩 웃으시며 소주잔을 내게 내미셨다. 나 대신, 아빠 대신 술병이 울어주었다.
꼴꼴꼴.
꼴꼴꼴
꼴꼴꼴....
ㅠㅠ



22
  • 엄마아빠보고싶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939 일상/생각지난달 학폭으로 세상의 떠난 친구의 딸 사건이 뉴스로 보도되었습니다. 2 큐리스 23/06/03 5753 9
683 일상/생각한 폭의 그림같은 직장 이야기 #2 13 No.42 15/07/30 5754 0
2286 댓글잠금 기타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공지 어기지도 않고 수칙 다 지켜가면서 활동했는데 어이없이 영퇴됐네요. 76 klaus 16/02/24 5754 0
2338 영화한국 넷플릭스에서도 하우스 오브 카드 보여줍니다 10 리틀미 16/03/04 5754 0
2612 정치문재인 v 안철수가 막장으로 가지 않으려면 33 리틀미 16/04/14 5754 0
4321 일상/생각게임회사 다닌지 7년째, 처음으로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6 arch 16/12/07 5754 7
4710 여행피렌체 소녀(완) 10 여름 소나기 후 17/01/27 5754 4
8045 기타유머게시판 업로드 2 김치찌개 18/08/12 5754 4
10345 스포츠[사이클] 결국 선수 중 확진자 발생... 2 안경쓴녀석 20/03/04 5754 3
11599 IT/컴퓨터우리도 홍차넷에 xss공격을 해보자 19 ikuk 21/04/20 5754 14
871 기타딥 스프링스 대학 - 또다른 컬트 혹은 간지... 6 새의선물 15/08/31 5755 1
8137 기타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는"끽끽" 소리가 아니다. 핑크볼 18/08/29 5755 4
10636 일상/생각비혼이라는 설익은 거짓말 13 sisyphus 20/06/01 5755 4
11603 경제한국 홈쇼핑/백화점/대형마트/쇼핑몰/온라인 수수료 정리 1 Leeka 21/04/21 5755 1
3073 정치일본의 법 집행 관례 48 눈부심 16/06/20 5756 0
12390 정치국힘은 후보교체를 할 수 있을까요? 43 Picard 21/12/30 5756 1
13106 정치이재명과 이낙연에 대한 그냥 그런 생각(수정) 43 셀레네 22/08/24 5756 0
2029 기타[불판] 잡담&이슈가 모이는 홍차넷 찻집 <6> 78 위솝 16/01/15 5757 0
10074 일상/생각아픈 것은 죄가 아닙니다. 27 해유 19/12/13 5757 29
12634 경제갤럭시워치4 30% 할인 쿠폰 판매 15 면이면옥 22/03/15 5757 0
12994 기타영어능통자와 관련한 제 생각 11 redtea_first 22/07/12 5757 4
4166 정치[불판] JTBC 뉴스룸 16 Toby 16/11/16 5758 0
4396 기타딸바보와 바보딸 27 민달팽이 16/12/16 5758 22
7448 게임디비니티 오리지널 씬2 한패를 기다리며, DOS:EE 리뷰 6 Weinheimer 18/04/27 5758 2
2140 정치증거도 없이 파업배후로 몰려 해고된 MBC PD, 기자들 6 Toby 16/01/29 5760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