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1/17 16:37:47
Name   고양이카페
Subject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2017년 1월 16일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1월 2주차 : 자유주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시작은 조바심이었다. 유년시절 동안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앞에 강건한 모습으로 서 계셨고 난 그의 그림자 속에 갇혀있었다. 하지만 대학 합격발표 후 첫 등록금을 낼 시기에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마주했다. 처음으로 그의 주름을 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슬픈 시간을 보았다.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동시에 나는 나를 보았다. 동시에 불과 몇분전까지 우쭐하던 내 모습을 보았다. 동시에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찾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의 축 처진 어깨에서 긴 시간 속에 풍화된 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아, 아버지도 한때는 젊고 찬란한 소년이었으리라.
그 날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시간은 유년시절을 벗어나기 위한 순풍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잡이였다. 발전과 가능성이 나의 단어였고 청춘을 찬양하는 문학작품을 믿었고 희망찬 미래를 성취한 위인들의 명언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마법처럼 시간은 맹렬한 폭풍으로 돌변했다. 시간은 내게 수많은 선택들을 강요해왔고 나는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빛나는 미래를 약속할 것만 같았던 나의 선택은 언제나 가능성을 살해하고 차가운 결과만을 남겼다. 해가 지날수록 선택해야하는 주기가 점차 짧아졌다. 낙관적인 생각에 속고 비관적인 생각에 꾸짖음 당하며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가능성의 무덤들 앞에서 나는 후회와 반성을 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교복과 양복 사이 어딘가의 시간 속에서 점점 나도 그렇게 풍화되어간다고 느끼고 있었다.
역시 이건 두려움이다. 쉼 없이 걸어온 발걸음은 아직도 목적지 없이 그저 앞으로 내디딜 뿐이지만 언젠가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수 있는 마음속 작은 징표를 남기고 싶었다. 시간과 선택의 어두운 숲길을 헤매어 죽어버린 나들의 묘지에 빠지더라도 새하얀 조약돌 하나 둘 놓여져 있다면 그들 앞에 나 당당히 살아남았다 말할 수 있으리라. 오늘은 그 날 아버지의 눈동자 속에서 본 시간의 깊은 슬픔과 남겨진 자의 형형한 광채를 나의 첫 조약돌에 담아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그 날의 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를 찾길 바란 걸까 찾지 못하기를 바란 걸까.



- 금년부터 수필을 작성하는 소모임에 가입하였습니다.
- 매주 간단한 수필을 한 편씩 작성하는데 홍차넷에도 종종 올려서 홍자클러 여러분들의 엄중한 평가를 기다리겠습니다 :)



5
  • 수필 추천 필수
  • 아버지가 되어가는 길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30 일상/생각나는 다시 살을 뺄 수 있을까?? 29 원스 19/11/26 4809 0
12003 일상/생각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4 lonely INTJ 21/08/22 4332 7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1536 17
3452 IT/컴퓨터나는 다녀왔다 용산던전을 22 Raute 16/08/05 5810 3
12629 일상/생각나는 네 편 9 머랭 22/03/15 3924 39
2996 일상/생각나는 너보다 늦었다. 2 No.42 16/06/11 3847 7
10556 일상/생각나는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9 켈로그김 20/05/06 4181 31
10648 일상/생각나는 나와 결혼한다? 비혼식의 혼돈 15 sisyphus 20/06/03 5453 0
4643 일상/생각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11 고양이카페 17/01/17 3980 5
11849 일상/생각나는 그 공원에 가지 못한다. 3 Regenbogen 21/07/06 3288 15
8086 음악나는 광속으로 너를 잃어갔어 9 바나나코우 18/08/21 4183 3
2598 일상/생각나는 과연 몇번에 투표를 해야하는가. 4 소노다 우미 16/04/12 3795 0
8763 게임나는 BL물을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관심이 없는건가? 6 덕후나이트 19/01/14 5091 0
13341 기타나눔 - 서리태 31 천하대장군 22/11/22 2706 13
1349 일상/생각나누는 사회 - 크랙스 리스트 5 까페레인 15/10/26 8511 0
781 음악나나 무스꾸리 - 젊은 우체부의 죽음 7 새의선물 15/08/12 6438 0
9639 정치나경원 아들, 고등학교 시절 논문 1저자 등재 논란 23 ArcanumToss 19/09/08 6392 0
13636 일상/생각나 젊을때랑 MZ세대랑 다른게 뭐지... 31 Picard 23/03/13 4216 11
1178 일상/생각나 자신 13 절름발이이리 15/10/05 7703 0
2910 일상/생각나 이제 갈 테니까 말리지 말라고 10 王天君 16/05/28 5106 3
4870 일상/생각나 이런 여잔데 괜찮아요? 33 진준 17/02/15 5104 6
13527 일상/생각나 왠지 이 여자랑 결혼할꺼 같아... 10 큐리스 23/01/31 3295 5
7440 사회나 오늘 설거지 못하겠어! 4 사나남편 18/04/26 5786 6
2725 일상/생각나 역시 꼰대가 되었다. 4 쉬군 16/05/01 3373 1
14076 과학/기술끝판왕급 계산기 사용기 9 copin 23/07/30 2809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