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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3/05 03:17:02 |
Name | Liebe |
Subject | 엘리트 사회의 철학적 빈곤 |
사회가 잘 운영될려면, 파워 엘리트 트랙에 있는 분들이 우리나라 사회를 걱정하고 커뮤니티를 위한 생각이 있는 분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은 이들은, 치열하게 머리가 좋으면서도 저 트랙에 있으면서도 미국 부자, 혹은 서양 엘리트의 배금주의 세계와 비교를 합니다. 엘리트 사회의 철학빈곤이 기형적인 사회/갑질하는 사회를 만드는것에 큰 기여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안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개인의 가치정립 기초? 완성?을 이루는 단계에 철학과 인문학 혹은 커뮤니티 봉사와 같은 실질적인 노블리제 오블리제에 대한 사상주입을 맹렬히 시키지 않는다면 언제나 부패된 사회에 시름하는 건 일반 서민들일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왜 봉사하는지 커뮤니티에 대한 봉사를 하는지 의미를 이해 못하는 아이들의 부모, 그리고 학생, 교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엄마가 뜨개질을 해서 아이의 봉사시간을 채우게됩니다. 그 기본기저에 깔린 철학을 이해못하고 한국/미국 입시준비를 하는 대치동 강남 엄마들을 만나게되는데요. 그렇지만, 가끔은 미국/한국의 엘리트 지도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사회기본을 닦고 세우기위해서 노력한 흔적들을 만나게되면 흥분이됩니다. 우리나라는 파워앨리트 트랙에 배제된 분들은 경험에서 나온 공감능력때문이지 몰라도 오히려 남을 생각하고 이웃을 배려하면서 헌신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 모든 도덕적인 가치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moira 님께서 보여주신 82 cook 링크에는 두 부부관계를 떠나서 생각해 볼점은, 가정이 바로설때에 커뮤니티 혹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모두 혜택을 받는 것 같아요. 가정에서의 가치정립이 바로 서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회가 바로설까요? 대치동 엄마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엄마들이 변화하면 아이들도 변화하고 사회가 변화할까요? 이 엘리트 엄마들을 대치동으로 내몰고 나의 자녀만 생각하게 하는 풍토를 멈추기위해서는 많은 사회의 노력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의 철학적 부족이 결국 자녀들에게도 철학의 부족을 가지고 오지 않게 하느냐하는 생각도 잠시 듭니다. 검색하니 나라 두동강낼 엘리트 카르텔이라는 글이 보이네요. 이 분 뒤에 하실 말씀 많으셨는데 글을 땡깡 자르신 느낌이 들어요.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notek&list_id=1495637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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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말고 다른 것도 더 권력 있는 자들에게 더 요구되는 건 당연한 것이나, 그런 가치관을 형성시키는 단계에서 그것이 예비 엘리트를 지정해 이루어지는 건 곤란하다는 겁니다. 한국이 영미 마냥 엘리트들끼리 모인 사립학교에서 따로 교육받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기능할 수도 없고요. 근본적으로 엘리트에게 높은 도덕적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대중 또한 그만큼 높은 도덕적 가치를 함양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중이 부패한 사회에서 교육 받은 엘리트들만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잘 지킬 수 있으라 믿는 건 판타지입니다. 그냥 도덕적 기준이 높거나 낮은 사회가 있는거지, 엘리트만이 따로 노는게 아니란 거죠.
글에 오해가 있나봅니다. 꼭 타겟을 예비 엘리트만을 대상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비슷한 공교육을 받고 있으니, 한 그룹만 나눠서 교육시킨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나의 성공이 나만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전체적인 긴밀한 유기적인 협조하에서
성공을 하게 된다는 가치관 혹은 나의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우리 교육에서 얼마나 논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는
엘리트라면 혹은 일반인이라면 어찌 타인을 배려하지 않겠냐 혹은 이타주의를 행하지 않겠... 더 보기
모든 이들이 비슷한 공교육을 받고 있으니, 한 그룹만 나눠서 교육시킨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나의 성공이 나만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전체적인 긴밀한 유기적인 협조하에서
성공을 하게 된다는 가치관 혹은 나의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우리 교육에서 얼마나 논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는
엘리트라면 혹은 일반인이라면 어찌 타인을 배려하지 않겠냐 혹은 이타주의를 행하지 않겠... 더 보기
글에 오해가 있나봅니다. 꼭 타겟을 예비 엘리트만을 대상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비슷한 공교육을 받고 있으니, 한 그룹만 나눠서 교육시킨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나의 성공이 나만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전체적인 긴밀한 유기적인 협조하에서
성공을 하게 된다는 가치관 혹은 나의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우리 교육에서 얼마나 논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는
엘리트라면 혹은 일반인이라면 어찌 타인을 배려하지 않겠냐 혹은 이타주의를 행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대중이 부패하고 사회가 부패하지만서도 올곧게 가는 이들이(일반인포함) 더 많이 양상되었음 하는 바램이섞인것 같아요.
판타지라면 참 씁쓸하지요.
모든 이들이 비슷한 공교육을 받고 있으니, 한 그룹만 나눠서 교육시킨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나의 성공이 나만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전체적인 긴밀한 유기적인 협조하에서
성공을 하게 된다는 가치관 혹은 나의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우리 교육에서 얼마나 논의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는
엘리트라면 혹은 일반인이라면 어찌 타인을 배려하지 않겠냐 혹은 이타주의를 행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대중이 부패하고 사회가 부패하지만서도 올곧게 가는 이들이(일반인포함) 더 많이 양상되었음 하는 바램이섞인것 같아요.
판타지라면 참 씁쓸하지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언급하셔서 한 얘기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말 부터가 귀족st 고, 영미에서 이게 살아남은 이유도 현대식 귀족가문 애들을 사립학교에 가둬 놓고 가르치는 베이스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게 작동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 사회에 대한 영향이나 사회와의 유기적 관계를 고려한 행태라서보단, 그네들의 매너나 격식 같은 개념으로 판단합니다. 그런게 이미 작동하고 있으니 나중에 거부/엘리트가 되는 이들도 그 관행에 편입되는 거고요. 일반 시민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잘 가르쳐서 작동하는게 아니란 얘기죠. 근데 그래서 그게 한국에서 가능하냐고 하면,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애초에 긍정적인지도 의문이거니와..
본문에 있는 타임라인 글은 (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25587)예요. 어떻게 링크하는지 몰라서 더듬거렸네요. 타임라인 글을 안 보신 분들은 댓글까지 연결해서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으실 듯해요.
부르디외라는 학자는 우리들에게 내면화 되어있는 성향들의 체계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에토스라고 해요. 이는 일상의 행위를 결정하는 도덕의 의식적이지 않은 내면화된 형식이에요. 논... 더 보기
부르디외라는 학자는 우리들에게 내면화 되어있는 성향들의 체계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에토스라고 해요. 이는 일상의 행위를 결정하는 도덕의 의식적이지 않은 내면화된 형식이에요. 논... 더 보기
본문에 있는 타임라인 글은 (http://redtea.kr/pb/view.php?id=timeline&no=25587)예요. 어떻게 링크하는지 몰라서 더듬거렸네요. 타임라인 글을 안 보신 분들은 댓글까지 연결해서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으실 듯해요.
부르디외라는 학자는 우리들에게 내면화 되어있는 성향들의 체계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에토스라고 해요. 이는 일상의 행위를 결정하는 도덕의 의식적이지 않은 내면화된 형식이에요. 논증을 거쳐 명시화/법규화된 이론적 형식인 윤리와는 달라요. 에토스는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말도 일종의 행동으로 보고!) '실천적 상황'에서 원칙과 가치를 제공해줘요. 이러한 에토스는 1차 사회화 기관인 가정과, 2차 사회화 기관인 학교를 통해 우리에게 습관으로 누적된다고 해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책에는 습관으로 누적된다는 문장에 대한 재미있는 예시가 나와있더라고요.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인은 개인주의를 신봉한다. 모든 인간은 개인이며, 그 가치는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개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눈부신 빛이 우리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선생과 부모는 아이들에게 같은 반 학생들이 놀리면 무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이니까. 이런 신화는 상상 속에서 뛰쳐나와 현대 건축에서 돌과 회반죽으로 구현된다. 현대의 이상적인 집은 여러 개의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다. 어린이들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사적인 공간을 가져 최대한의 자율권을 지니도록 한다. 이런 사적인 방에는 거의 대부분 문이 달려있다. 또한 어린이가 문을 닫고 잠그는 것을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집이 많다. 심지어 부모도 노크를 하고 허락을 얻기 전에는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방은 아이의 취향대로 꾸며진다. 벽에는 록스타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바닥에는 더러운 양말이 놓여 있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하나의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밖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퍼져 나온다고 말이다(p. 171)'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타인과의 상호 작용, 상호 작용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실천들, 이러한 실천을 촉진하고 제약하는 물질적인 조건들은 오랫동안 누적되면서 우리 마음의 바닥에 있는 가치들을 만들어내요. 달리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바닥들에 있는 가치들이란 시대와, 그 시대에 연결된 개인적인 생애 궤적의 지평에 엮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확실하게 묶여있다고 단언은 못하겠어요)
아네트 라루라는 학자는 미국 맥락에서 다양한 가정들이 어떤 식으로 자녀를 양육하느냐를 살펴보고 '집중양육' 대 '자연적인 성장을 통한 성취'로 분리했어요. 전자는 중산층 계층, 후자는 노동자 계급에서 두드러져요. 중산층 계급의 부모들은 끊임없이 자녀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일상을 조직해요.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합리적 논증에 의하여 요구를 표현하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어떠한 요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거리끼지 않도록 가르쳐요. 이러한 양육 방법은 부모들을 극한에 가깝게 헌신하게 만들지만 많은 부모들은 기꺼이 이를 따라가고자 하지요. 노동자 계급은 그 반대에요. 노동 시간이라는 제약도 있지만, 문화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규범 자체가 '아이들은 알아서 크는 것'이라는 태도에 가깝지요. 이 양육 방식 내에서 아이들은 가사를 분담하고, 일상적인 경험은 이웃한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져요. 그 결과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미국의 학교 제도 하에서의 성취 차이로 나타나요. 노동자 계급 학생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을 지니지만 직접적/합리적으로 요구를 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미국 교육 제도의 게임의 규칙(rules of games) 하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아요. 지레 짐작으로 포기해버린다든지, 도움받는 그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든지요. 반대로 중산층 계급 학생들은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실천적 감각을 익히고 있고 때문에 교육 제도에 잘 적응하지요. 고등교육기관으로 갈 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 강해져요. 문화적 영향 / 실천적 감각이 계급 재생산에 미치는 힘이지요. 미국에 간 베트남/한국 등의 이민자들이 이상적인 소수자Model Minority로서 교육 제도를 통해 계급 이동을 이룩하는 양상을 이와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는데, 논의에서 너무 벗어나는 듯하네요. 아마 발제자이신 Liebe님은 피부로 느끼는 부분이 아니실까 싶어요. 미국 엘리트들의 에토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ㅇ_ㅇ;
한국의 맥락은 보다 독특해요.
타임라인 댓글타래를 통해서도 언급되었던 평등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 조선 사회로부터 내려져 온 교육에 대한 사회/문화적 가치 부여가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이 확대일변화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도 발전국가 모델 하에서 테크노크라트를 양성하기 위한 엘리트 코스는 존재했고(경기고-서울대), 시간이 지나면서 사교육의 합법화 및 팽창, 고등학교 계열의 다양화, 대안이 아닌 보완으로서의 유학 등등이 나타나면서 지금의 한국 교육은 평등주의라고만 보기는 힘들지 않은가 싶네요. 수월성 교육이라는 테마가 잘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적 교육 기조는 김대중 정권 이후부터 정권 변화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강화되어 왔고요.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 가능성을 굳게 믿어 왔었어요. 그 결과 생겨나는 교육열은 가족 단위의 다양한 실천과, 사회 현상으로 나타났지요. 그 전면에 나서 있는 것이 '어머니'인데, 서구에서 이식된 핵가족 이데올로기 / 한국 역사 자체적으로 존재했던 유교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요. 남성 가구주 혼자만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이 이를 지탱했지요. 전업 어머니 정체성이라 불리는 이 역할은 '어머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이라는 진술을 통해 그 구조가 드러나요. 미디어 등을 통해 표상된 어머니 정체성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어요. 특히 IMF 이후 여성들이 가구 소득을 충당하기 위해 노동 시장에 뛰어들 필요가 더 커진 이후에는요. 이미 사회 내에 표준으로 자리잡은 전업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어머니들은 모델을 수용하고 부족한 자신을 괴로워 하거나, 모델을 부정하고 대안적인 담론을 발전시켜야 했지요. 어찌되었건 거기에 반응할 수 밖에 없었을 거에요. 설령 역량과 자원이 되어서 전업 어머니 정체성을 실천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집중 양육 부모들이 호소하듯이 이러한 관여는 한도 끝도 없는 노동이고요.
한국 엘리트 탄생의 한 축은 이러한 배경에 있다고 봐요. 가구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높고, 이를 바탕으로 엘리트 코스라 불리는 교육을 밟아 가지만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세계는 극도의 경쟁, 의미있는 타자들이 성적과 대학을 바탕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환경, 끊임없는 비교에 노출되어 있었겠지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성된 에토스는 오랫동안 그림자를 드리웠을 거예요. 외고 출신인데 상위권 대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의 대학경험에 대한 연구를 보면 자신의 준거집단을 같은 고등학교 출신 친구들로 삼고, 대학 내 주변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자신이 부족하다 느껴지는 사회적 지위를 보완/대체하기 위한 탐색을 끊임없이 하더라고요. 설령 상위권 대학을 간 친구라 하더라도 이러한 비교는 끝도 없으리라 생각해요. 서연고를 간 친구들은 또 해외대학 출신 친구들과 스스로를 비교했겠죠(어떤 길이 더 '상위권'이냐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분투를 제외하고 주변을 돌이켜 볼 겨를이 어찌 있을까요. 자기도 주어진 상황에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사회경제적 배경이 좋아서 그렇다는 담론을 보며 뭔지 모를 부당함을 느끼겠지요.
어찌해야 이러한 상처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어요. 기술/사회의 변화 속도가 거세어지면서 학교 교육을 통해 습득하는 지식이 일터나, 생활세계에서 지니는 효용성이 줄어만 가니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하기는 해요. 어느 대학을 나와도 다 실업자니 학벌없는 사회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판국이고요. 흔히 한 쪽에서는 교육이 사회로부터 받는 영향력에, 다른 한 쪽에서는 교육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방점을 찍지만 환원주의적 시각을 통해 자신 논의의 매끈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쪽 접근이든 렌즈에 불과할 뿐 실제 현실은 양 쪽 모두를 고려할 수 밖에 없겠지요.
부르디외라는 학자는 우리들에게 내면화 되어있는 성향들의 체계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에토스라고 해요. 이는 일상의 행위를 결정하는 도덕의 의식적이지 않은 내면화된 형식이에요. 논증을 거쳐 명시화/법규화된 이론적 형식인 윤리와는 달라요. 에토스는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말도 일종의 행동으로 보고!) '실천적 상황'에서 원칙과 가치를 제공해줘요. 이러한 에토스는 1차 사회화 기관인 가정과, 2차 사회화 기관인 학교를 통해 우리에게 습관으로 누적된다고 해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책에는 습관으로 누적된다는 문장에 대한 재미있는 예시가 나와있더라고요.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인은 개인주의를 신봉한다. 모든 인간은 개인이며, 그 가치는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개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눈부신 빛이 우리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선생과 부모는 아이들에게 같은 반 학생들이 놀리면 무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이니까. 이런 신화는 상상 속에서 뛰쳐나와 현대 건축에서 돌과 회반죽으로 구현된다. 현대의 이상적인 집은 여러 개의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다. 어린이들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사적인 공간을 가져 최대한의 자율권을 지니도록 한다. 이런 사적인 방에는 거의 대부분 문이 달려있다. 또한 어린이가 문을 닫고 잠그는 것을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집이 많다. 심지어 부모도 노크를 하고 허락을 얻기 전에는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방은 아이의 취향대로 꾸며진다. 벽에는 록스타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바닥에는 더러운 양말이 놓여 있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하나의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밖에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퍼져 나온다고 말이다(p. 171)'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타인과의 상호 작용, 상호 작용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실천들, 이러한 실천을 촉진하고 제약하는 물질적인 조건들은 오랫동안 누적되면서 우리 마음의 바닥에 있는 가치들을 만들어내요. 달리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바닥들에 있는 가치들이란 시대와, 그 시대에 연결된 개인적인 생애 궤적의 지평에 엮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확실하게 묶여있다고 단언은 못하겠어요)
아네트 라루라는 학자는 미국 맥락에서 다양한 가정들이 어떤 식으로 자녀를 양육하느냐를 살펴보고 '집중양육' 대 '자연적인 성장을 통한 성취'로 분리했어요. 전자는 중산층 계층, 후자는 노동자 계급에서 두드러져요. 중산층 계급의 부모들은 끊임없이 자녀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일상을 조직해요.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합리적 논증에 의하여 요구를 표현하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어떠한 요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거리끼지 않도록 가르쳐요. 이러한 양육 방법은 부모들을 극한에 가깝게 헌신하게 만들지만 많은 부모들은 기꺼이 이를 따라가고자 하지요. 노동자 계급은 그 반대에요. 노동 시간이라는 제약도 있지만, 문화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규범 자체가 '아이들은 알아서 크는 것'이라는 태도에 가깝지요. 이 양육 방식 내에서 아이들은 가사를 분담하고, 일상적인 경험은 이웃한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져요. 그 결과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미국의 학교 제도 하에서의 성취 차이로 나타나요. 노동자 계급 학생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을 지니지만 직접적/합리적으로 요구를 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미국 교육 제도의 게임의 규칙(rules of games) 하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아요. 지레 짐작으로 포기해버린다든지, 도움받는 그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든지요. 반대로 중산층 계급 학생들은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실천적 감각을 익히고 있고 때문에 교육 제도에 잘 적응하지요. 고등교육기관으로 갈 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 강해져요. 문화적 영향 / 실천적 감각이 계급 재생산에 미치는 힘이지요. 미국에 간 베트남/한국 등의 이민자들이 이상적인 소수자Model Minority로서 교육 제도를 통해 계급 이동을 이룩하는 양상을 이와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는데, 논의에서 너무 벗어나는 듯하네요. 아마 발제자이신 Liebe님은 피부로 느끼는 부분이 아니실까 싶어요. 미국 엘리트들의 에토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ㅇ_ㅇ;
한국의 맥락은 보다 독특해요.
타임라인 댓글타래를 통해서도 언급되었던 평등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 조선 사회로부터 내려져 온 교육에 대한 사회/문화적 가치 부여가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이 확대일변화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도 발전국가 모델 하에서 테크노크라트를 양성하기 위한 엘리트 코스는 존재했고(경기고-서울대), 시간이 지나면서 사교육의 합법화 및 팽창, 고등학교 계열의 다양화, 대안이 아닌 보완으로서의 유학 등등이 나타나면서 지금의 한국 교육은 평등주의라고만 보기는 힘들지 않은가 싶네요. 수월성 교육이라는 테마가 잘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적 교육 기조는 김대중 정권 이후부터 정권 변화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강화되어 왔고요.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 가능성을 굳게 믿어 왔었어요. 그 결과 생겨나는 교육열은 가족 단위의 다양한 실천과, 사회 현상으로 나타났지요. 그 전면에 나서 있는 것이 '어머니'인데, 서구에서 이식된 핵가족 이데올로기 / 한국 역사 자체적으로 존재했던 유교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요. 남성 가구주 혼자만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이 이를 지탱했지요. 전업 어머니 정체성이라 불리는 이 역할은 '어머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이라는 진술을 통해 그 구조가 드러나요. 미디어 등을 통해 표상된 어머니 정체성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어요. 특히 IMF 이후 여성들이 가구 소득을 충당하기 위해 노동 시장에 뛰어들 필요가 더 커진 이후에는요. 이미 사회 내에 표준으로 자리잡은 전업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어머니들은 모델을 수용하고 부족한 자신을 괴로워 하거나, 모델을 부정하고 대안적인 담론을 발전시켜야 했지요. 어찌되었건 거기에 반응할 수 밖에 없었을 거에요. 설령 역량과 자원이 되어서 전업 어머니 정체성을 실천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집중 양육 부모들이 호소하듯이 이러한 관여는 한도 끝도 없는 노동이고요.
한국 엘리트 탄생의 한 축은 이러한 배경에 있다고 봐요. 가구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높고, 이를 바탕으로 엘리트 코스라 불리는 교육을 밟아 가지만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세계는 극도의 경쟁, 의미있는 타자들이 성적과 대학을 바탕으로 자신을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환경, 끊임없는 비교에 노출되어 있었겠지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성된 에토스는 오랫동안 그림자를 드리웠을 거예요. 외고 출신인데 상위권 대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의 대학경험에 대한 연구를 보면 자신의 준거집단을 같은 고등학교 출신 친구들로 삼고, 대학 내 주변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자신이 부족하다 느껴지는 사회적 지위를 보완/대체하기 위한 탐색을 끊임없이 하더라고요. 설령 상위권 대학을 간 친구라 하더라도 이러한 비교는 끝도 없으리라 생각해요. 서연고를 간 친구들은 또 해외대학 출신 친구들과 스스로를 비교했겠죠(어떤 길이 더 '상위권'이냐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분투를 제외하고 주변을 돌이켜 볼 겨를이 어찌 있을까요. 자기도 주어진 상황에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사회경제적 배경이 좋아서 그렇다는 담론을 보며 뭔지 모를 부당함을 느끼겠지요.
어찌해야 이러한 상처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어요. 기술/사회의 변화 속도가 거세어지면서 학교 교육을 통해 습득하는 지식이 일터나, 생활세계에서 지니는 효용성이 줄어만 가니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하기는 해요. 어느 대학을 나와도 다 실업자니 학벌없는 사회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판국이고요. 흔히 한 쪽에서는 교육이 사회로부터 받는 영향력에, 다른 한 쪽에서는 교육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방점을 찍지만 환원주의적 시각을 통해 자신 논의의 매끈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쪽 접근이든 렌즈에 불과할 뿐 실제 현실은 양 쪽 모두를 고려할 수 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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