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17 16:10:14
Name   tannenbaum
Subject   늙은 캐셔.
첫직장...

우리 팀장은 쉰을 바라보는 과장이었다. 남들은 그 나이에 임원을 준비하고 있지만 자신만 번번히 부장진급에 실패해 퇴직 압박을 받던 조금은 안스러운 중년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 내려고 매일 발버둥치는 일상이었다. 주례회의만 다녀오면 니꺼내꺼 상관없이 타부서 업무까지 들고왔다. 저번에 가져온 것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불가능하다는 부하직원들에게 무조건 하라며 서류철을 집어 던지며 닥달을해댔지만.... 결과물이 당연히 좋을수가 없었다. 한정된 인원으로 애초에 불가능한 업무를 해내라니.. 그것도 별 중요하지도 않은 우리 팀과는 전혀 상관없는 잡스러운 업무들....

자신도 알고 있었을거다. 고졸 9급 공채는 잘해야 부장이고 어지간하면 과장이 종착역인걸... 그렇지만 가족들 생각하면 그는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을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성과에 집착을 했겠지...

다음해 난 타 부서로 이동을 했고 그 과장의 말도 안되는 업무지시와 폭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내가 대리를 달았던 인사발령 날 그 과장은 여수현장 관리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말이 좋아 관리직이었지 실제론 현장잡부나 다름 없는 직책이었다. 사표를 쓰라는 회사의 무언의 압박인걸 누구나 알았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여수로 내려갔다. 그 이후론 나도 소식을 모른다. 아마도 그 사람이라면 퇴직하는 날까지 버텼을것이다.

Sunken cost, Depreciation, 그리고.... 늙은 캐셔.

그 과장의 별명들이었다. 그중에 가장 많이 불리웠던 건 늙은 캐셔였다. 할줄 아는 건 아날로그 계산기 두드리는게 전부인 나이든 잉여... 영어도 못하고 오피스도 다룰 줄 모르는 그사람에게 험한말을 들은 날이면 부하직원들은 무시와 비아냥을 담아 늙은 캐셔 또 알츠하이머 도졌다고 놀리곤 했다.  그땐.... 나도 2호선 라인 동기들처럼 그사람을 비웃었다. 부장들, 임원들 쫒아 다니며 술마실 시간에 영어학원이라도 다니고 컴퓨터학원이라도 다니라 비웃었다.

지금도 그 사람이 무능력한 상사였으며 변하는 세상에 도태된 사람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의 나이에 가까워진 지금 그 사람도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방향이 옳던 그르던 자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걸 쏟아 부었을거다. 대학생인 큰아들 고등학교 입학한 둘째.. 그리고 아내와 늙으신 부모님을 어깨에 얹고... 상사들 술자리에 시종노릇, 임원들 경조사에 노비노릇, 디스크를 부여잡고 이사의 산행에 세르파노릇.... 회사에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겨우 버텨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는 그사람을 정말 하찮게 생각했었다. 오만하게도.... 그러나 과연 그때 20대의 나는 그 과장을 비웃을 자격이 있었을까...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그저 게으르고 성질 포악한 늙은 캐셔라 부를 자격이 있었을까. 그 사람만큼 치열하게 살아남으려 노력했었을까.....

그 사람을 늙은 캐셔라 비웃으며 조롱했던 20대의 젊었던 나를 사과하고 싶은 날이다.



4
  • 일단 취업좀....ㅠㅠ
  • 사과하실 필욘 없어보이지만, 이래저래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게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718 7
15065 경제chat-gpt를 사용하여 슈뢰더 총리의 아젠다 2010 연설 번역하기 3 + 와짱 24/11/24 68 0
15064 문화/예술아케인 시즌2 리뷰 - 스포 다량 kaestro 24/11/23 113 0
15063 일상/생각탐라에 적으려고 했으나 티타임으로 쫓겨난 이야기 1 5 오구 24/11/23 384 1
15062 오프모임29일 서울 점심 먹읍시다(마감) 12 나단 24/11/22 547 4
15061 스포츠[MLB] 2024 AL,NL MVP 수상자.jpg 1 김치찌개 24/11/22 121 1
15060 스포츠[MLB] 2024 AL,NL 사이영 수상자.jpg 김치찌개 24/11/22 120 1
15059 음악[팝송] 션 멘데스 새 앨범 "Shawn" 김치찌개 24/11/22 94 0
15058 방송/연예예능적으로 2025년 한국프로야구 순위 및 상황 예언해보기 11 문샤넬남편(허윤진남편) 24/11/21 467 0
15057 일상/생각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3 SKT Faker 24/11/21 632 1
15056 오프모임23일 토요일 14시 잠실 보드게임, 한잔 모임 오실 분? 4 트린 24/11/20 359 0
15055 방송/연예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6 알료사 24/11/20 3538 32
15054 생활체육[홍.스.골] 10,11월 대회 상품공지 켈로그김 24/11/19 266 1
15053 여행여자친구와 부산여행 계획중인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29 포도송이 24/11/19 706 0
15052 일상/생각오늘도 새벽 운동 다녀왔습니다. 5 큐리스 24/11/19 479 9
15051 일상/생각의식의 고백: 인류를 통한 확장의 기록 11 알료사 24/11/19 516 6
15050 게임[1부 : 황제를 도발하다] 님 임요환 긁어봄?? ㅋㅋ 6 Groot 24/11/18 475 0
15049 꿀팁/강좌한달 1만원으로 시작하는 전화영어, 다영이 영어회화&커뮤니티 19 김비버 24/11/18 955 10
15048 의료/건강고혈압 치료제가 발기부전을 치료제가 된 계기 19 허락해주세요 24/11/18 730 1
15047 일상/생각탐라에 쓰려니 길다고 쫓겨난 이야기 4 밀크티 24/11/16 906 0
15046 정치이재명 1심 판결 - 법원에서 배포한 설명자료 (11page) 33 매뉴물있뉴 24/11/15 1835 1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32 arch 24/11/15 1021 5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6 nothing 24/11/14 917 20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474 10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571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