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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06 12:09:05
Name   Raute
Subject   알렉스 퍼거슨의 흑역사, 월드컵
수많은 축구감독들 중에서도 알렉스 퍼거슨은 특기할만한 인물입니다. 연례행사처럼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였으며, 몰락한 왕년의 명문 맨유를 되살려내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만들었거든요. 기존의 리누스 미헬스-아리고 사키를 뛰어넘어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이런 투표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클럽에서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팀에서는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해 사람들이 의문을 표하기도 합니다. 왜 퍼거슨은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죠. 사실 퍼거슨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었습니다. 그리고 커리어 최악의 실패를 경험했죠. 바로 월드컵에서 말입니다.


마라도나의 대회 1986월드컵은 퍼거슨에게는 잊고 싶은 대회이기도 합니다.

퍼거슨은 1980년대 초반 애버딘을 이끌고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수석코치를 겸임하게 됩니다. 당시 감독은 유럽축구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한 조크 스테인으로 퍼거슨 이전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인물입니다. 퍼거슨의 멘토로도 잘 알려져있죠. 스코틀랜드 역대 명장 1, 2위가 팀을 꾸렸고 사이도 좋았으니 최고죠. 스코틀랜드의 목표는 당연히 86월드컵 본선진출, 그리고 최초의 토너먼트 진출이었습니다.


왼쪽의 풍채 좋은 인물이 스인이고 오른쪽이 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전의 퍼거슨.

86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스코틀랜드는 스페인, 웨일스, 아이슬란드와 같은 조가 되었고 마지막 1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아슬아슬한 1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3승 2패 6점 +4
웨일스 3승 2패 6점 +1
스페인 3승 2패 6점 -1
아이슬란드 1승 4패 2점 -5

3승했는데도 9점이 아니라 6점인 건 당시 승리 승점이 2점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스코틀랜드가 1위긴 1위였는데 승점 동률이다보니 마지막 경기가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하필 마지막 상대는 같은 영국 내의 웨일스였고요. 스페인이 홈에서 아이슬란드를 이길 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조 2위 확보를 위해 웨일스 원정에서 최소 무승부를 거둬야했습니다. 반면에 웨일스는 승리를 거둬야했고요. 1978년에도 이런 식으로 스코틀랜드가 단두대매치를 이기고 올라갔고, 스코틀랜드의 홈에서 치뤄졌던 경기가 논란 끝에 웨일스가 이겼던지라 경기가 뜨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기 초반에 웨일스의 마크 휴즈가 골을 넣으며 리드를 잡습니다. 이 마크 휴즈는 현 스토크 감독이자 과거 맨유의 레전드인 그 휴즈입니다. 당시 웨일스 선수들은 전부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었을 만큼 전력이 괜찮은 편이었고, 반면에 스코틀랜드는 베테랑들 다수가 부상으로 빠져서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경기는 지지부진했고, 스테인은 점점 열이 받았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골키퍼 짐 레이턴이 자꾸 실수를 저질렀는데 알고 봤더니 렌즈를 잃어버린데다 여분의 렌즈도 없어서 골키퍼를 교체하기도 했고요. 스코틀랜드는 경기 종료 10분을 남겨두고 페널티킥으로 간신히 무승부를 만들었고, 이후 스페인이 아이슬란드를 이겨 2위로 예선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됩니다...만 이 경기에서 스테인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평소 앓고 있던 심장질환이 겹쳐 쓰러지고 말았고, 결국 경기장 의무실에서 사망합니다. 이날 스테인이 건강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쓰러졌는지, 아니면 계속 증세를 보이고 있었는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스테인이 쓰러지는 장면. 사진 왼쪽에 놀란 표정의 퍼거슨도 보입니다.

비극이었으나 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당장 플레이오프를 치뤄야 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축구협회는 수석코치인 퍼거슨에게 지휘봉을 맡깁니다. 퍼거슨은 애버딘 감독과 겸임하면서 팀을 지휘했고, 수석코치로는 역시 애버딘의 아치 녹스를 불러와 팀을 구성합니다. 당시 유럽 지역예선은 5개 국가가 같은 조일 경우 조 2위까지 본선에 직행했고, 4개 국가가 한 조면 조 2위는 플레이오프에 나가야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벨기에-네덜란드가 아니라 오세아니아의 호주를 상대하게 됐고, 1985년 12월에 퍼거슨이 이끄는 스코틀랜드는 1승 1무로 본선 진출에 성공합니다. 여담으로 저 벨기에 네덜란드의 플레이오프는 굉장한 혈투로 유명합니다. 물론 벨기에가 4강 신화를 썼기 때문에 더 화제가 되는 거겠죠.

여기까지만 봐서는 비극적인 스승의 죽음, 그 유지를 이어받은 제자의 출도!라는 무협지 같은 스토리가 나오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1986년의 스코틀랜드는 E조에 속했는데 서독, 우루과이, 덴마크와 같은 조였죠. 어차피 이때는 16개팀 체제였기 때문에 지금보다 조가 빡셀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3포트 알제리, 캐나다, 이라크, 모로코, 그리고 우리나라를 제치고 덴마크가 나온 건 정말 최악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을 정도죠. 우루과이 감독인 오마르 보라스가 '우린 [죽음의 조]에 걸렸어!'라고 발언하기도 했고, 이때부터 [죽음의 조]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팀의 면면을 보면 서독은 전성기에 비하면 손색이 있긴 하지만 어찌됐든 분데스리가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팀이고 1982년 준우승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조별예선 제도가 시행된 이래 떨어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무조건 8강은 가는 팀이었죠(독일이 16강에서 떨어졌던 건 16강 풀토너먼트 시스템이었습니다). 우루과이는 코파 아메리카 우승팀으로 엔초 프란체스콜리와 안토니오 알사멘디 등 남미 최고의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덴마크 역시 미하엘 라우드럽, 프레벤 엘케어, 쇠렌 레어비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등장해 유로 3위를 차지한 황금세대였습니다. 물론 스코틀랜드도 그래엄 수네스가 지금이 역대 최고의 팀이라고 호언장담할 정도였죠. 정말 누가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조였습니다.

1986월드컵은 유투브에서 검색만 해도 화질은 좀 떨어질지언정 90분짜리 영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경기 내용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요약만 해보면 덴마크는 다른 국가들을 두들겨패고 3전 전승으로 조 1위, 서독이 조 2위, 우루과이가 조 3위로 16강에 진출했으며 스코틀랜드는 1무 2패로 탈락합니다. 당시 퍼거슨은 애버딘과 던디의 선수들을 주로 기용했고, 이를 위해 리버풀의 앨런 핸슨을 스쿼드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 뛰고 있던 스티브 아치발드를 주전으로 쓰지 않았고, 단두대 매치였던 우루과이전에서는 수네스를 제외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까지 했죠. 결국 실패했고 특히 1분만에 퇴장당한 우루과이를 상대로 지지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던 건 참담했죠.

물론 퍼거슨 입장에서 항변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공격의 핵심인 케니 달글리시가 부상으로 대회에 불참했고, 핸슨을 제외한 것도 수비조직력을 위한 희생으로 설명할 수 있거든요. 당시 핸슨이 국가대표 경기에서 기대 이하였다고도 하고요. 사실 스코틀랜드가 겪었던 문제는 수비보다도 1득점에 그친 공격력이었죠. 여기에 마지막 상대인 우루과이는 퇴장당하니까 대놓고 골 안 먹히겠다고 버티고, 더티플레이는 계속 하는데 심판이 시작하자마자 퇴장 준 게 미안했는지 관대하게 넘어가줬고요. 덕분에 스코틀랜드는 늪축구에 빠져듭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수석코치였다지만 반 년 지휘봉 잡아서 죽음의 조에서 떨어진 걸 뭐라 하는 건 너무 가혹하죠. FIFA 테크니컬 리포트도 퍼거슨이 지휘봉 잡고 몇 경기 지휘해보지도 못했고 선수 확인해볼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기술했고요.


왜 나만 갖고 그래...

원래 임시감독이었던 만큼 대회가 끝나고 퍼거슨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토트넘과 아스날의 제의를 받았다가 최종적으로는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하고 전설을 만듭니다. 물론 이후 다시는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지 않았으며 중간중간 A매치와 국제대회를 욕하기도 했죠. 퍼거슨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가대표 지휘봉을 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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