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7/26 14:07:16
Name   nickyo
Subject   정말 열받는 일


한 아저씨가 있다.
마르고, 어깨가 약간 굽은, 하늘색 얇은 남방에 면바지를 입고 서류가방을 든,
머리가 약간 헤진
어디에나 있을법한 아저씨다.
이 아저씨는 내게 와서 물었다.
이 메모리 카드를 60만원에 샀노라고.
나는 숨이 콱 막혔다.
128기가짜리 SD카드를 60만원에 산 이 아저씨가..
차라리 어딘가의 판검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국세청의 고위직이거나
못해도 어디 경찰서의 경감쯤 되는 이기를 바랬다.
하물며 자식중에 법조인이라도 있기를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친형제에 거대 깡패 두목이라도 있기를.
그러면 어디 골든타임 드라마의 한 장면이나
일본 소년 만화의 짜릿한 권선징악의 한 씬 처럼
자기에게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사기를 친 저 용팔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해줄거라는 기대가 생길 테니까.
그러나 나는 아무말도 못했다.
단지 기계처럼
우리는 정품 메모리 카드를 판매하고
그 메이커는 저희가 취급하는 메이커가 아니며
동일한 사양의 샌디스크 메모리는 12만원 정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라고.
붉게 달아오르는 열을 귀 끝까지 느끼면서도
차마 그것이 가짜 상품이라고
사기당한거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손님은 무려 50만원을 손해보고도
어쩔 수 없다며 몇 번의 하소연과 몇 번의 가격 확인 후
잘 알아봤어야 하는데, 믿으라고 하더라고요. 허허 웃으며
이미 개봉을 해 버린 메모리카드를 몇 번이고 뒤집어 보고는
선선한 웃음과 아쉬움, 그 사이 한숨에 느껴지는
사회를 오래 버텨온 한 성인으로서의 화에 대한 지독한 인내로
돌아갔다.
사장님은 우리 거래처인데 사기당했다고 말 할수는 없는 거라며
어쩔 수 없다고 하셨지만
나는 마치 이 더러운 사기극에 공범이 된 것 같은 불쾌함이 목 끝까지 찐득거렸다.
여기에서 돈을 벌고 먹고 사는 모든 이들이 용팔이라 불려도
우리는 이미 모두 공범이나 다름없는 못된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해도
몇 십만원의 월급이 아쉬워 입은 돌처럼 무겁게 떨어지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대며
소비자 기본법을 뒤져보고 신의성실의 원칙 같은걸 찾아 읽어도
사장님은 그저 앵무새마냥
그런 분쟁도 여러번 있었는데 다 저들이 이겼다며
안걸리게끔 유령 법인도 만들고 상표작업하고 자기들이 그냥 비싸게 가격 올려놓고는
자유시장거래 원칙에 맞춰서 판매하는거라고
그랬다.

나는 어쩐지 그 마른 아저씨의 걸음걸이가 자꾸 어른거려서
다음달 까지만 일하겠으니 사람을 구해달라고 말했다.
눈 앞에서 50만원을 잃고도 체념하려 애 쓰는 그 아저씨도
부정을 바라보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거래처의 사정도
그리고 이 모든것에 순응하지 않으면 책임 질 능력조차 없는 나도
방금 일어난 것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는 엄숙한 법률의 권위도
이 모든 것들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이 화려한 쇼핑의 공간이 지독하게 혐오스러웠다.


사장님은
그건 천천히 알아보자며, 구해질 때 까지는 일해달라고 하고는
전화를 받는 척 자리를 피했다.


나는 또 한번 비겁자가 되었고
직원은 언제나처럼 재수없게 그게 다 사회죠 어쩌겠냐라며
으스대었다.
그날만큼 남의 얼굴을 주먹으로 뭉게고 싶었던 날은 없었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61 오프모임[안국]급벙 안국 서울집시 23 무더니 19/09/14 4467 7
    6051 사회초등티오에 대한 대략적 생각. 10 WisperingRain 17/08/03 4468 0
    10266 일상/생각사회주의 대 반사회주의 8 necessary evil 20/02/06 4468 28
    1965 기타JTBC 신년 토론 2016 한국사회를 말한다 - 유시민 최후 발언 4 김치찌개 16/01/07 4469 0
    5338 꿀팁/강좌와우의 홍차넷 컨텐츠 소개[2/?] 12 와우 17/03/31 4469 4
    5557 도서/문학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16 기아트윈스 17/05/01 4469 2
    6193 정치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본 이유정 헌법재판관 후보에 대한 얘기 16 empier 17/08/28 4469 0
    7358 기타가축운반선의 비참한 현실 11 배바지 18/04/09 4469 1
    8812 스포츠페-나-페-나-페-나-조-조-조 8 손금불산입 19/01/27 4469 0
    2001 영화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2007)_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어떻게 먼저 용서 할 수가있어? 12 리니시아 16/01/11 4470 1
    3103 정치언론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2 2Novation 16/06/23 4470 0
    3801 게임롤드컵을 맞이하여, 팬심에 대해서 주절주절 10 OshiN 16/09/30 4470 3
    4432 꿀팁/강좌홍차넷 탐라인을 위한 폰사진 안돌아가게 올리는 팁! 4 쉬군 16/12/23 4470 3
    6609 여행상해(상하이) 여행기 1 pinetree 17/11/17 4470 3
    2291 일상/생각기숙사령부 이야기 1 No.42 16/02/25 4471 2
    4864 기타홍차상자 후기 15 선율 17/02/14 4471 6
    8846 게임[LOL] 라이엇이 밸런스 방향성에 대해서 새로운 공지를 올렸습니다 3 Leeka 19/02/07 4471 2
    2798 기타한 권의 책 도서 이벤트 38 까페레인 16/05/13 4472 3
    6893 역사할아버지 이야기 -3- 12 제로스 18/01/04 4472 14
    9888 기타보육원의 추억... 1 o happy dagger 19/10/25 4472 9
    12111 오프모임토요일 오늘 오후 5시 한분만 더~ 24 하얀 21/09/25 4473 1
    11140 생활체육손기정평화마라톤 첫풀코스 도전기 8 오디너리안 20/11/17 4474 19
    3263 창작[34주차] 열대야 1 얼그레이 16/07/13 4475 0
    3355 영화[부산행] 한국에서 만들어진 헐리웃 공식 재난영화(스포 포함) 18 shadowtaki 16/07/26 4475 0
    9152 게임스팀게임 네모와디오(Nemo_D.O) 모바일 구글플레이 출시 11 mathematicgirl 19/05/04 4475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