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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11/25 21:02:27 |
Name | 피아니시모 |
Subject | 예송논쟁 대충 알아보기 (다시쓰기) |
1. 간략소개 예송논쟁은 총 2번에 걸쳐서 일어난 논쟁 및 논란으로 1659년 효종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기해예송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음으로 다시 한번 논쟁이 된 갑인예송으로 나뉜다. 보편적으론 1,2차 예송논쟁으로 부른다. 두번 모두 왕과 왕비가 죽으면서 일어난 논쟁으로 장례절차와 관련된 문제였다. 정확히는 자의대비의 상복을 몇년 입느냐의 논란으로 시작된 논쟁인데 고작 상복갖고 그러냐?할 수 있겠지만 어떤 상복을 입는지는 표면적인 문제일 뿐 진짜 문제는 인조에서 효종 그리고 다시 효종에서 현종으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과 권력문제때문이었다. 유교와 성리학이 중심인 조선이란 나라에서 이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였다. 우리 입장에선 어떨지 몰라도 당시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들에게 이 문제는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2. 프리퀄(1) 이를 알기 위해선 다시 현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인조부터 시작된다. 인조는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뒤 즉위한 임금으로 당시엔 선조의 뒤를 잇는 왕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하에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선조의 적통이 아니라고 부정했으니깐) 허나 문제가 생겼다. 정작 그들의 반정명분중 하나였던 (다른 하나는 폐모살제) 광해군이 친명배금의 사대주의가 아닌 후금과 친교를 맺는 정책을 펼친다였는데 문제는 명나라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인조를 압박한 것이다. 명나라 입장에서 광해군은 자기들에게 군사를 보내 파병을 한 임금이었다. (사르후 전투) 그 결과 그 이전까지 (세자 시절) 광해군을 제때 책봉도 안해주었고 왕으로 즉위한 즉위초에도 임해군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던 명나라는 광해군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광해군이 내쫓겨나자 온갖 소문들이 나돌며 인조에 대한 명나라의 시선은 굉장히 좋지 못하게 되었다. (임해군을 걸고 넘어진 건 적자가 없다면 마땅히 서장자가 세자 및 왕위를 이어야하는 데 왜 차자가 그러고 있느냐?로 압박을 가했었고 임해군이 죽자 이 압박은 더 거세졌다) 그렇게 명나라는 인조에게 거의 2년 횃수로는 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책봉하지 않았고 인조는 정말 간신히 (막대한 뇌물을 동원한 덕분ㅇ) 조선왕으로 책봉받을 수 있었다. 안그래도 반정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즉위초부터 정통성에서 타격을 입고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인조는 자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끝내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서 왕으로 추존하기까지 한다. 헌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들 알디시피 곧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터졌다. 우리가 잘 아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것 그렇게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얼마 후 청나라가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인조 본인의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3. 프리퀄(2) 이떄즘에 인조는 소현세자를 굉장히 의식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이용하여 인조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인조와 소현세자는 정적이 되었다. 정확히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인조가 강한 왕권을 행사한것과 별개로 그의 권위자체는 왕으로써 지하하수구에 쳐박힌 상황이었다. 그가 강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건 집권당인 서인들의 권위 역시 병자호란으로 인조와 함께 하수구에 쳐박혀있었기때문이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포로)였던데다가 당장 소현세자가 볼모로 간 곳에서 함께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그곳 관리들의 인심을 얻으며 대놓고 청나라신하들이 지금의 왕 대신 세자를 즉위시켜야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으니 인조가 경계하지 않을리 없었다. 어쩃든 귀국 2달 후 결국 소현세자가 죽고나서 인조가 선택한 건 청나라의 영향력이 드리운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봉림대군 효종이었다. 헌데 인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회빈 강씨를 인조 스스로가 모함하여 기어이 사사시켜버리고 말았다. (자세한건 너무 기니 생략) 결국 후계자는 효종으로 확정되었으나 문제는 인조가 효종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고 도리어 민회빈 강씨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정받는 신세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효종의 권위를 흔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즉위한 효종은 아버지의 묘호를 유교와 성리학에서 최고중에 최고인 인조로 모시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문제떄문에 신하들에게 책잡히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 했다. 이건 과거 성종이 보여주었던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소현세자의 자식들 즉 조카들은 그래도 지켜주긴 했지만 딱 그뿐이었고 민회빈 강씨는 효종앞에서 절대로 입에 담아선 안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정통성떄문에 고생하고 인조가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고생하던 효종이 죽고 말았다. 4. 예송논쟁의 시작 (1차예송논쟁, 기해예송) 효종이 죽고나자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가 몇년복을 입는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 참고로 자의대비는 효종보다 나이가 어리다 장남은 3년복을 입고 그 외는 1년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는데 죽은 효종을 장남으로 보는가? 차남으로 보는가? 라는 문제가 발생했다. 만약 일반 사대부였다면 별 문제 없이 1년복을 입으면 끝이었지만 효종은 사대부가 아니라 "왕"이었다. 그냥 단순한 왕족도 아니고 한 나라의 지존인 임금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 여러 의논이 나오는 가운데.. 송시열이 폭탄발언을 하고 만다. 이른바 '체이부정(體而不正)' 간단하게 해석하자면 맏아들이 아닌 사람이 대를 이었다. 즉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효종을 적장자가 아닌 차자이기떄문에 정통성이 없다라고 한것) 이 말을 들은 영의정 정태화는 눈깔이 뒤집힌 채 송시열의 주둥이를 틀어막아버렸다. 당장 이 시기에 아직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이 살아있었는 데 송시열이 저렇게 떠들고 있었으니 뒤집히지 않을리가 없었다. 송시열의 말대로라면 왕통은 효종-현종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아들 이석견이 이었어야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는 데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민회빈 강씨와 그 자식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를 생각하면 이 말이 갖는 의미가 어떤식으로 해석될 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뒤늦게 상황파악을 끝낸 송시열과 서인은 어떻게든 포장을 하며 이건 대명률에도 있는건데요?라고 말하긴 했지만 실상 그들이 생각하는 건 이러했다. 제 아무리 효종이 인조의 왕통을 이어받아 왕이 되었지만 어쩃든 가족적 질서를 보았을 때 차남이기떄문에 그의 장례는 마땅히 차남의 예로 지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왕이라고 해서 성리학이 갖는 가족적 질서와 종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왕이라고 사대부랑 다를바가 없다에 가깝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1년복을 주장하지만 곧 이 주장에 반박이 들어오기 시작하니 허목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이다. 효종이 비록 차남이긴 하지만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의 뜻 아래 효종이 세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었고 인조의 뒤를 이어 왕통을 이었으니 비록 그가 차남이긴 하지만 왕통을 이은 적통이라는 것. 그러니 3년복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1년복을 주장하는 송시열 계파의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허목의 남인 + 일부 서인의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송시열의 계파 외에 서인의 다른 계파에선 곧 송시열의 주장이 아닌 허목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 송시열은 이때도 계속 1년복을 주장하였는 데 다만 효종의 정통성을 건들 수도 있게 되자 경국대전과 대명률에서 장남 차남 가리지 않고 1년상을 하라고 써져있다는 걸 핑계삼아 주장하였다. 물론 속내는 위에 지나가듯 말한대로 왕이랑 사대부랑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그들의 생각이었지만.. 송시열의 1년복 VS 허목의 3년복 주장으로 논쟁이 격화되어가는 와중에 효종의 스승이자 현종의 스승이기도 한 윤선도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온 조정이 뒤집혔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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