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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1/04 17:45:06
Name   quip
Subject   외국어를 공부하는 어른의 시간
국민학교 시절부터 영문도 모른 채 문법 형식과 기초 단어들을 기계적으로 외웠다. 덕분에 영어에 대한 기억 자체가 별로 없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말이다. 물론 굳이 언어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어는 그저 영어다. 거울은 그저 거울이면 족하고, 죽음이 그저 죽음인 것처럼 말이다. 그저 그렇게 가끔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이를테면 사회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꽤 머리가 크고 나서 사회학을 공부하고자 마음먹었고,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워나갔다. 그렇게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분석틀을 배울 때마다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 모든 순간이 찬란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직도 몇 가지 찬란한 만남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나는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라는 단어를 뒤르켐적 차원에서 발화할 때, 아직도 종종 등에 소름이 올라오는 경험을 한다. 그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나는 내 등 뒤에 있는 어떤 절대자적 존재-그러니까, 사회society-를 느끼며, 그 안에 내재한 창발적 속성이 역동하는 것을 느낀다. '사례 확장 연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자주 떠올리는 단어는 아니다-잠비아로 현장 연구를 떠난 젊고 패기있는, 논쟁적인 이론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society라거나 fact라는 영단어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한다. 마치 사회나 사실처럼 말이다.

굳이 영어 혹은 사회학과 친밀할 필요는 없지만, 삶에 끼어든 어떤 것들과 또 굳이 데면데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좋은 추억은 친밀함을 형성하기 위한 좋은 재료가 되어준다. 그리고 나와 영어 사이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예 영어를 엄청 잘하면 '쯥, 나는 영어와 어떤 기억도 없어요'하고 간지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영어는 영어대로 못하고 기억은 기억대로 없다. 이게 뭐야,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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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부터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살아오며 몇몇 일본 음악과 소설을 좋아한 덕에 활자와 단어 몇 개 정도는 읽을 수 있었지만, 일본어는 놀라울 정도로 몰랐다. 어린 시절 히데에 빠져서 모든 곡의 가사를 외우고 있었지만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어찌보면 이것도 재능이다. 아니, 그저 단지 히데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래서 더 많은 노래를 불렀더라면, aiko처럼 정규 앨범을 열 몇장 냈다면 가사의 발음과 뜻을 따로 중얼중얼 외우다가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그래서 일찌기 일본어를 공부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서른 중반인 지금쯤은 생활일본어를 할 수 있었을 지도 몰랐을 텐데.

뭐 그렇게 데뷔 후 20년동안 정규 앨범을 열 몇장 내고 매년 투어를 여는 aiko 때문에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여러 핑계거리를 댈 수 있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도록 하자. 아무튼 여러 이유가 있고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다. 문법책과 사전을 두고, 가사집이라거나 인터뷰라거나 출연한 예능 등을 텍스트로 둔 독학. 다행히도 일본어 번역서를 낸 친구 하나와 일본에 사는 유학생 친구가 있기에 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오랜만에 하는 공부는, 즐겁다. 배우고 싶어 배우는 외국어 공부란 영문도 모른 채 문법과 기초 단어를 죽어라 외우는 것에 비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단어와 마주친 장면들이 선명하게 기억난다는 것도 유쾌한 일이다. 가령 나는 속눈썹, 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속눈썹 끝을 찌르는 햇살'이라는 구절과 멜로디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기분 탓, 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비가 강해진 것 같지만, 기분 탓이니까'라는 어느 콘서트 영상의 토크를 떠올린다. 아직은 내가 아는 모든 단어들이 구절과 형체와 멜로디를 갖추고 있다. 그러다 뜻도 모른 채 통으로 외웠던 옛 가사들이 옷을 벗고 머리속에 등장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아, 이게 이래서 이런 형태의 문장이었구나. 와, 좋네. 그 때도 좋았는데. 지금도 좋아. 그렇게 오랜만에 히데를 듣다가 펑펑 울고.

아름답지 않은 언어를 아직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좋다. 내일은 맑을텐데 별이 몇개나 보일까. 빠져들 것 같은 그런 순간. 둘이 헤매고 싶으니까 출구는 닫아버리자. 작은 지붕 아래서 함께 달라붙은 채 있을까. 이런 예문들을 두고 언어를 공부한다는 건 역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아, 회사원입니다. 오늘은 열한 시에 퇴근했네요.'라는 예문으로 공부하는 쪽 보다 즐거운 일이 아닌가. 나는 '오늘의 참사로 마흔 명의 시민이 사망했습니다'라는 문장을 일본어로 옮기지 못한다. 오늘과 마흔 정도의 단어는 알고, '서로 얽힌 마흔 가지 마음들 중에 어떤 게 마음속의 진심일까'라는 문장은 만들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한국어로 살아가는 세상이 충분히 아픈데, 힘든 일본어를 벌써 배우고 싶지는 않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배우지 않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슬프고 싶어서 슬퍼지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아무래도, 언젠가는 무라카미 류를 원어로 읽어보고 싶으니까. 일본어 공부의 시작과 함께 여성어와 오사카 사투리가 아무렇게나 섞인 개판 일본어를 쓰기 시작한 덕에 일본어 선생 하나가 '표준어부터 제대로 배우고 사투리를 배워'라 갈구고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주로 듣고 보는 일본어 구사자가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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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의 어느 친구가 떠오른다. 영어와 중국어를 굉장히 잘 하던 경제학도였는데, 갑자기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왠 러시아어야, 라는 내 질문에 그녀는 체호프를 원어로 읽어보고 싶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체호프를 원어로 읽는 정도로 러시아어를 공부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기업에 취직했다. 반 년 만에 때려치우고, 어느 시인과 결혼해 귀농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체호프가 아니라 푸쉬킨일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차이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열렬한 소설 애호가였고, 시인과 결혼했으니까.

대학원에서 독일어를 공부해서 맑스와 괴테를 원어로 읽을 거야, 라고 말하던 친구도 있었다. 기계공학인가 토목공학을 전공했던 한총련의 간부였고, 효자였다. 아쉽게도 혹은 다행히도 그는 독문과 대학원을 가는 대신 그냥 건설 회사에 취직해서 좀 더 훌륭한 효자가 되었다. 야, 나 혹시 수배자 되면 열무김치좀 많이 가져다 줘, 라는 농담을 던지던 게 기억난다. 서로 바빠 연락 없이 지낸지 이년쯤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열무김치를 좋아하는 효자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아직도 가슴에 불타는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을까. 그런 민망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그저 그렇게 외국어가 필요해지는 어른의 시간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한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공부할 시간에 영어 번역일이라도 하나 더 구하는 게 나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일본어보다는 중국어를 배우는 게 삶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그리스어를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재작년, 한 친구와 농담같은 내기를 했다. 내가 지면 내가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친구가 지면 친구가 그리스어를 공부해야 하는 내기였다. 무승부로 끝날 확률이 수학적으로 99.9퍼센트였고 사회학적으로도 90퍼센트쯤 되었데, 이런 제기랄, 내가 졌기 때문이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도 몇 개의 단어를 단어장에 끄적거리고, 이런 별 의미 없는 글을 썼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18
  • 춫천
  • 수려하네요.
  • 뒤늦게 읽었는데 이런 글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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