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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2/06 00:40:45
Name   하얀
Subject   사라진 세계, 우아한 유령(Vanished World, Graceful Ghost)
(취향범벅인 글입니다)


중세 배경의 RPG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에서 내가 비상하게 관심이 쏠리는 부분이
바로 ‘길드’에 찾아가는 순간이다. 그런 스토리에선 늘 ‘길드’에 가면 정보가 있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언급된다. 하지만 같은 직종의 이익 집단인 ‘길드’는 배타적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길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증명에 성공하면
닫힌 문은 활짝 열린다. 언제나 말하지만 애정이란 결국 선별적이다.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길드’의 배타성과 내부의 평등한 협조관계는 쌈쌍둥이 같은 모습이다.

큐브를 돌려보자. 내가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는 ‘한 여름밤의 꿈’이다. 세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처럼
평화로운 일상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한바탕 소동.

그래서 웨스 앤더슨 감독의 ‘문라이즈 킹덤’을 보고 2년 후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나왔을 때
예고편도 보지 않고 바로 영화관으로 갔다. 저 장르에서 나름의 경지를 이룬 감독이니.
그런데 외견 상 여행을 떠나 사건이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커지는 스토리는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가장 마음 빼앗기는 장르…

바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정’

여기까지 읽고 이 영화를 봤다면 짐작할 수 있듯,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의 컨시어지인 구스타프가 비밀스럽고 작은 규모의 유럽 호텔 컨시어지 길드인
‘십자열쇠협회’를 찾는 모습이다. 두 개의 열쇠를 교차한 ‘십자열쇠’는 호텔 컨시어지의 표상이며
그들 구성원간의 형제애와 충성심의 상징이다. 그들은 구스타프의 전화가 걸려오자 하는 일을 즉시 멈추고
서로가 서로에게 줄줄이 비엔나처럼 연락하여 구스타프를 돕는다.
신뢰에 기반한 상호협력 네트워크가 살아나는 것이다.

영화 내내 나를 자극했던 것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짙은 향수였고, 이 것은 내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 “스테판 츠바이크에게 영감을 얻어..” 라고 씌어진 글을 읽자마자, 감독이 영감을
받았을 책의 제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제의 세계’ !!!
(그리고 너무 기뻐서 새처럼 비명을 질렀다. 좋아하는 감독이 좋아하는 책의 세계를 구현해 주다니!
그래서 같이 간 친구에게 고기를 샀음. 미안 이건 너무 내 취향이야 )

큐브의 또 다른 한면, 내게 각인된 벨에포크라 불리는 세기 말 빈의 모습은 츠바이크가 묘사한 세계이다.
그는 그 시대를  ‘안전한 황금 시대(The Golden Age of Security)’라고 불렀다.

‘19세기에는 그 자유주의적인 이상주의의 견지에서 ‘모든 세계 중 제일 좋은 세계로 틀림없이 직행하고 있다고 
모두들 고지식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전 세계시민으로 하나의 유럽에서 살던 시기.

‘이런 정신적 융화의 분위기 속에서 산다는 것은 감미로운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모든 시민은 초국민적이고 코스폴리탄적인 세계시민으로 길러졌다.’

…그래서 아직 상호 신뢰와 진보에 대한 낙관이 살아있던 시대. 

‘사람들은 마녀나 유령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 여러 민족간의 전쟁과 같은 야만적인 역행은 믿지 않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관용과 화합의 틀림없는 결합력을 신뢰하고 그것을 완고하리만치 확신하고 있었다. 국민과 종파 사이의
서로 대치되는 경계선은 점점 공통된 인간적인 것 속으로 허물어져 갔고 이로 말미암아 평화와 안정이라는 최상의 보물이
전 인류에 분배될 것이라고 그들은 정직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8월의  순진한 신병들이 “크리스마스 전까지 돌아올게요” 그들의 어머니께 웃으며 손을 흔드는세계. 

클림트가 ‘그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는 모토를 외치며 빈분리파를 만들어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가 시험적인 미술을 펼치고
구스타프 말러가 새로운 교향곡을 발표하고, 프로이드와 아들러와 융이 정신분학을 논하며... 농익은 열매처럼 익어가던 그 시절.
사람들은 미래로 빨려가고 있었으며, 인간성도 계속 될 거라 믿었다.

그렇게 츠바이크와 영화의 구스타프는 정제된, 고결한 '하나의 유럽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구스타프가 열차에서 당당히 항의하다 '간단하게' 죽음으로 끝나는 모습은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우리가 익히 아는 ‘폭력의 시대’가 온 것과 같다. 
브라질로 망명한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1941년에 자신의 전기인 '어제의 세계'를 쓰고, 1942년 아내와 함께 동반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가 견딜 수 없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절대 되돌아 갈 수 없는 인간성의 상실은 어느 정도 무게였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로비보이였던 제로는 구스타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To be frank, I think his world had vanished long before he ever entered it
but, I will say, he certainly sustained the illusion with a marvellous grace
(솔직히 말해 나는 그의 세계가 그가 들어가기 훨씬 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나는 말할거요. 그는 분명 경탄할만한 우아함 품위로 그 환상을 지켜내 유지했었다고.)’

이미 사라진 세계, 그 세계를 떠다니는 우아한 유령(Vanished World, Graceful Ghost)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사라진 시대에 바치는 작은 조각이라 생각했다. 작고 반짝거리는 유리조각...
분명 그 세계는 아주 오래 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조각들이...흩어져 있다고 느낀다.
공동체를 향한 배려와 믿음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지켜나가려는 ‘우아한 유령’같은 적은 수의 사람들.

나는 그들을 향수어린 경의로 바라본다. 


- (원치 않더라도) 이 글을 '2017.2.6부터 1년동안 탐라를 지켜온 파란아게하' 님에게 바칩니다.
https://redtea.kr/?b=31&n=77708

아 이 곡도 같이.

https://youtu.be/YufmYPb2z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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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과거에 바치는 작은 조각
  • 홍차넷의 벨에포크는 언제일까요? 지금일까요?
  •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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