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8/05 16:55:10
Name   Las Salinas
Subject   내 짧은 일방통행 연애, 단상




1. 두 달 하고도 두 달 전에, 두고두고 후회할 행동을 저질러 버렸다. 어둑한 내 자취방 안에서, 내 옆에 누워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그 오빠의 옆모습을 한순간 멍하니 쳐다보았을 때, 왜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을까.
오빠, 나 오빠 좋아해. 한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시선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에게로 옮겨왔다. 그에겐 아무리 잘 해봐야 게임 같이 하는 동생 정도로 보여졌을 그 동생의 폭탄 선언.

2. 그리고 이틀 뒤에 다시 만났을 때, 그 오빠가 나에게 물었다. 너, 지금 나 좋아하는 게 그냥 전 남자친구랑 힘들고 그래서 일시적으로 생긴 그런 감정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해? 나는 정말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때는 나도 긴가민가한 상황이었다. 확실히 그 전 남자친구랑은 긴 연애 끝에 내가 너무 지쳐버려 헤어지자고 했던 상황이었고 헤어진지도 정말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나로서도 예정에 없던 고백 아닌 고백 같은 느낌이었다. 고백을 하면서도, 이틀 뒤 이렇게 다시 만나서도 어쨌든 나는 오빠가 사귀는건 무리야, 하면서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냐면 오빠는 그렇게 나에게 이성으로써의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랬는데,

3. 덜컥 오빠도 그래 한번 사귀어 보자. 라는 투로 승낙해 버렸다. 어? 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렸다. 쎄한 분위기, '너와 나는 좀 아닌거 같다' 는 말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그 말 들으면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어야지, 하는 생각 사이사이 그래도 혹시 따위의 부정한 상상이나 끼워넣던 나였지만 막상 승낙의 말을 듣고 나니 이런저런 걱정 따위 하늘로 승천해 버렸다. 그냥 그때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4. 결국 이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내 마음은 부정하고 싶어했지만, 직감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건 내 일방적인 감정의 전달이었고 부끄럽다는 변명으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오빠였다. 몇 해만 지나면 서른을 앞둔 나이지만 변변한 연애 경험이라곤 군대 가기 전 세 달 간의 연애가 다라고 얼버무렸던(물론, 역시 이것도 지금은 알 길이 없지만) 그 오빠는 사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연애라는 걸 한번쯤 해 보고 싶다는 생각, 뭐 여자애가 좋다는데 나쁘지 않겠지 하는 생각 등으로 내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아주었던게 아닐까 싶다. 그 오빠가 어떤 불순한 마음에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그런 의도가 없었던지는, 궁금하지만, 이제와서 알 수는 없게 된 것들이다.

5. (내 쪽에서) 오해만 잔뜩 쌓이고 끝난 내 일방통행의 끝은 어처구니없고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만나기로 한 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오가는 역사에서, 오빠가 자주 가는 곳들을 기웃거리면서 삼십분 남짓 기다리던 내가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몇시간 뒤 불쑥 '자버렸다'는 그의 카톡과 함께. 그렇게 짧은 두 달간의 내 연애는 끝이 나 버렸다. 나에게 '그걸 왜 기다리냐 연락이 없으면 그냥 집에 가지' 라는 말이 돌아왔다. 지난 몇시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하던 나는 마음속 무언가가 바스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결국, 그 오빠는 나를 나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그만 사귀자고 했다. 사실은 내가 두 달 전에 들었어야 했을 말 같은 거였는지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6. 우습게도, 지금까지도, 더 잘 해줄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쉽다. 헤어지기 전에 해보고 싶은것도 얘기하고 싶은것도 가보고 싶은곳도 너무 많았다. 얼마 가지 못할 거라는 직감 때문이었나보다. 근데 막상 무겁고 오래된 내 DSLR을 들고 가고 싶었던 곳에 찾아갔을 때, 오빠는 지루한 듯이 혼자 앞으로 막 걸어갔을 뿐인데. 밖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길가 스타벅스에 앉아 프라푸치노 앞에 두고 조그만 액정으로 하는 하스스톤이 더 재미있던 오빠인데.

7. 자길 왜 좋아하게 됐냐는 질문엔 뭐라고 딱 꼬집어 말 할 수가 없다. 글쎄, 몇가지 사건이 있기는 한데 결정적인 건 잘 모르겠다. 그냥 기억 남는 건, 같이 술마시고 다들 어느정도 취한 상태에 그 오빠가 내 허리를 감았는데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더란 것? 갓 졸업하자마자 딱히 주변 친구들도 없이 서울 올라와 혼자 직장생활하는 나에게 말동무가 되어줬던 것? 뭐, 이제와서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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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몇일 전 가입해서 첫 글이 이런 글이라니..
근데 왠지 어딘가 글을 올리고 싶었어요..... 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그런 거?
두서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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