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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4/26 23:30:05 |
Name | 피아니시모 |
Subject |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면 아주 x되는거에요 |
태종의 후궁중에 신녕옹주 신씨라는 후궁이 있었다. 옹주라 하면 보통 왕의 서녀를 말하지만 조선 초기엔 후궁이나 왕자의 부인에게 주는 칭호로 쓰이기도 했다. (훗날 신빈으로 추존되는 데 그게 수백년 뒤 고종때이다..고종이 대한제국 선포이후 추존하였다.) 신씨는 본래 원경왕후 민씨의 몸종 출신으로 출신만 따지고본다면 굉장히 미천한(..;;) 출신이었다. 여튼 그렇게 태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은 신씨는 태종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중 하나가 되었다. * 물론 원경왕후와 태종의 파이팅은 한층 더 치열해졌겠지만..-_-; 두 사람 사이에는 정신옹주라는 딸이 있었는 데 태종이 총애하는 후궁의 딸이었던데다가 본래 태종이 자기 자식에게만은 이렇게 물러터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자식바보였기때문에 그 사랑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 정신옹주가 당시 기준으로 시집을 갈 떄가 되자 태종은 점쟁이까지 고용하여 사주 좋은 남자를 찾고자 하였다. 그렇게 사주 좋은 남자를 찾아 떠난 점쟁이는 이곳 저곳을 돌던 와중 춘천 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이속]이란 인물의 집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점쟁이는 이곳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속의 말이 걸작이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貞惠翁主)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 (...) 당연히 이 말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태종 본인은 물론이고 신하들 모두가 빡쳐버렸다. 본래 이속이란 사람부터가 평상시 오만했던 성격탓에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당장 왕의 명을 받고 온 점쟁이에게 저런 말을 한 자가 평상시 다른 사람들에겐 뭐라고 하고 다녔겠는가 여튼 조정은 한바탕 뒤집혔고 단단히 빡친 태종은 우선 이속을 체포하여 곤장 100대를 후려쳤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깐 신하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대대적으로 반발하며 태종에게 따지고 나섰다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 심지어 조말생은 이속 저새끼 저거 역모나 다름없는 행동을 했는데 왕이 너무 착하고 마음이 약하다면서(..) 태종에게 이속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을 보내야한다고 건의한다. 태종은 이런 신하들의 행동에 흐뭇하게(?) 바라보며 못이기는 척 조말생의 말대로 이속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을 보내버렸다. 그렇게 이속은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전재산을 몰수당한 뒤 귀양을 가게 되었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에 이어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이 반발하고 나선거다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 왕의 명을 거역하고 왕녀의 혈통을 운운한 죄는 역적과 다를 바 없으니 그의 목을 쳐야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렇듯 신하들은 태종을 달달볶기 시작했고 이게 하두 거세지기 시작하자 태종은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못이기는 척 이속을 관노로 전락시킨 뒤 그의 아들에게 금혼령을 내려 평생 혼자 지내게 하였다. 입 잘못 놀린 대가로 이속은 재산을 몰수 당하고 귀양을 간 뒤 관노가 되고 그 자식은 평생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하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속을 죽여야한다고 했고 아에 이속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없는가 탈탈 털고 나섰다. 끝내 상중에 5촌당숙과 술을 마신 일이 걸렸고 이 일로 인하여 이속의 친척들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결국 이들은 곤장 80대에 처해진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태종의 뒤를 이어 세종이 즉위하자 신하들은 다시 들고일어났다. 이속은 역적이니 죽여야한다고(..) 천만다행으로 세종은 이를 기각시켰고 더 이상 이 일을 여기서 끝맺음을 지었고 이속은 덕분에 살긴 살았다. 곤장 100대에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귀양을 간 뒤 관노가 되고 아들은 고자 평생 결혼도 못하고 대도 잇지 못하는 데다 5촌당숙과 친척들은 곤장 80대를 맞았지만 그래도 살긴 살았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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