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5/28 19:00:07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권력과 프라이버시
권력도 재화와 비슷해서 가치를 저장해줄 매체가 필요해요. 개인의 일신에 카리스마의 형태로 보관하기, 한 가문/혈통에 계승신화의 형태로 저장하기 등등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매체구요.

또다른 유명한 권력저장방식이 바로 프라이버시예요. 대체로 한 사람이 보유하는 프라이버시는 그 사람의 권력 보유량에 비례해요. 계급이 낮을 수록 지킬 수 있는 프라이버시가 (자의반 타의반) 줄어드는 반면 계급이 높을 수록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프라이버시를 원하는 만큼 확보할 수 있지요. 명백한 곳에선 신화가 발생하지 않아요. 신화는 세간의 접근이 차단된 곳에서 발생하지요. 올림포스 꼭대기, 신단수, 동해바다, 킬리만자로, 하늘위 등등 '구중궁궐'은 그래서 세속에 재현된 올림포스예요. 인위적으로 서울 한가운데 만들어둔 절대적인 프라이버시의 영역, 신화의 원천, 권력의 저장소.

그래서 가만보면 전통왕조가 위기에 처하면 궁궐재건축에 들어가요. 옛날 사학자들은 이런 행위를 두고 '미친 놈/년이 이토록 위급한 시점에 쓰잘데기 없는 데다 돈을 쏟아부었다'고 막 쌍욕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요즘들어 수정사학(revisionist history) 좋아하는 분들은 오히려. '야 냉정하게 바라봐야지. 왕조가 권력누수로 망해가는데 뭐라도 해야할 거 아냐. 누수를 막기 위해 권력발전소 같은 걸 지었던 거 아니겠어' 라고들 해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무기체계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건축도 혁신적으로 변했어요. 더이상 사람들은 요새와 성곽을 만들지 않게 됐지요. 하지만 대포와 로켓의 발달은 권력의 저장방식에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어요. 한양성곽이 무너졌지만 청와대는 경복궁과 별 차이 없는 방식으로 권력을 저장하고 생산했지요.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 사정이 조금 달라졌어요. 미디어의 발달 덕분인데, 미디어환경이 크게 변하면서 각 개인의 채증능력과 정보확산능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이로 인해 프라이버시의 절대총량이 (체감상) 크게 줄었어요. 그래서 권력의 저장방식으로서 프라이버시의 신뢰도가 지속적으로 깎여나갔지요. 폭로전과 여론전이 이전보다 훨씬 쉽고 훨씬 효과적으로 수행됨에따라 '내 프라이버시를 지키기보단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를 공격함으로써 타격을 입혀야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발생했고, 2010년 정도를 전후로 이 아이디어가 최초로 국내 정치권 안에서 '채택'된 게 2012년 댓글부대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경향을 가장 극적인 형태로 보여준 건 역시 박근혜 탄핵사건이에요. 사법부를 완전히 우회해서, 혐의에 대한 판단은 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하기 전에 여론의 힘만으로 대통령을 사실상 날려버렸지요. 헌재의 판단은 사실상 여론재판결과에 대한 '추인'에 가까웠구요 ㅎㅎ 결과적으론 잘 되긴 했는데 (경협주도 떡상하고ㅋ) 그 절차란게 돌이켜보면 참 별 거 없어요. 적극적인 언론 하나 끼고서 벌인 대규모 유죄추정 미투운동에 불과했던 것...

고은, 정봉주, 이명희, 조현민 건들은 디테일이야 조금씩 다를지언정 본질적으로는 현대에 들어 달라진 여론전의 위상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에요. 기존에 그들의 권력을 지탱해주던 희미한 구중궁궐(프라이버시) 실드가 벗겨지면서 백주대낮에 빨개벗겨 내던져지니까 저렇게 타작을 당하게 된 거지요. 탈신화화랄까. 이 중에 사법부의 판단이 나온 케이스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주목할 만해요.

여러분이 이걸 반기든 아니든 이제 프라이버시의 시대는 가고 크고작은 폭로와 여론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시민 여러분은 어서 빨리 싸이월드 미니홈피부터 삭제하도록 합시다.

(타임라인용 글감이었는데 넘나 길어서 튕겨나온 것)



25
  • 나는 내 아내를 저장하지 못했습니다.
  • 춫천
  • 이렇게 완벽한 싸이월드 PPL이라니...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105 음악야밤에 쓰는 개인적인(?) 교향곡 이야기 - '합창'과 브람스 1번 11 Vinnydaddy 17/03/08 5894 6
4589 도서/문학알료사 6 알료사 17/01/10 5894 12
1776 일상/생각바보 크리스마스 8 OshiN 15/12/15 5894 5
12925 일상/생각나도 괜찮은 사람이고, 너도 괜찮은 사람이야. 4 아재 22/06/17 5893 37
10313 기타바둑시리즈.jpg 3 김치찌개 20/02/22 5893 3
8661 오프모임[재시도] 12월 22일 토요일-2018년 마지막 타로리딩 세션 18 T.Robin 18/12/20 5893 7
9003 일상/생각자판기 커피 받아서 아메리카노 만드는 양반들 있네요 7 화이트카페모카 19/03/26 5893 0
13335 요리/음식주관적인 도쿄권 체인점 이미지 8 向日葵 22/11/20 5892 11
11471 과학/기술(번역)지구공학의 장기적 결과 ar15Lover 21/03/06 5892 2
8056 사회넷상에서 선동이 얼마나 쉬운가 보여주는 사례 14 tannenbaum 18/08/14 5892 9
7596 정치권력과 프라이버시 30 기아트윈스 18/05/28 5892 25
5003 도서/문학홍차박스에 남긴 선물 :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5 진준 17/02/25 5892 9
3806 역사복권왕 숙종 12 피아니시모 16/09/30 5892 0
10657 경제지난 주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장에서 뭘 많이 순매수했을까 7 존보글 20/06/06 5891 2
6471 역사[한국사] 한국판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 6 키스도사 17/10/27 5891 0
9152 게임스팀게임 네모와디오(Nemo_D.O) 모바일 구글플레이 출시 11 mathematicgirl 19/05/04 5891 4
12051 일상/생각'난 떡볶이 별로....' 이신분들 계십니까? 50 Groot 21/09/06 5890 0
11379 경제전통 자동차 브랜드는 파운드리를 꿈꾸는가? 6 lonely INTJ 21/01/25 5890 4
12003 일상/생각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4 lonely INTJ 21/08/22 5889 7
11446 스포츠[오피셜] 추신수 전격 국내 복귀, 신세계와 연봉 27억원 계약 2 김치찌개 21/02/24 5889 0
10784 IT/컴퓨터애플워치 후기 34 Cascade 20/07/15 5889 0
10256 음악마중가는 5월 10 바나나코우 20/02/02 5889 3
2982 방송/연예엑소의 새 엘범이 나왔습니다. 2 Leeka 16/06/09 5889 0
9501 스포츠[MLB] [오피셜] 류현진 보스턴전 2자책..비자책으로 정정 10 김치찌개 19/08/02 5889 2
9520 IT/컴퓨터마이크로소프트의 방송플랫폼 믹서 이용후기 4 BiggestDreamer 19/08/07 5888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