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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6/17 00:35:26
Name   호타루
Subject   작전과 작전 사이 (9) - 제궤의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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堤潰蟻穴
한비자 유로편에서 유래.
개미구멍이 둑을 무너뜨림.
사소한 결함이라도 손쓰지 않으면 큰 재난을 당함을 이르는 말.



원래 오늘 세바스토폴과 하리코프를 둘 다 끝내려고 했는데 이게 웬걸,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세바스토폴만 가지고도 글이 엄청나게 나오네요.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걸 되짚어보면, 중부에서는 중부 집단군이 모스크바 인근에서 대판 깨질 위기에 처했다가 르제프에서의 신들린 모델의 방어 덕분에 완전 섬멸을 피했고,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련의 동계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북부는 또 어떻습니까? 무리해서 류반 지역에 공세를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13만 명의 병력이 포위당하고 결국 당시 소련군의 영웅이었던 블라소프가 독일에 항복하는 치욕적인 대패를 당해야 했으며, 제16군을 포위 섬멸하려 한 데미얀스크 포위전도 (그나마 이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습니다만) 결국 공중보급과 지형적 유리함을 앞세운 독일군이 끝까지 버티는 데 성공하면서 소련의 공격은 그야말로 공전(空轉)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부라고 딱히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어요. 다만 이쪽은 그런대로 꽤나 볼 만한 상황까지 흘러갔다는 게 차이점이지만.

이게 어째 지도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전 상황을 좀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 이전 상황을 설명할 지도가 잘 찾아지지 않습니다) 반쯤은 말로 때우는 건데... 그냥 이야기하면 역시 헷갈리니까 크림 반도 지도부터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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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고 계시는 지도가 바로 근래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해 한동안 엄청 시끄러웠던 바로 그 크림 반도입니다. 크림 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가 세바스토폴(Sevastopol, 크림 반도 남서쪽)인지라 세바스토폴이 크림 지역의 수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세바스토폴은 우크라이나에 있던 시기나 러시아에 편입된 시기나 특별시 취급을 받아서(지금도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연방시 급입니다) 실제로 크림 공화국의 수도이자 행정적 중심지는 반도 중부에 있는 심페로폴(Simferopol, Симферопoл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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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크림 반도는 남부 해안지역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지형이 매우 평탄한 터라 심페로폴이 지형적으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 지역의 공방전은 주로 구릉이 잔뜩 낀 끝자락인 세바스토폴 및 병력의 상륙 가능성이 있는 크림 반도 동쪽의 케르치(Kerch, Керч) 인근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케르치 반도를 전부 석권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지도의 철길을 보면, 케르치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짧게 남쪽으로 빠지는 곳이 있죠? 거기가 페오도시야(또는 페오도시아 : Feodosiya, Феодосия)입니다. 옛날에는 카파(Caffa 내지는 Kaffa)로 불렸던 도시인데, 14세기 몽골의 킵차크 칸국이 도시를 박살내기 위해 흑사병에 걸린 시체를 투석기로 던졌던(!!!!) 바로 그 카파 공방전의 카파입니다. 여기에서 제노바로 상선이 이동하면서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버린, 그야말로 나비효과의 진수를 보여주는 그 도시인데요... 바꿔 말하면 그 강한 몽골 군대가 시체를 던져 가면서까지 점령하고 싶었던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중요 보급기지였다는 이야기죠. 게다가 이 일대의 해변은 꽤나 상륙하기 좋은 지역이었고, 그래서 이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동계 공세는 케르치와 페오도시야 양 지점에서의 상륙작전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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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보시다시피 북쪽은 제51군이 붉은색 별로 표시된 케르치 시가지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상륙하고자 했고, 남쪽에서는 제44군이 케르치를 지나쳐서 페오도시야에 상륙하고자 했습니다. 당연히 이는 육해군 공동 합작 작전이었고, 목표는 세바스토폴을 한창 공략하고 있던 제11군의 섬멸이었습니다. 이 공세를 기획했던 것은 훗날 소련군 원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표도르 톨부힌(Fyodor Tolbukhin). 그런데 작전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요, 지도에서야 두 군데에 상륙하는 것처럼 표시되었지만 실은 무려 여섯 군데에서 소규모 병력으로 동시다발적인 상륙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나중에 독일군의 주의가 이쪽으로 몰린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상륙하게 될 페오도시야는 빼고 이야기한 거죠. 오마하 해변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벌어질 당시 셰르부르나 캉 등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기습 상륙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병력 및 함대의 지원이 충분한 상태에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매우 빡세게 벌어진 상륙전이었고... 이번 소련이 계획한 상륙전은 이미 오데사 공방전을 통해서 반쯤은 전력이 박살난 소련군 흑해 함대의 어설픈 뒷받침 아래에서 진행되어야 할 상륙전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간단하게 말해서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죠. 특히나 상륙작전은 그 특성상 공격자가 상당한 병력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요. 게다가 공중에서 독일군이 뜨기라도 하면 더 큰 피해를 입어야 할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독일군으로서도 걱정되는 점이 있었는데 이놈의 세바스토폴이 하도 백기를 들어올리지 않으니까 당시 세바스토폴 공격을 지휘하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제11군의 이 병력 저 병력을 닥닥 긁어모아서 공세를 퍼붓는 판이었고 당연히 점령 지역을 지켜야 할 병력은 최소한으로 남겨둔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그 드넓은 케르치 반도(크림 반도의 동부)를 지키는 병력이 딱 1개 사단, 제46보병사단뿐이었습니다. 백업이라고 해 봤자 약체인 루마니아 군 기병여단 딱 하나... 게다가 저게 지도에 축척이 없어서 그런데 크림 반도의 중심부인 심페로폴에서 케르치까지 이르는 도로보급선은 무려 200 km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였습니다. 겨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대충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에서 목표까지 밀고 들어가야 할 선의 1/5에 달하는 장거리입니다. 게다가 선봉 부대가 냅다 밟으면 되는 공격과는 달리 이건 보급선이라서 그 수비 난이도는 일반적인 공세보다 더 까다로웠고, 그 점이 독일군으로서는 큰 문제였죠.

아무튼 작전은 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륙 준비를 항공정찰로 보고 예하 병력들에 미리 경고를 날렸고 상대적으로 병력이 충만한 독일군이었던지라 첫 공세는 그야말로 재앙이었습니다. 하도 큰 숫자를 만나다보니 3~400 정도의 손실에는 무감각해지게 된 것이 동부 전선이기는 한데 그 정도의 숫자도 재앙 맞습니다. 처음에는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독일군도 곧 대응을 시작하여 케르치 일대에 폭격기가 떴고, 소련군은 케르치에서는 거의 이렇다할 전과를 올리지 못합니다. 일례로 케르치 반도 북쪽을 수비하던 제97보병연대의 경우 병력 손실 약 40 명인데 비해 소련의 병력 손실은 거의 8백 명(사망/부상 합산). 대충 20 대 1의 교환비를 보였으니 공격이 지지부진했던 건 당연하죠.

소련군의 다음 순서는 페오도시야였습니다. 두 대의 경순양함과 여덟 대의 구축함을 동원해 가며 상륙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2만 6천 여 명의 병력을 한 군데에 몰아서 상륙했던 것이라 일개 보병사단이 막기에는 버거운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제42군단의 지휘관이었던 한스 그라프 폰 슈포네크(Hans Graf von Sponeck) 중장은 제11군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게 후퇴를 요청하지만 폰 만슈타인은 제73보병사단과 제170보병사단을 증원으로 보내고 있다며 후퇴 불가 방침을 고수합니다. 페오도시야의 병력은 루마니아군을 동원해서 막으라는 명령과 함께요. 폰 만슈타인은 제42군단(1개 보병사단, 1개 기병여단)이 충분히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봤는데, 글쎄요... 이미 페오도시야에 상륙한 소련군은 그 교두보를 공고히 하고 있던 상황이라서 그게 말처럼 쉬웠을까요? 아무튼 그래서 폰 슈포네크 중장은 아예 제11군과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후퇴를 합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지도를 보세요. 딱 양쪽에서 둘러싸여서 섬멸당하기 좋은 상황 아닙니까. 거기다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일대의 지형은 워낙 평탄한 터라 엄폐물이 되어 줄 지형도 없었습니다. 하필이면 위에서 말했던 구릉의 동쪽 끝자락이 페오도시야였거든요. 즉 제46보병사단이 관리하던 지역은 완전 평탄한 평지 그 자체였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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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월 3일이 되자 소련군이 크림 반도의 동쪽을 장악합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죠. 아니 많죠. 간단히 정리를 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폰 슈포네크를 옹호하는 근거 :
- 소련군 2개 군, 어림잡아 4만 명 가량의 병력에 맞서야 하는 독일군의 규모는 고작 1개 사단뿐이었다. 1개 사단의 편제규모는 1만 5천 명 미만이다.
- 아무리 해안이라고는 하나 이 지역은 워낙 평탄한 관계로 일단 해안에서 상륙하여 교두보가 확보되면 방어가 쉽지 않다.
- 동쪽만 방어해야 하면 모르겠는데 양쪽에서 상륙한 터라 포위섬멸의 위험이 크다. 더구나 서쪽의 페오도시야를 방어하던 병력 일부가 동쪽의 케르치 방어를 위해 투입된 상태였다.

폰 슈포네크를 비판하는 근거 :
- 이미 케르치 반도에서의 싸움에서 보았듯이 보통 상륙전은 공격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 독일에게는 항공지원이 있었다. 당시 제공권은 독일이 장악한 상태였다.
- 아무리 병력이 부족하다지만 인근 루마니아 군을 투입하여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루마니아 군의 병력은 적어도 2만 명이었으니 그들이 전투력이 영 아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철수한 것은 적에게 너무 겁먹었다는 증거이다.

진실이 어느 쪽에 가까웠을지는 가설의 영역이라서 군사학자들의 의견을 빌려야 하겠습니다만(제가 글을 쓰면서 참고하고 있는 로버트 커추벨 중령의 경우 소련군의 위세가 별 것 아니었다는 쪽에 한 포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독일군은 케르치 반도에서 철수했고 소련군이 동쪽을 접수했습니다. 폰 만슈타인은 조용히 폰 슈포네크를 게슈타포로 보내버렸고, 당연히 사형판결...이 났습니다만 폰 만슈타인의 건의를 받아들인 히틀러가 특별히 감형하여 7년 징역에 처합니다. 폰 만슈타인도 제46보병사단의 상황이 어려웠다는 것은 인정한 거죠.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터지자 당시 SS를 지휘하던 히믈러는 보복으로 여러 인사를 처형하는데 그 중에 폰 슈포네크가 끼어 있었습니다. 자기 부대를 위해서는 명령 불복종까지 감수해 가면서 퇴각한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유대 인 처형에 앞장섰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는 설령 나치가 아니더라도 인종차별적일 수 있고 절멸 계획을 별 생각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실례로 거론되곤 합니다. 절멸 계획이라는 끔찍한 짓의 실행과 나치는 꼭 불가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리고 군사적으로는 유능했지만 인간말종이었던 남부 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는 이 소식에 길길이 날뛰면서 제46보병사단 예하 모든 장병과 지휘관들의 명예를 박탈하고 진급까지 금지시켜 버립니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이렇게 되자 폰 만슈타인도 별수없이 세바스토폴을 공략하던 병력을 일부 빼돌릴 수밖에 없었죠. 이 덕분에 세바스토폴의 목을 조이던 독일군의 손이 조금 느슨해졌고 소련군은 평지 교두보까지 확보한 덕에 다음 공세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인데도 바로 공세를 취하지 못했던 것은 역시 소련군의 상태가 공세를 취하기에는 물자와 병력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상륙 작전으로 잃은 소련의 병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12월 30일에 루마니아군이 페오도시야의 소련군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게 실패로 돌아간 바 있는데, 이 병력까지 포함하여 추축국 군대의 손실은 약 6천 6백 명. 그런데 해당 기간 동안 소련군의 손실은 무려 4만 2천 명에 달했고, 사망자의 비율도 독일군은 17% 가량인 데 비해 소련군의 사망자 비율은 무려 77%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 손실이었습니다. 거의 상륙에 동원한 군 하나를 날려먹은 셈이죠.

여기에서 독일군의 반격이 터집니다. 페오도시야는 기본적으로 시가지이기 때문에, 방어하기에도 개활지보다 상대적으로 용이하죠. 그리고 근처에 개활지밖에 없는데다가 목이 아주 좁은 특성상 선을 긋고 방어하기 아주 쉽기 때문에 이 페오도시야가 누구 차지가 되느냐에 따라서 동계가 지나고 차기 춘계에 있을 전투에서의 주도권의 향방이 결정되게 마련이었습니다. 일단 1월 첫 주 시점에서는 페오도시야를 상륙해서 기습 점령한 소련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가 막힌 반격이 터지는데요, 폰 만슈타인은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최소한 페오도시야 바깥쪽으로 소련군을 밀어버리기 위해 기왕 보냈던 제170보병사단에 제132보병사단까지 더해서 빠르게 밀어붙였습니다. 여기에는 새로 편성된 크림 반도 항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Robert Ritter von Greim)의 항공지원이 덧붙여졌죠.

게다가 소련군이 박자까지 맞춰 주었습니다. 독일군의 공세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기껏 케르치에 갖다놓은 소련군 병력을 최대한 빨리 서쪽으로 갖다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밍기적대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거죠. 어느 정도였냐면 아예 참호조차 팔 생각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치명타였어요. 일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소련군은 적은 병력을 페오도시야 후방의 수다크(Sudak, Судак)로 보내 교란을 시도했지만 교란임을 눈치챈 폰 만슈타인은 최소한의 병력만 보내서 서쪽을 방비하고, 곧이어 몇 대의 3호 돌격포 - 보통 애칭으로 삼돌이로 많이 통하는 바로 그 놈 - 를 동원하여 페오도시야에서 제44군을 밀어버렸습니다. 소련군의 실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독일군의 주 공격이 페오도시야가 아니라 그 북쪽의 철도 결절점인 블라디슬라보브카(Vladislavovka, Владиславовка)로 향할 줄 알고 여기에 제한적인 반격을 가했는데, 독일군은 돌격포를 동원해서 소련군의 T-26 전차 10여 대를 잡아버린 것이죠. 소련군이 만일 병력을 최대한 빨리 서쪽으로 갖다놓았다면 예비대가 근처에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예비대가 너무 후방에 배치된 관계로 페오도시야가 먼저 떨어져버렸던 것입니다.

이 때 제154소총병사단과 제236소총병사단이 포위 섬멸당했는데, 일전에 오데사나 세바스토폴 등지에서 해군을 이용해 사단과 민간인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던 소련군은 다시 한 번 같은 방법을 시도합니다만 이번에는 항공지원 때문에 실패하고 결국 5천여 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제236소총병사단의 사단장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모로즈(Vasily Konstantinovich Moroz) 소장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총살대로 끌려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44군 사령관 이반 표도로비치 다시체프(Ivan Fyodorovich Dashichev)는 이 때문에 체포당하기는 했어도 죽지는 않고 4년 노역형을 선고받았고(아오지 생각하시면 됩니다), 억울하다는 청원이 받아들여져서 전선에 복귀할 수는 있었지만 명예는 모조리 박탈당했고 계급도 강등당했습니다. 1953년 스탈린 사후에야 증거 불충분으로 명예와 계급이 회복되었죠.

그렇게 페오도시야가 떨어지고, 칼자루는 이제 독일이 쥐었습니다. 폰 만슈타인은 아예 케르치 반도에서 소련군을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독일군도 동계에 좀 무리를 했던 터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고, 결국 양군은 페오도시야 동쪽에서 서로 참호를 파고 철조망을 치며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열받은 스타브카는 이 좁은 구역에 무려 9개 소총병사단을 동원하여 - 이 정도면 웬만한 군 하나 이상입니다 - 4월 11일까지 무려 네 차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는데... 독일 포병에 대응할 수단이 부족해서, 전차는 진창에 막혀서, 공군을 동원하여(이 때문에 소련군은 하루에 93대의 전차를 잃는 기록적인 패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전차부대를 그대로 박아버려서(이 공격을 지휘했던 게 군사적으로는 무능했지만 스탈린의 충복이라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레프 메흘리스(Lev Mekhlis)입니다) 등등... 물론 독일이라고 해서 삽질을 안 했던 건 아니긴 합니다. 놀랍게도 폰 만슈타인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이번에는 거꾸로 준비되지 않은 기갑사단을 소련군의 방어진에 돌격시켰다가 거의 부대 전차의 1/4이 날아가버렸거든요. 무리수이긴 했는데, 소련군의 계속된 공세로 인해 중요 지점(페오도시야)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파쇄공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는 합니다.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는 거죠. 실제로 이로 인해 소련군의 공격이 둔화되는 성과가 나오면서 지속적으로 얻어맞는 독일군도 약간 숨통이 트였고 그래서 4월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네 번의 공세는 그야말로 소련군에게는 재앙을 넘어선 재앙이었습니다. 세바스토폴에서 싸우던 병력까지 포함해서 그냥 문자 그대로 병력을 들이부었는데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여기서 희생된 소련군 병사의 수는 무려 35만 2천 명. 거의 민스크의 패배에 필적하는 수준입니다. 반면 독일군의 손해는 고작 2만 4천 명을 밑돌아 교환비만 14.5 : 1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잊어버릴까봐 말씀드리는데, 세바스토폴은 명백히 교전 중이었습니다. 즉 폰 만슈타인은 양쪽에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이죠. 과연 폰 만슈타인입니다.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밖에요.

그리고 공군의 역할도 여기에서 아주 중요했습니다. 해상수송이 강제되는 환경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병력 수송 및 물자 수송을 최대한 방어했고, 결국 아주 좁은 지역에 무려 3개의 군(거의 20개 사단)을 박아넣었으면서 그 군을 지원할 물자가 다 떨어져버리는 사태가 왔습니다. 이걸 알고 있었는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독일군이 아예 선제공격을 벌이는데, 이른바 느시사냥 작전(Operation Bustard Hunt, Unternehmen Trappenjagd)입니다. 당연히 이걸 알고 있던 소련군 사령부는 스탈린에게 후퇴를 건의하지만 스탈린 이 양반도 히틀러의 영향을 단디 받았는지 후퇴를 거부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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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라도 적이 눈앞에 있으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 법이거늘, 소련군은 또! 또!!! 독일군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이해되는 일이기는 했어요. 수적 우세가 최소 두 배는 되었으니까. 근데 바르바로사에서 수백 개 사단을 날려먹고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주제에 독일군을 상대로 방심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프랑스를 6주 만에 접수해 버린 폰 만슈타인이 아닙니까. 게다가 지휘관인 드미트리 코즐로프(Dmitry Kozlov)는 근처에서 소련군을 노려보고 있는 공군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5월 8일이 되자 강력한 항공지원을 염두에 둔 폰 만슈타인이 엄청난 양의 준비 포격을 실시한 후 그대로 방어선을 들이받아버렸는데요, 이에 더해 1개 대대를 소련군 방어선 뒤쪽으로 보내 교란작전을 벌이는 대담한 짓까지 벌입니다. 눈 뜨고 소련 흑해 함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바로 소련군은 혼란에 빠졌고, 단 100명의 손실을 입으면서 가장 골치아픈 부분인 적의 방어선에 들이받는 과정이 손쉽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 제51군 사령관 블라디미르 리보프(Vladimir Lvov) 중장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는 불운까지 겹치면서 반격은 시도도 해 보지 못하고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단 6개 사단과 1개 전차사단 그리고 2.5개 루마니아 사단만으로 무려 19개 사단을 밀어내 버리는 폰 만슈타인의 전술적인 완승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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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형적인 돌파 후 고속기동 포위가 이루어졌습니다. 독일군의 발목을 붙잡는 과정에서 소련군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차라리 나쁜 날씨가 훨씬 더 독일군의 발을 늦춰버렸죠. 이때 항공폭격을 지원했던 게 바로 붉은 남작의 사촌동생인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입니다. 5월 12일에 제2차 하리코프 전투가 터지면서 폰 리히트호펜은 다수의 항공지원을 그쪽으로 돌려야 하긴 했습니다만 이미 상황은 거진 종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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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후퇴하는 적군을 앞질러가 버리면서 소련군의 퇴로는 끊겨버렸고, 소련군은 그저 탈출하기 위해서 싸울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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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월 20일까지 완전히 소련군의 병력이 크림 반도의 동쪽에서 싹 쓸려나가면서 마침내 독일군은 서쪽의 세바스토폴 공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련군으로서도 엄청나게 재앙적인 결과가 나타났죠. 당장 느시사냥 작전으로 잡힌 포로만 15만 명 가량이 됩니다. 이 케르치 반도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잃은 병력이 약 3만 8천 명 가량 되는데요(루마니아군 포함), 소련군의 병력 손실은 무려 57만 명에 달했으니 15대 1이라는 압도적인 교환비로 수비와 반격에 성공해버린 것입니다. 가히 폰 만슈타인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그런 전장이었던 거죠. 그리고 세바스토폴은 그 유명한 먹어랏 구스타프 등을 동원한 결과 마침내 1942년 7월에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고, 이 느시사냥 작전은 공중과 지상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작전이 됩니다.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코즐로프와 메흘리스는 NKVD의 손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코즐로프는 중장에서 소장으로 강등당했고, 메흘리스 역시 두 계급 강등당했으며, 다시는 최전선에 나서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가네요. 이제 하리코프만 남았습니다.



5
  • 좋은 연재 일단 닥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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