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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8/28 12:27:21
Name   王天君
File #1   memories_of_the_sword.jpg (543.3 KB), Download : 17
Subject   [스포] 협녀: 칼의 기억 보고 왔습니다.


해바라기가 가득한 초원, 유난히 키가 큰 한송이를 훌쩍 뛰어넘는 소녀가 있습니다. 신이 난 소녀는 만류하는 소년을 뿌리치고 인파를 헤치며 저잣거리를 힘차게 뛰어갑니다. 그렇게 소녀가 도착한 곳은 비무대련장, 그곳에는 소녀가 흠모하는 무사 율이 대련을 펼치고 있습니다. 끼를 주체하지 못한 소녀는 대련장에 난입해 율과 검을 나누고 비무 시합을 어지럽힌 죄로 병사들에게 쫓기게 됩니다. 쫓는 이들을 따돌리고 한 숨을 돌리는 소녀, 그러나 그 앞을 무림고수이자 고려의 실권자 유백이 가로막고, 이 둘은 얼굴을 가린 서로의 복면을 걸고서 가벼운 대련을 나눕니다. 유백과의 승부에서 승리한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 엄한 꾸중을 기다리지만 복면을 받아든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소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릅니다. 여태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가 바로 소녀의 친부모를 죽인 원수였다는 고백에 소녀의 새파란 대의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한국(식)”이라는 표현이 붙은 장르물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정통 장르의 뭔가를 한국영화계의 현실에선 완전히 담지 못했다”는 변명을 에둘러 표현한 문구에 불과하거든요. 후한 평을 받는 선례에서 포인트만 적당히 추출해 한국 배우와 한국 배경을 입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야심은 어지간해서는 먹히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 협녀 역시 기획과 욕심만이 더 크게 보이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영화 첫장면부터 해바라기가 가득한 풀밭과 홍이가 입은 진한 원색의 옷은 누가 봐도 장예모우 감독의 특색을 베낀 게 역력할 정도로 티가 나니까요.

일단 이 영화는 액션이 매우 나쁩니다. 무협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인물들의 재빠른 움직임과 정교한 합이 오고가는 컷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대신 영화는 씬들을 잘게 쪼개서 어떤 속도감이 있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인물들이 어떤 움직임을 취하고 무공을 보이는지 제대로 인식하기도 어렵습니다. 잦은 편집으로 흐름이 뚝뚝 끊기는 와중에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와이어 씬의 호흡은 매우 길게 가져갑니다. 중간중간 슬로우모션으로 싸움 도중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도 빈번하게 튀어나와요. 인물들이 몸을 움직이는데서 오는 속도감은 거의 없고 편집의 리듬도 전혀 일관되게 가져가지 못합니다. 제멋대로 끊어졌다 늘어졌다 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전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기성배우와 신인 배우의 연기도 멜로 영화로서의 앙꼬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이 영화의 대사는 상당수가 촌스럽고 과시용입니다.전형적이고 작위적인 사극풍의 대사들이 오가다가도, 갑자기 현대극처럼 캐쥬얼한 대사가 뒤섞이는 바람에 극의 무게감이 쉽게 흩어져버리기도 하구요. 특히나 전도연씨의 경우 대사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있고 액션은 와이어에 의존하는 바가 많아 손해보는 느낌이 가장 큽니다. 그나마 이병헌씨가 자기 캐릭터의 무게를 잃지 않고 있는 선에서 그치고 있죠.

그렇다면 이 영화가 담고있는 비극에 집중하며 감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홍이를 주축으로 한 복수극과, 설랑과 유백을 주축으로 한 멜로가 갈팡질팡하며 꼬이는 바람에 어느 한쪽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각자의 이야기에서 주변인으로 맴돕니다. 후반으로 갈 수록 홍이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유백과 설랑의 로맨스로 무게추가 기울고, 홍이의 복수극은 이 둘의 비극을 위한 소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는 이야기의 설정만을 가지고 감정을 밀어붙이려는 시나리오의 문제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기 친부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가 복수를 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교육 아래에서 진짜 증오나 원한이 생길까요. 그럼에도 영화는 홍이의 복수심이 진짜였으며 그 때문에 대단한 충격에 휩쌓인 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논리도 당위도 없는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출발시켰으니 홍이가 왜 설랑과 유백을 죽여야 하는지 보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감정이 이야기의 원동력이라면, 인물의 감정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디를 향해 움직이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 드라마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협녀는 이 기본적인 작업을 하지 않아요. 자신의 친부모를 죽인다는 조건을 성립시키기 위해 가짜 감정을 불어넣은 일종의 꼭두각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괴상해집니다. 자신의 친부모를 죽였다는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인생을 바쳐온 사람이, 자신의 친부모를 알게된 후 친부모를 죽인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가장 큰 문제는 설랑입니다. 감독은 이 여인을 대단한 애증이 얽힌 캐릭터로 구축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의 복수를 대리수행시키려는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위선의 극을 달립니다. 설랑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남의 자식에게 없는 복수심을 세뇌시키고 이용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자신의 복수는 자신이 해야 이치에 맞죠. 이 부조리는 켜켜이 쌓여서 홍이가 사실 설랑과 유백의 친자식이라는 반전에서 극에 다다릅니다.한 때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형과 그 일가족을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의 딸이지만 그 남자의 딸이기도 한 아이를 낳고 이 아이에게 거짓을 가르친 다음 자기 아버지와 맞서 싸우게 하자, 복수가 성공하면  그 남자는 자신의 친딸에게 죽게 될 것이고, 복수가 실패해도 자신의 친딸을 죽이는 애비로 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나도 죽을 것이다? 이 캐릭터에게 자신의 친자식의 인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떤 어미가 자기 속죄를 위해 친자식의 인생을 송두리째 거짓으로 말아먹고 자기를 죽이게 하나요. 영화는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인간적 고민을 아예 담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극적 그림을 뽑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인물을 만들었으니까요. 파멸만을 꿈꾸는 인물도 어떤 식으로든 지키고자 하는 도리가 있고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법입니다. 그래야 비극이 성립하고 그 과정에서 연민을 느끼게 되는거죠.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쓰면 이렇게 어딘가 텅 빈 가짜 인간이 태어나게 됩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서는 친자식의 삶과 목숨 자체를 도박에 거는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를 보고 가슴 아플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폼만 잡는 영화입니다. 칼을 휘둘러대지만 눈에 박히는 움직임이 없고, 울며 소리쳐대지만 가슴을 울리는 드라마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복수에 대한 미의식도, 철학도 없어요. 착실히 쌓은 논리와 감정이 와르르 무너질 때서야 비로서 아름다운 순간이 터진다는 기본이 없는 영화가 어떻게 보는 사람을 공명시킬 수 있을까요. 못만든 영화라곤 하기 어렵습니다. 열심히, 잘 만들었지만 촌스럽기 짝이 없을 뿐이죠. 같은 발음이지만 전 이 영화를 달리 표기하고 싶습니다.”혐녀”라고 말이죠.

@ 남자들의 산발 머리 정말 지겹습니다. 비천무에서나 하던 헤어스타일을 왜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걸까요.

@ 암살을 그렇게 번거롭게 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독침한방 찌를 거라면 무공이 뛰어난 유백 본인이 실수로 찌른 척 하며 되지 않나요?

@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의 전도연씨를 떠올려 보면, 이 영화에서 전도연씨가 부진한 건 장르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대본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 편집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설랑이 죽었나 싶었더니 살아있고, 뜬금없이 홍이가 설랑과의 대련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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