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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2/19 13:46:56수정됨
Name   눈시
Subject   1592년 4월 부산 - 충렬공(忠烈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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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동악 이안눌은 동래부사로 임명됩니다. 전쟁이 시작되었던 곳, 아직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곳이었죠. 4월 15일, 그는 자신이 본 슬픈 광경을 시로 남깁니다. 동래맹하(4월)유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이죠.

孟夏有感詞 맹하유감사 - 동악 이안눌

四月十五日 平明家家哭 天地變蕭瑟 凄風振林木
(사월십오일 평명가가곡 천지변소슬 처풍진림목 )
-4월 15일 평명(새벽)인데 집집마다 곡소리가 울려 천지를 쓸쓸하게 만들고 처연한 바람이 수풀을 뒤흔들었네
驚怪問老吏 哭聲何慘? 壬辰海賊至 是日城陷沒
(경괴문노리 곡성하참달 임진해적지 시일성함몰)
- 놀랍고 괴이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었지. 어찌 이리도 곡성이 참담한가. 임진년에 해적이 쳐들어와 그날에 성이 함몰되었다 하네.
惟時宋使君 堅壁守忠節 闔境驅入城 同時化爲血  
(유시송사군 견벽수충절 합경구입성 동시화위혈)
- 오직 그때 송부사만이 성벽을 굳건히 지켜 충절을 지켰고, 왜적이 성 안으로 들어와 일시에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네
投身積屍底 千百遺一二 所以逢是日 設尊哭其死
(투신적시저 천백유일이 소이봉시일 설존곡기사)
-시신 더미에 몸을 던져 천백에 일이명이 살아남았다오, 그런 까닭으로 이날에는 술잔을 바치고 죽은 이들을 곡한다오.
  父或哭其子 子或哭其父 祖或哭其孫 孫或哭其祖
(부혹곡기자 자혹곡기부 조혹곡기손 손혹곡기조)
-아비는 그 아들을 곡하고 아들은 그 아비를 곡하고 할아비는 손주를 곡하고, 손주는 그 할아비를 곡한다네
亦有母哭女 亦有女哭母 亦有婦哭夫 亦有夫哭婦
(역유모곡녀 역유여곡모 역유부곡부 역유부곡부)
- 어미는 딸을 곡하고 또 딸은 어미를 곡하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곡하고 또 지아비는 지어미를 곡한다네
兄弟與姉妹 有生皆哭之 蹙額聽未終 涕泗忽交?
(형제여자매 유생개곡지 축액청미종 체사홀교이)
-형제와 자매가 살아남은 자는 모두 곡을 한다오. 찡그린채 차마 다 듣지못하고 있는데 눈물이 가득하여 뺨위로 흘러내렸네.
吏乃前致詞 有哭猶未悲 幾多白刃下 擧族無哭者
(이내전치사 유곡유미비 기다백인하 거족무곡자)
- 아전이 앞으로 나와 곡하며 말했다네. 곡할 이가 있는자는 그래도 슬프지 않다오. 그 얼마나 많은가요, 시퍼런 칼날 아래 모두 죽어 곡해 줄 이도 없는 사람들이.

https://blog.naver.com/intersjh/220993648857

그는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들을 찾아내고 애도하는 데 힘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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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의 통첩에,“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앞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이와 동시에 또 수사(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ㆍ병마사(최원)ㆍ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 난중일기 1592년 4월 15일

"밤 열시 경에 영남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다.“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 4월 16일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는 임진왜란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부산에서의 일이 단 이틀만에 전라도 여수까지 닿았다는 점입니다. 그에게만 온 게 아니겠죠. 적을 처음 본 정발은 곧 경상좌수사 박홍에게 알렸고, 박홍은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리고 조정에도 보고합니다. 울산에 있는 경상좌병사 이각에게도 이 소식이 전달됐고, 부산진이 함락되는 하루 사이에 경상도군은 빠르게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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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동래성에 이르기 전, 이미 동래성에는 양산군수 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 경상좌병사 이각이 입성해 있었습니다. 전투 후 이각의 움직임을 보면 몸만 급히 온 건 아닐 겁니다. 13일에 적이 왔는데 14일 중, 늦어도 15일 새벽에 이미 울산에서 지원군이 왔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조선이 전쟁에 대비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최전방인 동래에서 이랬고, 병영이 있는 울산에는 13개 군현의 병력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경상우도의 상황도 비슷했죠. 여기에 조정에서는 순변사로 이일을 보냈고, 이일이 지휘할 병력도 대구에서 집결하기로 돼 있었구요.

제승방략은 병력을 모아서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는 형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군과 맞설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장수가 파견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장수 없는 병사", "병사 없는 장수"가 나오는 단점이 있고, 그걸 만든 이일이 바로 그 단점을 보여주면서 패했죠. 류성룡이 열심히 비판하면서 진관 체제로 돌렸고, 이일의 이미지와 함께 임란 초기 패전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분명 단점이 있는 체계지만 저렇게 단순한 시스템은 아니었습니다.

https://m.blog.naver.com/hangiree/30008746803
정경달의 [진법] 중 절제방략

위의 사료에는 하삼도의 제승방략, 남도제승방략에 대한 부분이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 볼 부분은 여기죠.

"소속된 관은 제색군사를 나누어 4부대로 만들고, 각 부대는 각기 (이들을) 거느릴 영장(領將) 1인을 정하고, 한 부대는 수령이 친히 거느려 적진으로 나아가고, 그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 부대도 또한 본읍에서 거느릴 영장을 정하여 정제(정비)하고 명령을 기다린다."

유사시 장수와 병력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미 정해졌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죠. 실제로 경상도군의 움직임에서 저렇게 4부대로 나누는 이른바 4운 체제가 보인다고 합니다.

자, 계획대로 모인 건 모이긴 했습니다만...

이각은 양산군수 조영규에게 수백명을 맡겨 적의 상황을 살피게 합니다. 조영규는 4km 정도 나갔다가 적을 보고 돌아오죠. 전쟁이 시작될 때 조선 측은 일본군을 1만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영규는 적이 수만명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자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으며, 좌병사 이각은 뒤이어 동래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 원균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의 주장(主將)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 김성일

-_-

까도 까도 모자를 원흉은 지금은 내버려두고 경상좌도를 지켜야 했던 이각과 곽사 박홍에 대해서 얘기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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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은 용맹은 뛰어나지만 성격이 좋지 못했다 합니다. 이 때도 죄를 얻어 귀양갔다가 용맹을 인정받아 다시 기용된 거라고 하죠. 그 중요한 경상좌병사로 말입니다. 박홍은 경상좌수사로 임명받아 선정을 펼쳤고 방비를 튼튼히 했다고 합니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임기가 1년 더 연장됐다고 하죠.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 그 자리에 임명된 거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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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은 동래성에 입성해 놓고 적이 두려워서 도주한 걸로 동래성 함락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하필 경상좌병사부터 이랬으니 박홍과 함께 조선군이 욕 먹는 이유의 시작이 되죠. 동래성 순절도의 왼쪽 위에는 도망가는 조선 장수가 그려져 있는데, 이각으로 추정됩니다. 오래오래 욕 먹는 거죠. 하지만 이각이 이 때 동래성을 나선 게 무조건 잘못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나는 대장이니 마땅히 밖에서 의각의 세(勢)로 해야 한다" - 연려실기술
이각이 한 말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기는 본영(울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성에 나가서 의각지세를 이뤄야 한다는 거죠. 의각지세가 어렵다면 기각지세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전군이 성에 있는 게 아니라 밖에서 적을 견제하고 협공할 수 있게 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게 맞습니다. 그의 임무는 일개 성 하나를 지키는 게 아니었습니다. 경상좌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거였죠. 그러려면 그가 성에 고립돼 있으면 안 됐죠. 동래성이 함락되더라도 말입니다. 또한 농성할 때 외부의 지원군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진주대첩의 승인 중 하나도 외부에서 적을 견제해 준 것이었으니까요.

그 때나 지금이나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평을 듣지만, 그가 동래성을 나갈 만한 이유는 있었고, 오히려 그게 옳다고 할 만 합니다.

... 그걸 핑계로 댄 거냐, 정말 그럴려고 했는데 안 된 거냐가 문제지만요.

일단 이각과 박홍은 동래성 후방까지 갔다가 퇴각합니다. 이걸로 적을 견제하려고는 했는데 도망갔다/중과부적으로 퇴각했다로 나뉘죠. 이후 이각은 소산역(금정구 쪽으로 추정됩니다)에 머물면서 밀양부사 박진과 합류하고 다시 적과 전투를 치릅니다. 여기서 패한 후 언양까지 후퇴했다가 울산 좌병영으로 가죠. 여기엔 경상좌도 13개 고을의 병력이 집결해 있었는데, 자신은 동래성에서처럼 성 외곽에서 싸우겠다고 나가고, 적 2군(가토 기요마사군)이 오기도 전에 모인 병력이 흩어지고 병영은 함락당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진이 앞에서 싸우는 중에 안 되겠다 싶어 먼저 후퇴하고, 부하에게는 병영에 있는 자신의 첩과 면포 1천여 필을 밖으로 빼라고 명령하고, 부하가 머뭇거리자 베어버립니다. 울산에서도 안동 판관 윤안성이 말리는데도 동래성에서처럼 나가버렸죠. 좌병영에 모인 1만은 넘을 병력은 흩어지구요. 이것도 자신과 그 직할병력은 밖에서 싸우는 게 맞았다고 할 순 있겠지만요.

이후 경상좌도의 병력을 이끌기로 한 좌방어사 성응길에게 소속돼서 행동합니다. 상주, 탄금대 전투 후에는 충청도-경기도로 이동했고, 임진강까지 가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참수당하죠.

뭐 결국 죽기는 합니다만, 의외로 무작정 도망만 간 건 아닙니다. 동래-언양-울산까지 가는 길을 보면 적이 오는 길(혹은 적의 침입에 따라 맡기로 했던 방어선)에 쭉 있었고, 그의 명령에 따른 걸로 보이는 병력 이동도 보이긴 하니까요. 이후 성응길의 휘하에 들어간 건 서울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는 제승방략에 따른 거였구요. 죽기 전까지 나름대로 지휘권을 행사하거나 지휘를 받고 있었다는 거죠.

좌수사 박홍은 이각보다는 할 말이 더 많습니다. 부산에 있는 좌수영 휘하 진들을 구하기엔 늦었고, 동래성 후방까지 가긴 했습니다. 좌수영을 포기한 건 동래성이 포위당한 후, 혹은 함락당한 후로 추정되고, 그 후엔 언양으로 가서 이각과 합류했다가 이각이 울산으로 가자 자신도 경주로 갔고, 다시 북상해 죽령을 방어하다 탄금대 전투 후 임진강까지 갑니다. 이후 김명원 휘하에서 나름 적과 싸우다 병사합니다. 이 부분이 이각과 갈리는 부분이죠. 일단 김명원 개인은, 혹은 조정에서는 박홍보다 이각의 책임이나 잘못이 더 크게 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후 평가에서도 박홍은 나름 옹호를 받고 있었구요. 이래서 이각은 몰라도 박홍은 옹호하기도 하구요. 물론 살아 있는 동안에 이각이랑 다를 게 없는데 왜 안 죽이냐는 말은 많았습니다.

+) 물론 그가 좌수영을 버린 게 잘했다는 평가는 아닙니다. 의병장으로 유명한 권응수가 이 때 박홍 밑에 있다가 실망하고 나와서 의병을 일으켰고, 박홍이 도망간 후에도 수영에 남아 저항한 이들이 있었죠.

임진왜란 당시 각 지역의 상황, 각 장수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이각과 박홍도 어느 정도의 재평가는 받고 있습니다. 최소한 누구처럼 적이 오기도 전에 도망간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지연전을 하려고는 한 / 하기는 한 / 할 만큼은 한 것이라는 거죠. 이 부분은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야겠죠. 저 역시 정확한 결론을 내리긴 힘들겠군요. 이들에 대한 기록은 적고, 둘 다 초반에 죽어서 그 이후의 행동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도 없구요. 이 글이 임진왜란 리부트도 아니니 더 많은 분량을 쓸 수도 없죠.

그리고 아무리 재평가를 한들 그들이 문제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거구요. 책임으로 따지면 경상좌도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고, 아무리 연구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박진처럼 지연전을 펼친 게 제대로 기록에 남은 장수들도 있습니다. 최소한 병력이라도 유지해야 할 텐데 울산에서 이각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지연전을 펼쳤다 한들 적극적으로 했을지, 그냥 핑계일 뿐일지 의문이고 말이죠. 아직은 그저 적을 보기도 전에 한양까지 도망친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재평가가 되었다 한들, 그들은 동래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시작된 많은 이들의 죽음을 갚아 줄 만큼의 활약은 절대 보여주지 못 했습니다.

자, 성을 버리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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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이) 동래 부사로 나갈 때 벌써 왜국과 틈이 생겨 아침저녁으로 변이 생기리라 해서 남들이 모두 위태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부친 감찰 송흥복이 아직 살아 있었는데 홀로 의연히, '난리를 피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죽은들 어찌 피하랴.'하였다."

16세기, 조선은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 을묘왜변 등을 거치면서 일본과의 교역을 부산포로 제한하게 됩니다.  동래의 역할이 커졌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동래는 대일관계의 중심이 되었구요. 1547년 정미약조가 체결되면서 동래현의 격을 높여 도호부로 하죠.

+) 당시 조선의 행정구역은 부-목-도호부-군-현의 순입니다

(도호)부사는 종3품이 임명되는데, 동래는 특별히 정3품으로 임명합니다. 그만큼 극한직업이 되게 된 거죠. 지금 부산의 입지를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되겠지만, 당시 동래는 압록강에 있는 의주처럼 적과의 국경이자 변방으로 취급됐습니다. 인조 대부터는 인사권을 가진 이조가 아니라 비변사에서 직접 동래부사를 천거할 정도였죠. 오죽했으면 동래부사로 가는 사람에게 송별시를 지어주는 지어주는 게 관례가 될 정도였다 합니다. 2년 6개월의 임기가 있었지만 평균 임기는 1년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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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송상현은 동래부사로 임명됩니다. 이듬해에 적은 결국 왔고, 그는 가장 유명한 동래부사가 되었죠.

4월 14일, 적은 부산진을 함락시킨 후 동래로 향합니다.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금방 들렸고, 이제 자기 차례가 되었음을 알았겠죠. 다행히 양산과 울산에서 지원군이 왔습니다만, 정찰 결과 적이 대군이라는 걸 알게 되죠.  이각은 자신의 아병(친위군) 20명만을 남기고 나갑니다.

"고립된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主將)이 구원해 주러 왔다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이오"

송상현은 이렇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죠. 떠나가는 이각을 보며 동래성과 자신의 최후를 예견합니다. 부채에 시를 한 편 쓰고는 자신의 부친에게 보내게 하죠.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는데, 다른 여러 진영은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는 무겁고, 부자간의 은의(恩義)는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陳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그러면서 부하에게 "내 허리 밑에 콩알만한 사마귀가 있으니 내 죽거든 이것을 표적으로 시체를 거두어라"고 명을 내리죠.

+)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당시 동래성의 병력은 2500에서 3000 정도로 추정됩니다. 적진 않지만, 적을 막기는 힘들었죠. 거기에 동래성은 규모야 부산진보다 훨씬 크지만, 역시 방어하기 어려운 읍성이었습니다. 성 내부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왔을 겁니다. 당장 이각부터가 비교적 방어하기 좋은 후방의 소산역으로 후퇴한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송상현은 죽을 길을 결정합니다. 자신은 동래를 지키는 이였고, 이미 성 안에는 최대 이만 정도로 추정되는 백성들이 들어와 있었으니까요. 삼포왜란 때도 공격당했지만 지켜낸 게 동래성이었습니다. 백성들도 믿고 들어왔겠죠. 이길 순 없더라도, 이들을 버릴 순 없었습니다.

함께 성 안에 들어와 있던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 대장 송봉수, 교수 노개방 등도 그와 함께 싸웠죠. 조영규는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온다고 성을 나갔다가 적의 포위를 뚫고 다시 입성했다고 합니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마침내 적의 대병이 동래성을 이르렀고, 나무판에 위와 같은 글을 성 밖에 놔두고 갑니다. 송상현은 이 유명한 말로 답하죠.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

정황상 이렇게 짧고 굵은 문답 외의 설득 시도가 더 있었을 것 같긴 합니다. 일본으로서는 조선의 관리를 포섭해 피해를 줄일 필요가 있었고, 이왕이면 친분이 있는 사람이 더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발이 그랬듯 송상현도 단호히 거절합니다. 정발이 느꼈을 감정을 그 역시 느꼈겠죠. 그렇게 살 가능성을 버렸습니다. 이제 몰려올 적을 상대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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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순절도

"일본군은 처음에는 사다리를 이용해 여러 방향에서 성벽을 기어 올라갔으나 조선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조선군이 쏘아대는 화살은 마치 비처럼 쏟아졌으며 집의 기왓장도 사방에서 날아왔다." - 일본사, 루이스 프로이스

송상현을 비롯한 조선군은 처절하게 맞섰습니다. 일본군도 한 차례 물러서야했죠. 하지만 일본군은 너무 강했죠. 나무판으로 성벽을 둘러쌌지만 조총에 뚫렸고, 깃발로 조선군의 시야를 가리고 사다리를 올라갑니다. 허수바이를 만들어 조선군의 공격을 유도하기도 했죠.

오르고 막기를 두시간 정도, 산중턱에 있어서 성벽이 낮앗던 동문이 먼저 뚫립니다. 곧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죠. 밀리는 쪽은 역시 조선군이었습니다. 홍윤관과 조영규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합세했지만 당해낼 수 없었죠. 성 내는 아비규환이 됩니다. 백성들도 무기를 잡고 싸웠고, 지붕에 올라 기와를 던져댔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죽어갔습니다. 그러기를 다시 두어시간, 성은 함락됩니다. 

홍윤관은 송상현에게로 가서 소산역으로 후퇴할 것을 청합니다. 하지만 송상현은 거부하고 자신이 지켜야 될 성에서 백성들과 함께 죽는 길을 택합니다. 홍윤관 역시 그를 따랐고 전사했죠. 조영규 역시 난전 속에서 전사합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적에게 항복했는데, 고니시가 선조에게 보내는 글을 주고 풀어줍니다. 처벌이 두려웠던 건지 이 사실을 숨기고 탈출했다고 하지만요.

성의 끝이 다가올 무렵, 그는 관복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립니다. 선조에게 올리는 마지막 인사였죠. 그런 그에게 적이 다가옵니다.

"병사의 장계에 적힌 적장의 말을 보면, 송상현의 죽음은 비록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죽어간 옛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보다는 더 낫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그 후 왜적들도 포로된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말하길) 동래 부사가 갑옷 위에다 홍단령(관복)에 사모를 쓰고 손을 모아 교의에 앉아 일본 군사가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여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이 목을 베려 하는데도 조금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한 번도 눈을 들지 아니하고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므로 무지한 왜병이 머리를 베어 나에게 바쳤습니다. 나는 동래 태수에게 전부터 은혜를 입었으므로 곧 염습하여 동문 밖에 묻고 기둥을 세웠으니, 이것은 요시라가 자세히 압니다. 만약 유족이 있어 해골을 찾는다면 가리켜 드릴 생각입니다." - 난중잡록

이 때 평조익이라는 자가 있어 눈짓으로 피하라고 하고 옆으로 가서 옷을 끌어당겼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고 하죠. 다른 왜병이 다가와서 생포하려 할 때도 오히려 발로 차며 (혹은 칼로 맞서며) 이렇게 꾸짖었다고 하죠.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고니시 등은 그를 생포하려 했지만, 그가 이렇게 맞서면서 결국 전사하게 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생포하려 했지만 거부했고, 병사 하나가 멋대로 죽인 걸로 보입니다. 정말일 지 모르겠지만 그를 죽인 병사를 처형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이 때 관노 하나도 울면서 함께 죽어서 일본군이 더 기이하게 여겼다 합니다.

+) 저 평조익이라는 자가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전사하자 첩 김섬이 와서 붙잡혔는데 3일 동안 적을 꾸짖다가 죽임을 당했고, 고니시가 그와 첩의 시신을 동문 밖에 묻어줍니다. 다른 첩이었던 이씨도 전사 소식을 듣고 동래로 가다가 노비들과 함께 잡혀서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일본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서 히데요시가 돌려보냈고, 고니시도 화친 중에 돌려보냈구요.

이렇게 송상현도 전사했고, 동래성도 결국 함락되고 맙니다. 부산진에서 그랬던 것처럼 적은 동래성 백성들을 학살했구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200038495&code=960201

2005년에 발견된 인골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군이 죽인 후 무기 등과 함께 해자에 버린 걸로 추정되죠. 발견된 것만 81구,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의 것도 함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조총에 맞아 죽었고, 한 여인의 사인 역시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닌, 처형으로 보이죠.

"아전이 앞으로 나와 곡하며 말했다네. 곡할 이가 있는자는 그래도 슬프지 않다오. 그 얼마나 많은가요, 시퍼런 칼날 아래 모두 죽어 곡해 줄 이도 없는 사람들이" - 이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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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100여명, 부상 400여명, 송상현과 동래성이 일본에게 준 피해입니다. 그리 많진 않죠. 일본군은 이 피해를 철저한 학살로 보답했고, 자신들에게 맞서는 이들에게 공포를 보여줍니다. 그 효과가 컸던 건지, 북상하는 중에 도망간 장수들이 적지 않았죠. 반면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도 반격에 나서면서 송상현 등이 보여 준 모습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해 주었죠.

이후 부산은 임진왜란 내내 적의 근거지로 쓰입니다. 곳곳에 왜성이 세워졌죠. 부산포 해전 외에 조선군이 부산으로 올 수는 없었구요.

임진왜란 후에는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도호부로 돌아옵니다. 피해를 복구하고 적의 재침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이 가해졌죠. 숙종 대에는 읍성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래산성(금정산성)이 세워지고, 영조 대에는 동래읍성도 크게 개축합니다. 현재 동래읍성이라고 하면 이 성을 말하는 거죠. 2000년대 들어 복원했다가 부실공사로 성벽이 무너지기도 했구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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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usan.go.kr/cys/index

부산의 충렬사에는 이 때 부산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하고, 적에게 희생당했던 이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송상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서 송공사라는 이름을 받았다가, 인조 때 충렬사로 바뀌게 되었죠. 송상현의 시호인 충렬(忠烈)에서 따 온 것입니다. 정발이 추가됐고, 영조 때 윤흥신이 추가됩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모셔져 있죠. 부산진에서, 다대포에서, 동래성에서 전사했던 이들입니다. 여기에 박홍이 도망간 후에도 수영을 지킨 25의용인이 있고,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도 여기 있습니다.

이 충렬사는 서원으로서도 역할을 했는데, 안락서원이라 불렸습니다. 대원군이 남긴 47개 서원 중 하나였죠. 이렇게 부산에서 충신을 모시는 중심으로 남았고, 현재에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참배하는 곳으로 남아 있죠.

그리고 송상현은 부산에서 충신의 대명사가 되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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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공단 (동래구 복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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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서면에 공원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송상현 광장으로 지었구요. 길이 많이 막히긴 합니다만.



임진왜란의 시작은 끝까지 싸우다 죽은 이와 도망 간 이로 나뉩니다. 아무래도 그 후 일본군이 큰 피해 없이 한양에서 평양까지 가기 때문에, 전자의 임팩트보단 후자가 더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장하긴 했지만 적을 막진 못 했으니까요.

그래도 잊지는 않아야겠죠. 목숨을 바쳐 적과 싸운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적조차도 인정할 정도의 충성을 보여 준 이가 전쟁의 시작부터 있엇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순신을 필두로 적과 싸우고 나라에 충성한 이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시작부터 조선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그 장점 역시 뚜렷히 나타났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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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이제 절반도 못 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네요.
 다시 삼국시대로, 황산벌 이후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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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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