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2/19 08:52:21수정됨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without even being asked)
제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초등학교는 수요일마다 전교생 조회를 해요. 이런저런 것들을 하고 나면 마지막엔 늘 교장선생님이 이주의 골든북과 실버북에 이름을 올린 친구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앞으로 불러내어 칭찬해주고 박수를 유도해요. 선생님은 아이들이 왜 실버북에 올랐고 골든북에 올랐는지 설명해주는데, 이 때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약속된 방식으로 호응하지요.

교장선생님: A는 지난 금요일에 학년 행사가 끝난 후에 교실을 정리했어요, 심지어~
아이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without even being asked)

좋은 일을 하면 실버북에 이름을 올릴 수 있어요. 하지만 골든북은 자발적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름을 올리기 어렵답니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아이들은 매주 공개적인 칭찬세례를 받고 금별/은별이 그려진 스티커를 선물받아 가슴께에 붙이고 다녀요.

아홉살 Y는 한 달 전에 등교했던 걸 마지막으로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못하더니, 며칠 전 혈액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어요. 부고를 전해들은 이는 누구나 울었어요. 교장선생님은 학교에서 Y를 위해 추모회를 해주고 싶다고 했고, Y의 부모님은 그렇다면 추모회가 아니라 Y가 살다간 삶을 기념하고 축복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 수요조회를 Y의 짧고 아름다웠던 인생에 헌정하기로 했답니다.

Y의 부모를 비롯한 거의 모든 학부모가 조회에 참석했어요. 교장선생님은 Y가 학교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프로젝터에 하나씩 올려서 전교생에게 보여주며 Y가 함께했던 학년 행사들과 학교 행사들을 되짚어주었어요. 행사 하나를 추억하고 나면 그 행사때 불렀던 노래를 같이 부르고, 다음 행사 하나를 기억하고 나면 또 그 행사때 불렀던 노래를 같이 부르며 Y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방울방울 되살려냈어요.

마지막으로, 교장선생님은 뒷편에 앉아서 울고 있는 Y의 부모에게, 역시 울면서, 이 자리를 허락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어요. 그리고..

"제가 이 조회 때 Y를 위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 물어봤을 때 (asked), 부모님은 Y의 이름을 골든북에 올려줄 수 있겠느냐고 제게 부탁했어요 (asked). Y는 골든북에 이름을 올릴 때면 무척 기뻐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전 사실 시킨 것도 아닌데 (without even being asked)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Y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사랑했으니까요. 우리 학교의 골든북은 우리 학교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실천한 학생들이 이름을 올리는 곳이에요. 그런데 그 모든 가치들의 관건은 사랑이에요.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탄생해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심지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 이번주에 Y의 이름이 골든북에 올라가는 것도 당연해요."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자리를 함께한 학생들과 학부모들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어요. 우리는 Y에게 박수와 함께 황금별 스티커를 선물했고, 그렇게 그와 함께한 마지막 조회도 끝났어요.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별님처럼 쉬고 있길 바랄 뿐입니다.



53
  • 아아 훈훈하다
  • 너무 따뜻한 학교네요. 저런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복받았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은 부럽네요 ㅎㅎ
  • 눈물이 많아져서 큰일입니다 ㅠㅠ
  • ㅠㅠ
  • 춫천
  • 훌쩍 ㅠㅠ
  • 좋네요
  • 세상에 이런 이야기만 있었으면 좋겠네요.
  • 좋네요. 심지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추천을 누르게 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334 일상/생각비오는 숲의 이야기 38 하얀 23/12/14 1349 54
13639 육아/가정아빠. 동물원! 동물원에 가고 싶어요! 27 쉬군 23/03/14 1906 54
12387 기타월간 프로젝트 홍터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35 토비 21/12/29 3928 54
7781 육아/가정고부갈등을 해결해보자 - 희망편 40 기아트윈스 18/07/02 5291 54
10487 도서/문학저도 작가 된 거 인증 11 이희준 20/04/11 4239 53
8882 일상/생각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without even being asked) 8 기아트윈스 19/02/19 3691 53
10763 일상/생각40대 부부의 9급 공무원 도전기 36 4월이야기 20/07/08 6012 52
13119 사회한국 인구구조의 아이러니 20 카르스 22/09/01 3683 51
12554 기타이어령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6 아침커피 22/02/27 3094 51
11719 일상/생각뒷산 새 1년 정리 38 엘에스디 21/05/25 3949 51
9552 일상/생각혼자서 애 키우던 시기에 대한 추억... 39 o happy dagger 19/08/16 5434 51
9484 사회경찰관 허위 초과근무와 부정수령 내부 고발자 경찰관 입니다. (인증샷 포함) 42 멈추지말자고 19/07/29 5147 51
6443 일상/생각울진 않을거 같습니다. 14 aqua 17/10/21 4350 51
13248 일상/생각"교수님, 제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23 골든햄스 22/10/20 3225 50
14449 일상/생각지난 연말에 한달간 업장에서 바하밥집 기부 이벤트를 했습니다. 13 tannenbaum 24/02/11 1037 49
12879 일상/생각손절의 시대 24 nothing 22/06/01 4383 49
12583 문화/예술한문빌런 트리거 모음집 23 기아트윈스 22/03/06 3179 49
12481 기타[홍터뷰] 다람쥐 ep.2 - 변호사 다람쥐 46 토비 22/01/31 7830 49
9587 일상/생각삼촌을 증오/멸시/연민/이해/용서 하게 된 이야기 23 Jace.WoM 19/08/26 4981 49
6628 일상/생각삭제 19 하얀 17/11/21 4918 49
11771 사회누군가의 입을 막는다는 것 17 거소 21/06/09 3785 48
8667 일상/생각한국의 주류 안의 남자가 된다는 것 30 멜로 18/12/21 5788 48
12790 사회윤석열을 맞이하며: 진보 담론의 시대는 끝났다 76 카르스 22/05/08 5167 47
12658 기타[홍터뷰] 예고편: 주식부자 알료사 38 토비 22/03/20 4432 47
12400 일상/생각자기혐오 19 cotton 22/01/03 3979 4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