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4/18 17:54:02
Name   Picard
Subject   임신 중단에 대한 사견

저희는 남자 형제라, 어릴때부터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제가 초딩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고, 아버지는 잠적했습니다.
채권자들이 집에 찾아오고, 저희 한테 '아빠 어디갔니?' 하고 떠보고 어머니께 '니 남편 어딨냐! 니가 대신 갚을거냐!' 하면서 집에서 며칠씩 뻗대기도 했지요. 그 몇년동안 저희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고, (언제 채권자들이 찾아올지 모르니..) 어머니만 가끔 몰래 만나셨다고 하더라고요. 공식적으로는 '나도 이 양반 어디있는지 모르고 찾으면 이혼할거다' 였습니다.
아버지가 없었지만, 다행히 어머니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셨고, 외할아버지가 조금씩 도와주셔서 생활이 바닥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숨어 다니는 몇년동안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하시면서 돈을 모아 빚을 갚거나, 합의 보는 등의 노력을 하셔서  몇년후에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제가 대학을 다닐때, 아무 생각 없이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는데, 아쉽다' 라고 했습니다. 늘 하던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너도 이제 다 컸으니까 하는 말인데.. ' 라면서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사실, 아버지 없이 살던 시절에 어머니가 덜컥 임신을 하셨는데, 당장 돈을 벌어야 식구들 먹고 살수 있고, 남편도 집에 없는 상황에서 임신을 한다는것은 어불성설이라 아버지랑 상의하고 병원에 가셨답니다.
태몽으로 분홍색 이쁘게 생긴 복숭아가 가슴으로 휙 달려드는 꿈을 꾸셨는데, 아마 그 아이를 낳았으면 딸이었을거라고.. 요즘도 가끔 꿈꾸면 우리 가족들 노는데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가 같이 놀고 있는 꿈을 꾼다고 하시더군요.
그 뒤로 저는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결정을 하셨는데, 철없는 제가 여동생 이야기 할때마다 얼마나 가슴아프셨을지....

또한,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니, 세상 모든게 바뀌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난임치료를 받은 정도는 아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병원에서 검사도 받아보고 날짜도 받고 해서 1년만에 아이가 생겼거든요. 그렇게 아이를 원했는데도, 힘듭니다. 가끔 아이가 없는 삶도 나쁘진 않았을것 같은데.. 하는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더더욱 준비되지 않거나 원치 않는 사람에게 강압적으로 죄를 묻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원치 않는 임신 또는 아이를 양육할 경제적/정신적 상황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임신중단을 막는 법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면, 그건 아이에게도 불행이고 그 부모에게도 불행일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죽은 사람 보다는 산 사람이라는데, 태어나지 않은 아이 보다는 산 부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요. 임신중단을 결정한 사람중에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중절을 하고 다시 룰루랄라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거라는 생각도 안합니다.

저는 태아가 몇주가 되면 생명이고 몇주전에는 세포인지 논할 의학적/철학적 지식도 없고 주워들은 이야기로 이렇다 저렇다 할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요즘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면서 사전 연명치료 의향서 등록도 하고 그러는데.. (저희 아버지도 이렇게 보내드렸습니다.)
결국 태아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가장 가까운 가족일뿐, 주변에서 몇주가 지났으니 안된다, 몇주 이내니까 된다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으니까 된다 라고 말로 떠들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게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그래서 이미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여성/커플의 삶을 담보로 하기 보다는,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낳고 키울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노력을 쏟았으면 합니다.



38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993 도서/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539 39
13586 일상/생각자격지심이 생겨났다가 해소되어가는 과정 9 골든햄스 23/02/22 2907 39
12629 일상/생각나는 네 편 9 머랭 22/03/15 3962 39
12573 정치내가 윤석열에게 투표하는 이유 36 Profit 22/03/03 5441 39
10841 일상/생각설거지 하면서 세탁기 돌려놓지 말자 22 아침커피 20/08/06 4956 39
9956 일상/생각페미니즘 계급문제 노동문제로의 환원 공정과 평등 80 멍청똑똑이 19/11/08 7354 39
7883 일상/생각사라진 이를 추억하며 10 기아트윈스 18/07/19 4602 39
14174 일상/생각예전에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 썼던 사람입니다.. 혹시 기억 하시나요? 8 이웃집또털어 23/10/08 2805 38
13824 일상/생각널 위해 무적의 방패가 되어줄게! 6 골든햄스 23/05/07 3337 38
13686 일상/생각전두환의 손자와 개돼지 2 당근매니아 23/03/30 2308 38
12713 기타[홍터뷰] 알료사 ep.2 - 백수왕 알료사 19 토비 22/04/11 4683 38
12570 기타깃털의 비밀 - 친구 없는 새 구별하는 방법 10 비형 22/03/03 3902 38
10317 일상/생각세무사 짜른 이야기. 17 Schweigen 20/02/23 5949 38
9569 일상/생각Routine과 Situation으로 보는 결혼생활과 이혼 36 Jace.WoM 19/08/22 7110 38
9340 일상/생각큰 이모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13 Jace.WoM 19/06/23 6286 38
9097 일상/생각임신 중단에 대한 사견 6 Picard 19/04/18 4685 38
6713 사회온라인 공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상) 82 호라타래 17/12/06 8068 38
14580 사회의대 증원과 사회보험, 지대에 대하여...(펌) 42 cummings 24/04/04 6242 37
14055 정치그냥 오늘 커뮤보면서 했던 생각 37 매뉴물있뉴 23/07/21 4193 37
12925 일상/생각나도 괜찮은 사람이고, 너도 괜찮은 사람이야. 4 아재 22/06/17 4029 37
11303 일상/생각열아홉, 그리고 스물셋 14 우리온 21/01/01 4033 37
11129 일상/생각아빠의 쉼 총량제 22 Cascade 20/11/13 3735 37
10706 일상/생각자격은 없다. 94 절름발이이리 20/06/22 8550 37
10404 의료/건강자존감은 꼭 높아야 하나요? 38 호라타래 20/03/20 7724 37
9609 기타[옷나눔] 여자 직장인 옷 나눔입니다 56 다람쥐 19/09/01 5703 3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