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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6/01 22:55:13수정됨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생각을 명징하게 직조하기
타언어권에 이주하게 되면 겪는 수천 수만 수억 가지의 장애 중 가장 심한 축에 드는 걸 하나만 고르자면 의료입니다. 말이 안통해요.

이 장애는 거의 전적으로 언어의 문제이기 때문에 의료환경의 객관적 수준과 무관하게 발생하곤 합니다. 심지어 해당 외국어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구사하는 이주민조차 이러한 장애를 피해갈 수 없는데요, 그것은 자기 몸에서 발생하는, 따라서, 고도로 주관적인 감각을 언어화하는 것이 범인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어린 시절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학계의 최상위 포식자들과 영어로 마음먹은대로 대화하고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들조차도, 예컨대, 영어권에서 아주 어려서부터 산 경우가 아니라면 "어깨가 결리고 뼈가 삭는 듯하고 이가 시리고 손 끝이 따갑고 목이 까끌하고 다리가 욱신하고 창자가 쥐어짜이는 느낌"을 영어로 통번역해보라고하면 눈만 크게 뜨고 꿈뻑거리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어린 시절에만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는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는 '내면화'는 바로 그러한 특성 때문에 일종의 문화자본으로 기능하곤 합니다. 오직 어렸을 적에 부모의 '투자'에 힘입어서만 (혹은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어떤 특수한 환경에 힘입어서) 몸에 각인시킬 수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그런 투자나 환경에 접근할 방도가 없던 이들 (기껏해야 오직 성인이 되어서야 그런 환경에 접속할 수 있었던 이들) 사이를 구별지어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1960년대~80년대 프랑스 사회에서 계층들을 구별지어주던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무엇이었는지 연구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문화자본의 대표적인 사례로 피아노와 악센트를 꼽습니다. 10대 이후에 피아노를 배운 이와 그 전에 배운 이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4차원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10대 이후에 스울말을 배운 이와 그 전에 배운 이 사이에도 넘어설 수 없는 4차원의 간격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마르세유에서 쭉 살면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랑제꼴 가겠다고 빠리로 유학온 친구와 태생이 빠리 브루주아지인 친구 사이엔 설령 같은 그랑제꼴 다니는 동기동창이라고 하더라도 벌써 말씨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이 차이는 이런 특성을 가진 쪽보다는 여읜 쪽에서 더 명징하게 인식하곤 합니다. 있는 사람은 '이거 있어봐야 별 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거든요.

이 때 마르세유러는 자신의 말씨가 빠리지앵과 다르다는 사실로 인해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에 사로잡힙니다. 마르세유 말씨를 완전히 버리고 빠리지앵을 모방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아예 진성 마르세유 말씨를 고수해야 하는데, 따르자니 영원히 빠리지앵과 똑같은 자연스러움을 획득할 수 없을 뿐더러 마르세유 출신의 열등함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고, 고수하자니 그것은 그것대로 빠리지앵의 지배적 지위에 대한 반발심리로 기인했음을 시인하는 꼴이니 이또한 역설적으로 마르세유의 열등함을 승인해버리는 셈이 됩니다. 이 딜레마는 현실적으론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으로 표현됩니다. 서울사람들이 보기에 사투리를 '고친' 지방러의 말씨나 사투리를 '안고친' 지방러의 말씨나 '아, 저 사람은 자기 말씨에 대해 의식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게 마련이지요. 반대로 말하자면 '말씨에 신경 안쓰는 [무심함(indifference)]' 이야말로 지배계층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할 때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지위를 향유하고 있는 특정 악센트 (스울말) 가 물흐르듯 흘러나오는 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부르주아를 부르주아답게 해주지요.

같은 관점을 어휘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어휘를 언제 습득해서 얼마나 깊이 내면화할 것인가는 지역별로, 또 세대별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특정 어휘의 사용은 그 자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주고, 정체성의 전시는 늘 그렇듯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러이러한 단어를 네이버에 검색해서 그게 실검 1위가 되었다'라는 소식이 세간을 진동시키고 뭇 사람들이 이 소식에 경악하는 현상이야말로 어휘구사의 정치성을 드러내주는 좋은 사례이지요. 노련한 사회과학자라면 [명징]의 명징성을 모르는 이들을 아마도 세대와 계층 등을 기준으로 삼아서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을 겁니다. 반대의 경우 역시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겠지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세대를 단독변수로 삼을 경우 전자가 젊고 후자가 늙을 겁니다. 이렇게 볼 경우 [명징]이란 단어사용을 불쾌하게 생각한 젊은이들의 불만과 이런 불만에 경악하는 늙은이들 간의 대립은 일종의 문화자본을 놓고 벌이는 세대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한 어휘를 두고 벌어진 이 대립이 실은 우리 사회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권력 투쟁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나름 마음이 편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명징의 명징함을 모르는 것이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면 막 뼈가 삭는 듯 창자를 쥐어짜는 듯 맘이 아프잖아요. 근데 이게 허허 걍 쌈박질이구나 생각하면 그래 뭐 이런 거야 언제나 있어왔으니 놀랄 일도 아니지 하고 좀 안심하게 된달까요. 무식하다고 맨날 개놀림받던 애들이 '끼야악'하고 한 번 반격했구나 생각하면 그래 그랬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거지요.

물론 '끼야악'하고 반격 한 번 해봤자.... 마치 마르세유 사투리가 지상최고의 프랑스 악센트라고 주장하면서 고수하는 마르세유러의 외침이 견고한 빠리지앵의 성을 무너뜨리기 역부족일 뿐더러 오히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마르세유 악센트의 열등성(?)을 자인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징의 명징성을 모르는 걸 자랑스레 전시한 이들 역시 명징러들의 명징한 공세를 받고 무식쟁이로 직조되어버리고 말겠지요.

그렇다면 저희 십대 여고생들은 이런 상징계의 전투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좋을까요? 마르세유러 가운데 유독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종종 놀랍게도 아주 나중에 배운 빠리 악센트를 완벽하게 습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25세 넘어서 미국유학 간 사람들이 대부분 영어 발음이 응망인 가운데 일부 재능러는 놀랍게도 완벽에 가까운 악센트를 습득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 우리 여고생 동지 여러분은 '명징? 나는 뭐... 명징하게 알지. 그런 것 가지고 안다 모른다 싸우기도 하나요? 오호호 '라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무심결에 자신의 어휘력을 자랑인듯 자랑아닌듯 누설하기라도 한 것 처럼 말해주시면 되겠읍니다. 명심하세요. [무심함(indifference)]이야말로 부르주아의 특징이라는 걸.

대명 숭정 392년 6월, 십대여고생 기아트윈스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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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대여고생에게서 보이는 흰머리!
  • 명징하게 직조하는군요
  • 나 십대 여고생인데 동년배들 다 무심한다
  • 빵이 없으면 쿠키를 먹으면 되고, 명징을 몰라도 text를 clear하게 이해하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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