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6/03 15:00:59수정됨
Name   작고 둥근 좋은 날
Subject   관람에 대한 관람 (기생충, 스포)

-


범람하는 기생충 관람평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하다 : 수많은 관객들이 기우와 기정이 보여주는 능력, 그러니까 꼼수를 통해 영어와 미술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과 엄마의 전국체전 메달을 통해 '이 집안이 한때 좀 살다가 사업 실패로 말아먹은 집안이다' 라고 추론한다는 것. 그래, 기우는 수능을 4번이나 치뤘고, 기정은 미술을 공부했으며, 그럴싸한 말들과 인터넷에서 본 정보를 활용해 사짜 강의를 끌어나갈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고, 기택도 '반지하 가장' 치고는 아는 것도 많고 교양도 있는 존재처럼 그려지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읽었다. 기택의 집안은, 단 한번의 성공도 없었던, 그저 그런 집안이며, 거기서부터 '능력'에 대한 메세지가 발생한다고 읽었다 : 능력, 그거 이 시대에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영화를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내 해석이 틀렸다 해도, 기생충에 대한 수많은 관람객들이 '기택의 집안이 한때 좀 살다가 사업 실패로 말아먹은 집안이다'라고 추론하는 상황의 사회적 의미를 부정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능력'이라 칭해지는 것의 절대성을 믿는다. 능력이 성공을 가져올 거라고는 더 이상 믿지 않지만(이것을 전통적인 능력주의 신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능력이라는 게 존재하며 그러한 능력은 배경이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이 '저 가족은 어떤 배경과 노력을 통해 능력을 키웠으나, 몇 가지 불우한 사건들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관람평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러한 세계관을 '신 능력주의 신화'라고 부르며, 상당히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현대 사회에서 능력이라 칭해지는 것은 삼국지 게임의 능력치가 아니다. '능력'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체로 그저 맥락적으로 결과값을 확인할 수 있는 종속 변인이지, 어떤 유의미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독립 변인이 아니다. 관우가 안량을 베어죽인 건 관우의 무력이 97이고 안량의 무력이 93이어서가 아니다. 관우가 안량을 베어죽였기 때문에 관우의 무력이 97이 된 것이고 안량의 무력이 93이 된 것이다.

능력이라는 것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100M를 10초 내에 뛸 수 있을 것이고, 그건 능력이다. 누군가는 하루에 천 개의 모르는 단어를 암기할 수 있을 것이고, 역시 그건 능력이다. 하지만 복합적인 사회적 맥락들이 엉킨 것-이를테면 영어나 미술을 가르친다는 것, 교양 있게 대화를 풀어낸다는 것-은 본질적인 능력,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그리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영어를 가르쳤다는 것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손쉽게 이야기한다. '거, 그사람 능력 있네/무능하네.'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장애인이 장애인 배려가 없는 회사에 들어갔다거나 마찬가지의 여성이 여자 화장실도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유능하게 평가될 수 있을까? 뭐, 만화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지만 우리 삶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만화가 아니다.

메달리스트이자 대도인 능력자 엄복동도, 생활고로 시달리다가, 기록도 없이 객사했다.

이 지점에서 봉준호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고 생각한다 : 우리 사회에서 능력이라고 불리는 거, 하잘것 없어. 능력이 성공을 가져온다는 신화는 극복되었으니, 다음 단계로 나가자. 배경과 노력이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야.

유전자의 힘 덕이건 다른 특정한 맥락의 개입 덕이건, 영어나 미술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성공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빈민은 충분히 많다. 전국체전 메달을 딸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조금 적겠지만 말이다. 봉준호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게 아니며, 그의 설정상 기택의 가족들이 '한때 잘 나가다 망했던 가족'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 능력주의 신화'에 기반한 관람평이 범람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근대인이고, 왕과 신화가 텍스트 속에만 존재하기를 바라는 쪽이다.



9
  • UBD를 타이핑하여 추천을 표하십시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292 음악손편지를 썼어. 10 트린 19/06/09 5785 6
9291 스포츠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10 이노우에나오야 19/06/08 6477 6
9290 음악Red Hot Chili Peppers - Live at Slane Castle(2003) 3 sound And vision 19/06/08 5377 1
9289 게임[LOL] 유심히 이해해야 하는 MVP, 과연 MVP가 맞는가? The xian 19/06/08 4687 0
9288 스포츠[MLB] 댈러스 카이클 애틀란타와 1년 13m 계약 2 김치찌개 19/06/07 4359 0
9287 음악멘델스존 엘리야 무료 음악회(나라에서 지원) 4 비누남어 19/06/07 4979 3
9286 일상/생각릴레이 어택으로부터 당신의 자동차를 지키시려면 4 바나나코우 19/06/07 4296 3
9285 스포츠날로 먹는 2019 여자 월드컵 프리뷰 14 다시갑시다 19/06/07 5187 8
9284 음악[클래식] 쇼팽 빗방울 전주곡 Preludes Op.28 No.15 4 ElectricSheep 19/06/06 5052 4
9283 오프모임6월7일 발산 이자카야에서 오프모임 어떠십니까? 8 맛집왕승키 19/06/06 5346 3
9282 오프모임6/6(현충일) 야구장 가실 분 계신가요? 25 Fate(Profit) 19/06/05 5240 5
9281 음악[팝송] 핑크 새 앨범 "Hurts 2B Human" 2 김치찌개 19/06/05 4773 0
9280 음악AI님, 명령을!! 2 바나나코우 19/06/05 3409 3
9279 방송/연예[다소 19금] 튜더스 시즌4 5회차 리뷰 3 호타루 19/06/05 8916 2
9278 스포츠[MLB] 류현진 이달의 NL 투수 1 김치찌개 19/06/04 4249 0
9277 일상/생각회사 다니며 꿈을 이뤄가는 이야기 11 소원의항구 19/06/04 5012 17
9276 사회노숙인 자활 봉사 단체 '바하밥집'을 소개합니다. 2 토비 19/06/04 5720 23
9275 도서/문학연애의 기억 2 알료사 19/06/04 5007 9
9274 역사삼국통일전쟁 - 14. 고구려의 회광반조 3 눈시 19/06/03 5291 12
9273 게임[LOL] 섬머 개막을 맞아 전력을 평가해볼까요? 23 OshiN 19/06/03 4449 0
9272 영화관람에 대한 관람 (기생충, 스포) 5 작고 둥근 좋은 날 19/06/03 5108 9
9271 일상/생각결혼식의 추억 18 메존일각 19/06/02 4723 22
9270 일상/생각신점 보고 온 이야기 15 19/06/02 7419 14
9269 음악[클래식]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23-5 Prelude Op.23 No.5 2 ElectricSheep 19/06/02 4978 2
9268 일상/생각이방인 노숙자 7 멍청똑똑이 19/06/02 5244 3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