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6/23 21:47:46
Name   Jace.WoM
Subject   큰 이모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우리 엄마는 5자매의 넷째입니다. 이모들끼리 나이텀은 2~4살 사이로,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또 작은 이모가 외국에 가 계셔서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지만, 서로 돈도 잘 빌려주고, 맛난것도 먹고 다니고, 되게 찐~한 우정을 자랑하시는분들이죠.

워낙 성격이 호방하신분들이라 저도 어릴적부터 이모들하고 전부 친하게 지냈습니다. 저랑 비슷하게 에고가 강한 타입인 작은 이모와는 좀 부딪혔지만, 그래도 사이가 나쁜편은 아니었고, 나머지 이모들은 전부 저의 강한 에고를 비교적 잘 존중해주시고, 나이에 맞지 않게 친구처럼 잘 대해주셨죠.

그런데 작년, 예순 아홉 큰 이모에게 무려 또래 남자친구, 애인이 생겼습니다. 이모부는 10년전에 돌아가신데다, 사촌형 둘은 둘다 결혼해서 독립한 상태라서,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라 생각이 들어 그냥 덜 외롭고 좋으시겠네. 우리 이모 나이도 있는데 능력 대단하시네. 하고 넘겼었죠. 당시 당장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남 신경 쓸 상태가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 엊그제 저, 막내, 셋째 이모와 엄마 이렇게 넷이 오랜만에 식사를 하는데, 큰 이모 얘기가 나왔어요. 근데 제 생각과 달리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두 이모들은, 큰 이모가 남자친구가 생긴걸 엄청나게 탐탁치 않아 하고 있더라구요. 심지어 큰이모 아들, 즉 사촌형들마저 그렇게 생각한대요.

이유는

할머니 제사도 남자친구 때문에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안 참여한다
자기 손주들도 남자친구랑 노느라 얼굴보러 잘 가지도 않는다
애 좀 맡아줬으면 할때도 자기 놀러 가야 한다고 거절할때도 있다더라
자매 카톡방에도 잘 안 온다
결정적으로 그 나이에 남자 만나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게 주책이다 이런 감정이 아무래도 더 커보이시더라구요.

그런 얘길 듣고, 솔직하게 마음속으로 드는 생각을 이모들한테 얘기해줬습니다.



"근데 이모들, 우리 넷 다 그런 훈수 두기에 큰 이모에 비해 아직 인생 너무 덜 사신거 아니에요? 둘다 자식들 아직 집에서 출퇴근하고, 셋째 이모는 이모부도 정정하게 건강하시잖아요. 큰 이모처럼 남편 자식들 다 떠나고 혼자 살아본적도 없으면서,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우린 모르는거잖아요. 난 결혼도 못했지만

솔직히 말하면요. 내 생각엔, 큰 이모는, 이미 인생이라는 하나의 업을 훌륭하게 마치셨고, 그래서 이모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해줘야 할 게 아무것도 없으며, 누구보다도 더 자유로워질 자격이 있어요.

가난한 집의 5자매 맏이로 태어나서 동생들 뒷바라지해서 사회 보내놓고, 결혼해서 남편 뒷바라지해서 회사 키우는거 돕고, 건장한 사내 애 둘 낳아서 건강하게 키워서 장가 보내고, 할머니, 남편 먼저 보낸 다음 장사 치러주고 한해도 안 빼고 제사 지내고, 그러는 동안 사회인으로서 열심히 돈 벌어서 세금도 꾸쭌히 냈잖아요.

그 힘든 시대에 태어난 한명의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언니로서, 자식으로서, 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시민으로서 해야 할 모든 도리를 다 했고, 그 와중에 사고 한번 크게 안 치고 나쁜짓 한번 안한 사람이 우리 큰 이모잖아요..

그러니까 큰 이모가 어떻게 사시건 간에 이제 놔줍시다.  제사는 이모들이 더 열심히 지내고, 힘들면 차라리 형들이나 나한테 더 많이, 더 열심히 도와달라고 해요. 그건 이제 우리 몫이에요.

이모들 전부 다 고생하는거 알고, 서운한 마음 이해하는데, 요새 7~8살 먹고도 자기 인생 찾겠다고 자아실현을 위해 시간 쓰는 세상인데, 남은 날 많은 사람들이 짐 많이 져서 이제 한명씩 자유롭게 보내줍시다. 백세시대에 이모가 30년이라도 자기 인생 살게 좀 두자구요."



제 얘길 듣고도 이모들은 별로 공감하는 눈치가 아니였습니다만, 일단 집에 가서 생각은 한번 해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큰 이모에게서 요새 건강은 좀 괜찮아 졌냐고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셨는데, 저는 건강해진만큼 마침 큰 이모의 연애에 건투도 빌겸 이 글을 씁니다. 내가 아는 60대 최고의 여장부 우리 큰 이모, 부디 행복하고 자유로운 노년을 보내시길!



38
  •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군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351 게임어제자 블소 이벤트 던전 플레이 후기 2 뜨거운홍차 19/06/27 5069 0
9350 음악[팝송] 아비치 새 앨범 "TIM" 1 김치찌개 19/06/27 4557 0
9349 기타입대 상점...LG 노트북 15GD870-PX50K 팝니다. 31 동방요정 19/06/26 5206 19
9348 음악하루 한곡 048. 여행스케치 - 옛친구에게 1 하늘깃 19/06/26 4891 3
9347 게임파판14 새 트레일러가 나왔었네요. 2 뜨거운홍차 19/06/26 5047 1
9346 경제첫글입니다: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규제, 실효성을 위한 조치가 필요해-한국노동연구원의 자료 7 신어의원리 19/06/26 4138 1
9345 게임생각해보면 기적의 분식집 주인공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7 뜨거운홍차 19/06/25 4856 4
9344 음악하루 한곡 047. 이승환 - 晩秋 3 하늘깃 19/06/25 4879 1
9343 일상/생각매일매일 타인의 공포 - 안면인식장애 25 리오니크 19/06/25 4574 20
9342 일상/생각시대가 많이 흘렀다고 느끼는 때가 언제신가요? 20 왼쪽을빌려줘 19/06/24 5069 0
9341 기타2019 GSL 시즌2 코드S 결승전 우승 "박령우" 4 김치찌개 19/06/23 3891 0
9340 일상/생각큰 이모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13 Jace.WoM 19/06/23 6160 38
9339 음악[팝송] 에이브릴 라빈 새 앨범 "Head Over Water" 5 김치찌개 19/06/23 4775 1
9338 음악[클래식] 쇼팽 프렐류드 28-4 '질식' Chopin Preludes Op.28 No.4 2 ElectricSheep 19/06/23 4739 0
9337 오프모임6.25(화) 야구장 관람벙 12 무더니 19/06/22 5152 6
9336 음악지금 만나러 갑니다 2 바나나코우 19/06/22 4277 0
9335 게임도타 언더로드 해본 후기 2 Xayide 19/06/22 6116 1
9334 일상/생각그래도, 싸우러 갑니다. 4 The xian 19/06/21 3907 12
9333 음악[팝송] 칼리 레이 젭슨 새 앨범 "Dedicated" 6 김치찌개 19/06/21 4402 1
9332 일상/생각여러분이 생각하는 '상식'은 무엇인가요? 25 Merrlen 19/06/21 5518 1
9331 스포츠사사키 로키, 야구의 신이 일본에 보낸 선물 19 温泉卵 19/06/20 22284 19
9330 스포츠언더독의 승리 5 이노우에나오야 19/06/20 3552 2
9329 과학/기술 Qt 5.13.0: C++로 개발해서 웹브라우저에서 실행하자! 6 T.Robin 19/06/20 6584 1
9327 기타책 나눔 합니다. 5 동청 19/06/19 3775 17
9326 음악계절학기 6 바나나코우 19/06/19 4381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