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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7/30 00:07:51수정됨 |
Name | 메존일각 |
Subject | 일반인이 이해하는 이순신의 거북선 형태 |
최근 개봉한 모 영화의 논란을 보노라니, 문득 일반인이 이해하는 충무공 이순신의 거북선 형태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글이니 두서는 많이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정조대왕은 충무공 이순신 덕후였습니다. 1793년 이순신(이하 공(公))에게 정1품 영의정을 가증했고, 내탕금까지 내어가며 공의 행적, 일화, 인품, 전언 등 가능한 것들을 모두 모아 편찬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1795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이하 전서)>가 출판됩니다. 정조연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전서>는 모두 14권 8책, 원집 8권과 부록 6권으로 되어 있고, 권두(李忠武公全書卷首) 중 도설(圖說)편에는 거북선 그림 두 장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는 통제영거북선(統制營龜船)이고 다른 하나는 좌수영거북선(左水營龜船)입니다. 그리고 그림들 밑에는 설명이 붙어 있고, 이 기록이 거북선에 대한 가장 자세한 묘사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통제영거북선' [통제영거북선] 도설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지금의 통제영 거북선은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나왔지만 역시 치수의 더하고 덜한 것이 없지 않다. 쉽게 풀자면, 통제영거북선은 공이 최초로 제작한 거북선 방식으로 건조되었으나 정조대의 치수는 좀 달라졌다는 겁니다. 이어서 다음의 설명이 붙습니다. 공이 배를 창제한 곳은 실제로 전라좌수영이었다. 지금의 좌수영거북선은 통제영거북선 제도와 비교할 때 서로 약간 다른 부분이 있지만 좌수영 거북선의 모습을 아래에 추가한다. 거북선을 처음 만들 때 공의 지위는 전라좌수사였습니다. 공은 자신의 진영에서 거북선을 창제했지만 <전서>가 간행되던 정조 연간은 이때로부터 20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공이 만든 거북선은 기존의 거북선과는 달랐다 해서 '별제귀선(別製龜船)'이라고도 부릅니다.) 때문에 거북선은 통제영(지금의 경남 통영시)에서 (치수는 달라졌지만) 원형대로 건조되고 있었고, 200년 후의 전라좌수영에서는 공이 처음 만든 거북선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건조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공이 거북선을 만들 때의 지위가 전라좌수사였기 때문에 형태는 다소 달라졌어도 달라진 모습을 실어둔다는 거지요.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전라좌수영거북선' [전라좌수영거북선] 도설 첫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길이와 너비 등은 통제영 거북선과 같으나, 다만 거북 대가리 아래에 귀신의 대가리를 조각하여 달았다. 크기는 통제영 거북선과 같은데, 거북 대가리 밑에 흔히 도깨비라고도 얘기하는 귀신 대가리를 조각하여 달았다는 겁니다. 거북선 크기에 대한 약간의 보충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임진왜란 때와 비교했을 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의 기본 군선(軍船)이었던 판옥선과 판옥선을 기초로 제작된 거북선의 크기는 점점 커져갑니다. 임란 발발 당시 수군의 최고 지휘관은 정3품 수군절도사(이하 수사)였습니다. 하지만 전라좌도, 전라우도, 경상좌도, 경상우도 하는 식으로 관할구역이 나뉘어 수사들은 모두 동일한 직급이라 상급자가 없었습니다. 작전을 짤 때도 상의에 의해, 협조에 의해 전투에 임해야 하여 어려움이 컸습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곧 종2품 통제사를 따로 두게 되고 초대 통제사로 이순신이 임명됩니다. 아무튼 수사가 탑승하던 기함 판옥선의 저판(底板; 바닥판) 길이는 50~60자(약 15~18m) 정도였는데, 정조 연간쯤 되면 약 60~70자(18~21m) 정도까지 커지고 통제사가 탑승하는 기함 판옥선의 저판은 70~80자(21~24m) 수준까지 현격하게 커집니다. 임란 당시 수사의 기함 판옥선 크기가 정조대에는 보통 판옥선 수준밖에는 안 되지요. <전서>에 실린 거북선의 치수 역시 보통 판옥선에 비례하여 커졌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설명에는 없지만 그림으로 묘사된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대가리는 위로 뻗은 ㄱ자 형태입니다. 통제영 거북선의 대가리는 앞으로 뻗은 형태였지요.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 등장했던 거북선 (1985) 제가 어렸을 적 알고 있던 거북선은 ㄱ자 대가리의 거북선이었습니다. 조선왕조500년부터 여러 다큐멘터리, 학습서 등에서 이 대가리 모양의 거북선이 등장했습니다. 당장 용산 전쟁기념관의 거북선도 이런 형태입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전라좌수영 거북선 21세기에 들어서며 미디어에서 하나 둘 ㅡ자 대가리의 거북선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데 이런 형태의 거북선은 몹시 낯설었습니다. 대가리가 ㄱ자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지금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이 미디어에 등장하면 세부 외형은 다를지언정 대가리는 대체로 ㅡ자로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ㄱ자 대가리 거북선에 익숙합니다. 미디어물로부터 파생된 그릇된 정보에서 영향을 받은 탓이고, 이런 그릇된 기억을 수정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제가 <전서>에 실린 두 가지 형태의 거북선 그림을 처음 접했을 무렵 두 그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임진왜란 1592'(2016)에 등장한 거북선. 개판에 창칼이 어지럽게 꽂힌 것까지 고증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물론 거북선의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 2층설이니 2.5층설이니 3층설이니 하며 설왕설래합니다. 기적처럼 원균이 처참하게 패배한 칠천량해전이 벌어졌던 거제도 근방해저에서 거북선 파편이 발견된다면 모를까, 그 전까지 거북선 구조는 영원히 알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당장 전라좌수영이 있던 전남 여수시에서는 거북선 2층설을 밀고 있고,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시가 속한 경상남도에서는 거북선 3층설을 밀고 있습니다. 각 기초지자체와 광역지자체에서 별도의 연구용역을 통해 보고서도 펴냈습니다.(여담인데 보고서의 질은 여수시 것이 훨씬 우수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거북선이 3층이었을 것으로 믿지만, 실제로는 2.5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단적으로 아직까지 판옥선이나 거북선의 노를 서서 저었는지, 앉아서 저었는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저었는지, 한 방향으로 서서 저었는지 등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력 군선이었던 '세키부네(關船)' 입면도. 거북선의 내부 구조가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두서없는 이 글을 슬슬 마무리 지어볼까 합니다. 학술적 수준에서 요구될 디테일한 부분은 일반인들이 한 번 봐서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잘 갖지 않습니다. 거북선이 몇 층이냐 하는 것은 내부 구조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외형과는 큰 관련이 없고, 모두가 안 보이는 부분까지 굳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디까지 외형을 디테일하게 묘사해야 되는가는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학술자료가 아닌 창작물에 대해 고증을 너무 엄격하게 요구해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저는, 대표적인 특징(signature) 몇 가지는 가급적 기록대로 원형대로 묘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리커처를 그려내듯 중요한 포인트 몇 가지 정도는 짚어내야 한다고 보는 거지요. 거북선을 예로 들면,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대가리이니 이 부분의 묘사는 신경을 써야 된다는 겁니다. 스치듯 지나가도 특징 몇 가지는 기억에 선명하게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구가 몇 개인지, 노가 몇 개인지,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얼마인지는 알기도 어렵고 보면서도 기억에 안 남습니다. 또 거북선 높이가 얼마인지는 어차피 아무도 모릅니다. 알았다면 몇 층 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질 리 없지요. 허술한 마무리.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한 거북선의 대가리는 앞으로 곧게 뻗은 형태였다. 거북선의 외형을 떠올릴 때는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무방하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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