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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0/02 14:31:32
Name   kaestro
Subject   귀멸의 칼날, 액션씬이 실패한 소년만화의 애니메이션화
원래는 어제처럼 탐라에 글을 쓰려 했는데, 500자를 훌쩍 넘어버리더라구요...

그런데 글은 쓰고 싶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어 아쉬워서 마무리 지어봅니다.




귀멸의 칼날은 굉장히 때깔이 고운 작품입니다. 역시 ufotable이에요.

귀멸의 칼날에서 나오는 장면 장면은 굉장히 매력적인 그림으로 가득차있고, 애니메이션은 부드럽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의 최대 단점은, 액션씬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년만화라는 태생입니다.

우리는 액션씬이 아름답기 때문에 보지 않습니다.

저는 인물간의 갈등이 물리적으로 부딪히면서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르겠다는 긴장감을 스크린으로 온전하게 표현할 때 좋은 액션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멸의 칼날은 때깔만 고운 최악의 액션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는 원더우먼이 생각나네요. 둘 사이에 비슷하게 때깔은 굉장히 곱고, 캐릭터 개개인은 매력적이지만 액션씬은 끔찍했습니다.

제가 이런 쪽으로 조예가 깊지 못하지만, 두 작품 모두 슬로우 모션을 집어넣을 타이밍이 엉망이라 없느니만 못한 액션씬을 만들어낸다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원더우먼은 주인공이 멋진 움직임을 하면 슬로우 모션을 넣으면서, 어때 이 장면 겁나 멋있지?를 강조합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원더우먼은 총알이 날아오는 장면마다 슬로우 모션 집어넣으면서 이를 막아내는 원더우먼을 클로즈업하면서 주인공의 강함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은 인상이 남아있네요.(본 지 오래돼서 정확하지 않음에 미리 사죄드립니다)

그런데 이런 강함은 최초의 한 장면에서 필요하고, 그 이후부터 비슷한 장면에서 슬로우모션이 지속되는 것은 지루함을 양산합니다.

총알을 막을 수 있는지 모를 때 원더우먼이 총알을 막아내는 장면은 긴장감을 형성하고, 막아냈을 때 감탄을 끌어냅니다.

이렇게 강조한 장면 이후부터 관객들은 이미 원더우먼이 날아오는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뇌리에 각인된 상태입니다.

그러니 비슷한 장면에서 이미 총알을 막을 수 있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긴장감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장면을 슬로우 모션, 클로즈업과 같은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은 지루한 반복 노동일 뿐입니다.

귀멸의 칼날은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해야 액션씬에서 긴장을 유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예쁜 그림이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만 잔뜩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사족으로 이건 ufotable이라는 제작사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회사 작품은 그림은 진짜 예쁜데 진짜진짜 재미가 없어요.)

귀멸의 칼날은 우선 슬로우 모션을 쓰는 것부터가 되게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1편에서 주인공이 도깨비 사냥꾼에게 쓰러진 뒤 도끼가 날아오는 장면에서 슬로우 모션이 한 번 들어갑니다. 이는 도끼가 날아오는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서겠죠.

그런데 그 도끼가 날아오는 것을 사냥꾼이 소리를 듣고 눈치 챈 시점이 몸에서 굉장히 많이 떨어져있고, 이 도끼가 사냥꾼의 머리 오른쪽에 도착하는데까지 애니메이션 상으로 4초가 걸립니다.

만약 여기서 도끼를 눈치채는 시점이 사냥꾼이 고개를 살짝 틀어야만 피할 수 있는 시점이고, 사냥꾼과 도끼가 같은 컷에 드러나도록 장면을 구성한 뒤 여기서부터 슬로우모션을 4초 넣으면 어떨까요? 과연 저 사냥꾼이 고개를 트는 것으로 도끼를 피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은 도끼를 하늘에서부터 빙글빙글 돌리면서(사실 도끼가 위협적이지 않게 무슨 물레방아에서 돌고있는 것 같은 연출도 끔찍한 수준입니다) 사냥꾼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줌인하면서 강조합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사냥꾼이 도끼를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장면은 0.1초도 안됩니다. 이 화면 구성에서 제일 중요한 사냥꾼이 도끼를 피하는 순간이요.

제가 이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게 된 9화 같은 경우는 이야기하고 싶은 장면이 너무너무 많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주인공이 검으로 공을 꿰뚫는 장면입니다.

공이 날아오는 순간부터 갑자기 주인공은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열가지 존재하는 품세 중에서 최속을 자랑하는 찌르기 기술! 전집중 물의 호흡, 칠의 형 물방울 파문 찌르기!"

대사만 보셔도 굉장히 긴 것을 아실 수 있겠죠? 이 장면에서 공을 던지는 시점부터 주인공이 검으로 공을 꿰뚫는 시점까지는 무려 27초가 걸립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던진 공이 약 144km일 때 타자한테까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0.4초라 합니다.

그러면 최소한 이 장면에서 감독은 생각이 있으면 공이 날아가는 장면을 보여줄 때 공이 회전하는 속도를 늦추고, 공이 회전하는 소리를 아예 없애거나 마찬가지로 느리게하는 연출은 해야합니다. 이건 아주 기초적이예요.

근데 이 장면에서 공이 슬로우모션이 없이 멀쩡하게 회전하고 날아오는 시간은 무려 3초나 됩니다. 그러니 공이 날아오는 장면만 봐도 참 한숨이 나오는 액션씬 구성이예요.

이 장면을 넣을거면 공이 던져지는 순간, 공이 날아서 주인공과 한 장면에 도착하는 순간 이렇게 짧게 구성해서 내보냈어야죠.

이것만 해도 충분히 끔찍한데 귀멸의 칼날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액션씬의 긴장감을 대사를 통해 스스로 떨어뜨립니다.

위에 적은 저 대사를 다 치면서 공을 꿰뚫는 장면을 보여주면, 우리는 그 장면을 보기 전에 주인공이 어떤 동작으로 위기를 헤쳐나갈 지 미리 준비가 다 돼있는 상태에서 맞이하게 됩니다.

공포영화에서 "자 이제 여기 위에서 하얀 옷에 머리가 긴 얼굴이 없는 귀신이 튀어나옵니다"와 같은 대사를 슬로우모션으로 넣어두고, 그 뒤에 귀신이 등장하면 세상 누가 그 영화를 보면서 놀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사족을 하나 더 붙이자면, 이 동화를 구성한 사람이 움직임에 대해 기초적인 이해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찌르기 동작을 하는 주인공은 팔꿈치를 한껏 펼친 상태에서 허리의 회전을 통해 검을 뒤로 당긴 뒤, 팔을 앞으로 내지릅니다.

찌르기 동작을 한다면 팔꿈치를 접으면서 뒤로 허리를 돌리고, 앞으로 허리를 돌리면서 접은 팔꿈치를 펼쳐야합니다.

권투선수가 펀치를 취하는 자세를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저런 장면을 집어넣으면서 주인공의 검술이 얼마나 위력적인지에 대해 연출하려한다니 기가 찬 노릇입니다.)

이 장면 말고도 주인공이 핀치인 장면들 마다, 화려한 액션씬을 넣기에 앞서서 이 애니메이션은 계속 슬로우 모션을 넣으면서 내가 펼칠 기술이 어떤 기술인지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액션씬이 화려하면 사실 저는 스토리 흐름이 좀 이상하더라도 그런 작품을 곧잘 보는 편입니다. 대표적으로 베놈이 그렇습니다.

베놈은 스토리는 진짜 어처구니가 없지만 베놈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 싸울지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페이트 제로라는 소설을 굉장히 재밌게 읽고 ufotable이 만들어놓은 애니메이션에 굉장히 실망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만화책도 한 번 챙겨볼 것 같습니다.

그냥 볼 가치가 없어보이는 작품이면 얼마 안 보고 때려쳤을 것 같은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아 글을 주절거리게됐네요.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모자란 글 여기까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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