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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10/08 16:47:48 |
Name | 치리아 |
Subject |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을 읽고 |
"아캄이 옳았소. 때로는 오로지 광기만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오." - 배트맨,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에서. 그래서 멍하니 있다가, 과거에 썼던 글이라도 올려보자 해서 써봅니다. 이 글은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읽고 그 감상을 쓴 독후감입니다. 과거에 학교 독후감대회에 냈다가 씁쓸하게 탈락했죠. 대회 규정에 '수상작의 저작권은 시상일로부터 주최측에 귀속됨'이라고 적혀있습니다만, 비수상작에 대한 말은 없었으니 이 글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마침 2019년 개봉한 영화 '조커'도 광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읽고 제가 느낀 것은 상당히 다르긴 합니다만, 나름 시의성을 가진(?) 것이라 생각하고 올려봅니다. 아래부터 독후감상이고, 과거에 제출했던 것 토씨 하나 안고치고 그대로 옮겼습니다. 고치고 싶은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때의 감상·문장과 지금의 감상·문장은 다를테니까요. 반말어투인 것은 양해를 구합니다. 내가 작품을 읽으며 집중한 것은 광기였다. 우리는 광기를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정상적인 것이 당연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강변했듯, 누군가가 미쳤다고 정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다름’을 배척하는 것이다. 권력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갈라지면, 비정상은 교정이나 고립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때로는 ‘정상’이 은폐하거나 말하지 않는 진실을 ‘비정상’이 보여줄 수 있다. 중세의 궁정 광대는 미친 척을 하면서 영주를 풍자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기이함 속에서 재치와 통찰을 슬쩍 내밀고 독자들을 고민에 빠뜨린다. 광기에 대한 다른 함의도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어찌할 수 없는 파멸의 운명이나 ‘형언할 수 없는 존재’를 접하고 광기에 빠져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광기가 사실은 연약한 인간의 정신과 뇌의 ‘자기방어’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내보인다. 그래픽노블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의 주인공 배트맨은 광기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시련을 극복하여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배트맨은 ‘때로는 광기 속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광기가 영원한 광기가 아닐 수도 있고, 광기가 은폐된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광기가 실제론 자신을 보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광기와 혼돈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성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섭고 불쾌하더라도 광기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동생과 자식을 죽인 메데이아는 악녀의 대명사이지만, 광기에 빠진 여인이기도 하다. 사랑에 미쳐 동생을 죽이고, 복수에 미쳐 자식을 죽였다는 서사는 광기 그 자체다. 물론 작품 속에서의 메데이아는 동생도 자식도 죽이지 않았다. 다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데이아는 비정상으로 ‘규정’된 사람이다. 작품을 시작하는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갈팡질팡하고 엇나간다. 해야 할 말도 지금의 시간도 잊어버리고 횡설수설하는 메데이아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작중의 사람들도 메데이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코린토스 사람들은 메데이아가 규범을 지키지 않고 기이한 사술을 쓰는 이상한 여인이라며 배척한다. 사랑하는 이아손 역시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꺼린다. 코르키스의 남은 사람들에겐 배반자이고, 망명한 코르키스의 사람들에게는 원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작품을 읽을수록 ‘미친 여인’이자 문제적 인물인 메데이아야말로 가장 제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정상인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권력을 위해 인륜을 저버리는 크레온 왕과 아카마스, 질투와 증오에 빠진 아가메다와 글라우케, 다름을 배척하고 희생양을 찾는 코린토스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자유분방하고 이질적이기에 광기로 규정된 메데이아는 다수의 은폐된 광기를 드러낸다. ‘머리를 풀고 건방지게 걷는’ 교만한 여인을 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는다. 메데이아를 배척하고, 추방하고, 자식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죄를 뒤집어씌우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비인간적이고 잘못된 체제이다. 자신들의 터전이 죄악 위에 세워진 체제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외면한다. 파멸이 다가온다는 불안에 초조해하면서도 근원을 대면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이피노에가 잘 살아있다는 서툰 거짓말을 믿고, 메데이아와 코르키스인을 위협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광기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 광기는 글라우케의 경우처럼 결국 극복되어야 할 광기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포기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 대가는 치르게 된다. 크레온 왕은 ‘코린토스의 미래에 대한 우려’로 여성들의 시대를 막아낸다. 크레온 왕은 그를 위해 ‘고통스럽게도’ 딸을 죽이고 아내를 폐인으로 만들어버린다. 코르키스에서도 압시르토스를 향해서 같은 일이 벌어졌고, 이아손도 결국 메데이아와 두 자식을 버린다. 메데이아는 압시르토스의 비극에 코르키스를 떠났지만, 코린토스에서도 같은 비극을 당하고야 만다. 코르키스와 코린토스의 정당화에서 떠오르는 체제가 있다. 바로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끊임없이 내부의 적을 만들어 ‘비정상’을 배제한다. 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공교롭게도 파시즘은 열정과 광기로도 표현된다. 파시즘이라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소련과 공산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에서도 서로를 인민의 적으로 의심하고 숙청했다. 나치 독일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동독에서 살아온 작가의 삶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잘못된 체제는 잘못된 인간을 낳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며 모두가 광기를 품고 살아가게 만든다. 로이콘처럼 소극적으로라도 그를 방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메데이아 같은 광인만이 그 진실을 마주하고 발설한다면, 다른 광기의 결과로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고통스럽더라도 광기를 직시하고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다른 세상만의 이야기일까? 사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도 멀리는 해방기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죄로, 가까이로는 노동자·빈민을 비롯한 힘없는 이들의 희생으로 이룩된 면이 있다. 88올림픽을 위해 쫓겨나야 했던 수많은 철거민이 있는 한, 코린토스가 범죄를 딛고 서 있듯 88올림픽의 영광과 자부심에는 죄와 빚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외면되고 부정된 존재들이 바로 우리가 만든 메데이아들이다. 작품의 번역명은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이다. 이 작품이 메데이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 모든 ‘악녀’-악녀로 지칭되는 여인들을 위한 변명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변명에 광기를 추가하고 싶다. 어떤 광기에 대한 변호이자, 어떤 광기에 대한 경고로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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