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0/29 22:55:27수정됨
Name   치리아
Subject   시몬 볼리바르의 절망
 요즘 뉴스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칠레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칠레 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사회불안, 정치적 불안정 등으로 악명높죠. 칠레 뉴스를 보다가 문득 시몬 볼리바르의 어록이 떠올랐습니다.


 시몬 볼리바르. 남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물론 메소티소에게는 영웅일지언정 원주민 입장에서는 곱게 볼 수 없는 인물이고, 또 독재자로서의 면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이상만큼은 누구나 인정할만한, 한 시대를 풍미한 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의 독립의 맹세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의 명예,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내 심장과 팔뚝은 에스파냐가 우리를 속박한 사슬을 깨뜨릴 때까지 단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라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맹세였지요.


 한국에서 유명한 그의 어록으로는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셋 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나 볼리바르다."가 있습니다. 이건 죽기 직전에 의사에게 남긴 유언이라고 하죠.
 한국에서 또 유명한 어록이 다름아닌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했을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건 한국에서는 주로 보수언론 내지 보수식자들이 혁명무상을 이야기하면서 쓰는 경향이 있어보이더군요. 그런데 이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나왔을까요?


 다음은 시몬 볼리바르가 1830년 11월 9일 부친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가 1830년 12월 17일 사망했으니, 거의 사망 직전에 남긴 편지죠.
 대부분 의역입니다. 특히 마지막에서 2번째 문장은 저도 잘 몰라서 완전 의역을 했는데, 지적해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As you know, I have led for twenty years and have obtained only a few certain results: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난 20년을 살아오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America is ungovernable.
아메리카는 통치할 수 없는 땅이다.

He who serves a revolution plows the sea.
(이곳에서) 혁명을 꿈꾸는 것은 바다에서 쟁기질하는 것과 같다.

The only thing one can do in America is emigrate.
아메리카에서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이민뿐이다.

This country will fall unfailingly into the hands of the unbridled crowd and then pass almost imperceptibly to tyrants of all colors and races.
이 나라는 고삐풀린 대중의 지배로 끝없이 추락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만인을 억압하는 폭군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다.

Devoured by all crimes and extinguished by ferocity, the Europeans will not deign to conquer us.
온갖 범죄가 횡횡하고 폭력으로 자멸하는 한, 유럽인들은 우리를 정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If it were possible for one part of the world to return to primitive chaos, this would be the last period of America."
만일 세상의 어느 한 곳이 원초적 혼란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아메리카의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남아메리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후세인인 우리들이 보더라도 그 안에 깔린 좌절과 환멸을 느낄 수 있는 흉흉한 글입니다. 거의 저주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죠;;

 다행히 현실은 시몬 볼리바르가 저주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여전히 남아메리카 각국이 문제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씁쓸함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시몬 볼리바르 개인, 평생을 바쳤던 과업을 말년에 스스로 부정하게 된 이상가의 절망만으로도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론으로만 보자면, 진보든 개혁이든 혁명이든 그 전제에서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그렇지 못했기에 사람들을 위해 나섰다가도 실망하고 이른바 '변절'한 사람들도 정말 많습니다. 구한말 조선을 개화하겠다던 이상가들이 좌절하고는, 조선민족은 희망이 없다며 친일파가 되버린 일들이 역사 속의 가까운 예시겠지요.

 그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잘 드러내주는 씁쓸한 역사의 한 부분이라 생각해 소개해봅니다.



12
  • 몰랐던 인물을 알게 됐어요
  • 이 입체성의 중간 과정엔 무엇이 있었을까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223 사회(인터뷰 영상)상대도 안되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친 진짜 이유는? 2 치즈케이크 23/10/25 1604 0
13698 일상/생각[설문]식사비용, 어떻게 내는 게 좋을까요? 7 치리아 23/04/01 1905 0
11192 게임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가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었네요. 13 치리아 20/12/03 3897 0
10844 일상/생각'문화적 전유' 개념을 반대하는 이유 3 치리아 20/08/08 5593 9
10401 의료/건강코로나19 치료제 아비간 관련 청원 2 치리아 20/03/19 5154 0
10337 정치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 개표가 끝났습니다. 3 치리아 20/03/01 4133 2
10315 문화/예술수메르의 '속담' 3 치리아 20/02/22 4884 11
10302 역사고조선 멸망 주역들의 후일담 11 치리아 20/02/17 5903 8
10284 정치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개표가 끝났습니다. 6 치리아 20/02/13 4983 4
10028 역사역사 교과서 속 신문들, 어디로 갔을까? 2 치리아 19/11/25 5264 6
9970 일상/생각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강연 소감 4 치리아 19/11/10 4716 18
9917 역사시몬 볼리바르의 절망 6 치리아 19/10/29 4418 12
9886 음악뮤지컬 데스노트-게임의 시작/변함없는 진실 1 치리아 19/10/25 7389 1
9805 사회민족주의의 퇴장에 대한 상념 17 치리아 19/10/09 3914 1
9798 도서/문학'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을 읽고 2 치리아 19/10/08 4104 7
9306 철학/종교소앙 조용은의 '육성교'와 '대동종교' 치리아 19/06/12 5980 7
9301 역사조병옥 일화로 보는 6.25 사변 초기 혼란상 2 치리아 19/06/11 6251 11
9294 영화[스포일러]엑스맨:다크 피닉스 얕은 리뷰 5 치리아 19/06/09 4585 4
9313 역사불운한 재상 자파르 5 치리아 19/06/13 5512 7
116 기타나에게 이상적인 커뮤니티는? (부제 : 사람이 이렇게 보수화 되는구나.) 8 치느 15/05/31 10537 0
8825 스포츠(농구)조엘 엠비드의 윈드밀 덩크로 알차게 시작하는 19.2.1 NBA Top10 덩크 2 축덕농덕 19/02/01 3643 0
8824 스포츠(농구)어서와 1위는 두번째지?!- 19.1.31 NBA Top10 Dunks 1 축덕농덕 19/01/31 3514 4
8821 스포츠취미로 NBA 농구 덩크영상을 만들어보고 있습니다(자기만족) 5 축덕농덕 19/01/30 3508 6
2185 방송/연예미드추천- Fargo(메타크리틱 2015 베스트 TV쇼) 2 쵱녀성 16/02/07 6293 1
498 정치'여왕과 공화국의 불화'라는 사설을 읽으면서 13 최종병기캐리어 15/07/02 8491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