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2/12/17 12:16:07
Name   아침커피
File #1   28150327_59BC_4F7C_A00C_235B9969C6B6.jpeg (405.8 KB), Download : 5
Link #1   https://brunch.co.kr/@crmncoffee/12
Subject   너, 히스패닉의 친구가 돼라


캘리포니아 2022 - 11. 너, 히스패닉의 친구가 돼라

처음 가 본 캘리포니아에는 히스패닉이 정말 많았다. 통계로는 캘리포니아 인구의 39%가 히스패닉, 38%가 히스패닉이 아닌 백인이라고 하는데 체감상으로는 히스패닉이 50%는 되는 것 같았다. 길에서도 스페인어가 정말 많이 들렸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 K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시내 한복판의 유니언 스퀘어(Union Square) 광장에 앉아 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말했다.

"와, 히스패닉 정말 많더라."
"많지."
"스페인어 잘 하면 친해지기에 정말 좋겠어."
"아니, 하긴 하되 잘 하면 안 돼. 어설프게 해야 돼."

어? 히스패닉과 친해지려면 스페인어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어설프게 해야 한다니 무슨 말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물었다.

"왜?"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면 원래부터 스페인어 잘 하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해버리고 말거든. 그런데 누가 들어도 어설픈 외국인 발음으로라도 어떻게든 스페인어로 말하려고 노력하면 그걸 좋아해."

아하, 그러니까 외국인이 한국에 여행 와서 어설프게라도 "안녕하쉐요우 캄솨함니다" 라고 한국어로 인사하면 그게 좋게 보이는 것과 같은 거라는 거지. 이해가 갔다.

K와의 그 대화로부터 6일 후, 긴장되었던 학회 일정을 다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소살리토라는 마을 구경을 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가 되어 큰 길가에 있는 햄버거 집에 들어갔다. 식당은 멕시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의자에 놓여 있는 선인장 모양 장식이 여기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깔리뽀르니아의 산 프란치스코라고 외치고 있는 듯 했다. 종업원들도 다 히스패닉이었고 영업 허가증으로 보이는 종이도 영어와 스페인어 두 버전으로 벽에 붙어 있었다. 내 앞에 줄을 서 있던 백인 할머니의 주문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햄버거랑 루트 비어 주세요."
"14.57 달러예요."
"여기요."

돈을 내고 얼마를 기다리자 카운터에서 내 번호를 불렀다. 번호표를 내고 음식을 받아서 내 자리로 가려는데 카운터 뒤로 나에게 음식을 준 히스패닉 요리사가 보였다. 순간 K가 해 준 말이 생각났다. 짧은 시간이지만 엄청 고민을 하다가 내가 크게 말했다.

"그라시아스! (gracias, 고마워요!)"

무뚝뚝해 보이는 히스패닉 요리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순간 긴장이 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이상한 발음으로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으면 어쩌지?' 바로 그 순간 요리사가 눈은 계속 도마를 보면서 크고 쾌활한 목소리로 쿨하게 대답했다.

"땡스 아미고! (Thanks amigo, 고마워 친구!)"

먼 옛날 대학생 때 배웠던 초급 스페인어는 다 잊어먹었지만 히스패닉의 친구가 되는 데에는 그렇게 그라시아스(gracias), 고맙다는 말 한 마디면 되었다. 아, 쑥스러움과 혹시라도 오해를 사서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과민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일상 속 작은 용기와 함께.

---
캘리포니아 2022 여행기 이전 글 목록

1. 과거라는 외국 ( https://redtea.kr/recommended/120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 https://redtea.kr/free/12827 )
3.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 https://redtea.kr/free/12843 )
4.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 https://redtea.kr/free/12854 )
5. 뮤어 우즈, 직접 가 보아야 하는 곳 ( https://redtea.kr/free/12893 )
6. 맥주 마시던 어린이 ( https://redtea.kr/free/12907 )
7. 내 소리는 다음 사람에게 닿을 것 ( https://redtea.kr/free/12915 )
8. 인생은 운전 ( https://redtea.kr/free/12968 )
9.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https://redtea.kr/free/13064 )
10. 세상이 굴러가게 하는 비용 5.5 달러 ( https://redtea.kr/recommended/1254 )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12-27 07:2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6 문학남자의 詩, 여자의 詩 11 뤼야 15/06/08 8952 1
    881 기타낭만적 사랑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을까? 24 호라타래 19/10/29 6570 20
    574 문학내 것이 아닌 것에 낄낄대며 울기. 메도루마 슌, 물방울 4 quip 18/01/08 6292 8
    1167 일상/생각내 고향 서울엔 11 사이시옷 22/02/14 3788 22
    381 기타내 마음을 바꿔 봐. 39 은머리 17/03/05 6870 11
    1272 일상/생각내 인생 가장 고통스러운 명절연휴 6 당근매니아 23/01/31 2883 33
    992 창작내 작은 영웅의 체크카드 4 심해냉장고 20/08/05 5171 16
    378 일상/생각내 잘못이 늘어갈수록 20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7/03/02 5733 35
    456 일상/생각내가 만난 스승들 #1 - 1994년의 예언가. 22 SCV 17/06/20 5592 18
    464 일상/생각내가 만난 스승들 #3 - 너 내 반장이 돼라 13 SCV 17/07/03 5956 7
    1054 일상/생각내가 맥주를 마실 때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하는 수칙 52 캡틴아메리카 21/01/21 6370 24
    560 일상/생각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눈 9 다시갑시다 17/12/08 7177 20
    1264 역사내가 영화 한산에 비판적인 이유 17 메존일각 23/01/04 3321 16
    1322 요리/음식내가 집에서 맛있는 하이볼을 타 먹을 수 있을리 없잖아, 무리무리! (※무리가 아니었다?!) 24 양라곱 23/08/19 3574 28
    1276 일상/생각내돈내산 뷰티템 리뷰 13 Only 23/02/08 3085 20
    1021 경제내집 마련을 위하는 초년생들을 위한 짧은 팁들 24 Leeka 20/10/21 7364 19
    700 기타냉동실의 개미 4 우분투 18/09/16 5497 15
    339 일상/생각냉장고에 지도 그린 날 4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7/01/06 5975 15
    458 일상/생각냥님 입양기 – 나는 어떻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가 22 *alchemist* 17/06/27 6133 9
    1257 여행너, 히스패닉의 친구가 돼라 5 아침커피 22/12/17 2811 15
    1218 정치/사회너말고 니오빠 - 누구랑 바람피는 것이 더 화나는가? 23 소요 22/06/28 5290 23
    292 의료/건강너무 착한 병 17 눈부심 16/10/25 7855 13
    377 일상/생각너무 힘들었던 일이 끝났습니다. 17 마녀 17/02/28 5291 17
    1299 일상/생각널 위해 무적의 방패가 되어줄게! 9 골든햄스 23/05/07 2835 49
    682 정치/사회넷상에서 선동이 얼마나 쉬운가 보여주는 사례 16 tannenbaum 18/08/14 8577 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