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5/17 03:15:36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142
Subject   캘리포니아 202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캘리포니아 202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비행기를 탈 때의 복장은 편한 게 제일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특히나 장거리를 가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흔히들 쪼리라고 부르는 플립플랍을 신고 바지도 통이 넓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디스크로 고생한 후로는 목베개와 허리 쿠션도 챙겨서 다닌다. 환승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에서 오후 5시 이륙이었는데 샌프란시스코는 그 때가 밤 1시였다. 미국에서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차적응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비행기가 이륙하자 마자 멜라토닌을 먹고 바로 잠을 청했다. 새벽같이 집에서 나왔어서 피곤해서 그랬는지 멜라토닌이 잘 들어서 그랬는지 비행기에서 아주 잘 잤다. 아마도 둘 다 때문이었겠지. 중간에 깨서 기내식을 먹을 때에는 일본 비행기라 간만에 일본어도 써 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주스 오네가이시마스 (주스 주세요)” 정도였지만.

얼마나 잤을까. 시계를 보니 샌프란시스코 기준으로는 아침이었기에 그 때부터는 커피를 마시며 기를 쓰고 깨어 있었다. “고히 오네가이시마스 (커피 주세요).” 창밖을 보니 땅이 보였다. 미국이구나. 주거 지역 바로 옆에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이 없는 산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연, 그것도 그냥 자연이 아니라 대자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연. 이번 미국 여행의 목표 중 하나는 자연이었다. 홍콩에 살면서 도시는, 사람이 만든 물질 문명은 질릴 정도로 보았다. 1 제곱 킬로미터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98명이 살고 홍콩에서는 6300명이 산다고 한다. 한국은 516명.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하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어쨌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알려면 꽃을 좀 볼 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람이 멋지게 가꾸어 놓은 화단의 꽃이 아니라 산, 들, 길가에 스스로 피어 있는 그런 꽃들을 말이다. 사람으로 꽉 찬 도시에서는 자연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연은 사람이 자취를 감춘 후에야 자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무심하고 무정하다. 자연은 사람이 왜 자취를 감추었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김훈 작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인 임진왜란을 다룬 ‘칼의 노래’를 이렇게 시작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비행기는 점점 낮아졌고 내 아래에 있던 구름은 정확히 내 눈높이로 올라오더니 이윽고 하늘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젠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미국에 왜 왔냐는 입국 심사 직원의 질문에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돌아가는 항공권이 있냐길래 보여줬더니 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와서 LA에서 나가냐, LA까진 어떻게 갈 거냐고 물어왔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손으로 운전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더니 그렇게 운전한다고? 하며 되묻고는 오케이, 통과.

시차 덕분에 나중에 돌아갈 때 뱉어내게 될 하루를 벌었다. 회전초밥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짐을 찾아서 입국장으로 향했다. 입국장으로 향하는 금속 문 위에 붙어 있는 문구가 나를 반겨줬다. 웰컴 투 샌프란시스코. 입국 심사 직원에게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마음 속에서 뛰기 시작했다. 차를 빌려서 LA까지 갈 거야.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4
  • 저도 보고 싶네요
  • 글 너무 좋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470 6
14564 사회UN 세계행복보고서 2024가 말하는, 한국과 동북아에 대한 의외의 이야기 13 + 카르스 24/03/26 1040 7
14563 음악[팝송] 맥스 새 앨범 "LOVE IN STEREO" 2 김치찌개 24/03/26 149 1
14560 일상/생각2년차 사원입니다 9 공대왜간공대 24/03/25 975 10
14559 음악[팝송] 피더 엘리아스 새 앨범 "Youth & Family" 김치찌개 24/03/24 106 0
14558 오프모임이승탈출 넘버원 3회차 12 치킨마요 24/03/24 642 0
14557 일상/생각인지행동치료와 느린 자살 7 골든햄스 24/03/24 963 8
14556 요리/음식까눌레 만드는 이야기 10 나루 24/03/23 456 5
14555 오프모임[아주급한벙]신촌 홍곱창or정통집 오늘 19:00 34 24/03/23 916 2
14554 일상/생각아들이 안경을 부러뜨렸다. 8 whenyouinRome... 24/03/23 686 26
14553 정치지금 판세가 어떨까요 를 가늠할수 있는 지표 32 매뉴물있뉴 24/03/22 1900 0
14552 음악[팝송] 저스틴 팀버레이크 새 앨범 "Everything I Thought It Was" 김치찌개 24/03/22 148 1
14551 스포츠태국 전 관람 후 집빈남 24/03/21 480 0
14550 일상/생각와이프랑 덕담 중입니다. 3 큐리스 24/03/21 667 4
14549 게임최근 해본 스팀 게임들 플레이 후기 13 + 손금불산입 24/03/21 480 5
14548 음악[팝송] 리암 갤러거,존 스콰이어 새 앨범 "Liam Gallagher & John Squire" 6 김치찌개 24/03/20 185 1
14547 꿀팁/강좌그거 조금 해주는거 어렵나? 8 바이엘(바이엘) 24/03/20 1105 13
14546 스포츠[MLB] 블레이크 스넬 샌프란시스코와 2년 62M 계약 김치찌개 24/03/20 197 0
14544 의료/건강불면증 개선에 도움되는 멜라토닌 효능 11 후랑키 24/03/19 824 1
14542 역사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9. 나가며 2 meson 24/03/17 225 3
14541 역사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8. 태산봉선(泰山封禪) meson 24/03/16 211 1
14540 음악[팝송] 아리아나 그란데 새 앨범 "eternal sunshine" 2 김치찌개 24/03/16 238 1
14539 일상/생각22살. 정신병 수급자 고졸. 9 경주촌박이 24/03/15 1176 1
14538 역사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7. 선택과 집중 1 meson 24/03/15 182 3
14537 일상/생각건망증,그리고 와이프 1 큐리스 24/03/15 566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