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6/07 01:51:37
Name   아침커피
File #1   aaa.jpg (610.4 KB), Download : 43
Link #1   https://crmn.tistory.com/145
Subject   캘리포니아 2022 - 5. 뮤어 우즈, 직접 가 보아야 하는 곳


캘리포니아 2022 - 5. 뮤어 우즈, 직접 가 보아야 하는 곳

뮤어 우즈 국립 보호 구역(Muir Woods National Monument)은 세상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인 레드우드(Redwood)로 이루어진 숲이다. 이 숲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가 배경인 영화 혹성탈출을 통해서였다. 영화를 보며 ‘도시 바로 옆에 정말로 저렇게 큰 숲이 있다고?’ 하는 궁금증이 생겼었고, 학회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가게 되는 것이 확정된 다음부터는 뮤어 우즈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러던 중 마침 학회 일정 후로 예약해두었던 요세미티 당일 관광이 인원 미달로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요세미티는 다음에 가족과 함께 일정 길게 잡고 느긋하게 가라던 친구 K의 말이 생각나 잘 되었다 싶어 다른 요세미티 관광 상품을 알아보는 대신 뮤어 우즈에 가 보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현지 여행사 관광 상품을 예약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여행사 버스를 타러 숙소를 나섰다. 우연히도 버스 출발 위치가 숙소 바로 옆 골목이어서 참 편했다. 버스를 타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버스는 군데군데 관광 명소에 잠깐씩 멈추며 차이나타운을 거쳐 금문교를 지나 뮤어 우즈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가이드를 병행했는데 입담이 참 좋아서 모든 승객들이 다 즐거워했다. “이제부터 꼬불꼬불한 산길을 꽤 오래 가야 합니다. 바로 옆이 낭떠러지고 가드레일도 없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 운전 잘 해요. 바로 어제 운전면허 땄거든요.”

그렇게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한참 달려서 뮤어 우즈에 도착했다. “한 시간 반 자유시간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일단 버스 사진부터 찍었다. 십몇 년 전 오사카에서 도쿄로 심야버스를 타고 가던 중 휴게소에서 버스를 못 찾아 국제 미아가 될 뻔했던 이후로 생긴 습관이다.

뮤어 우즈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평생에 그런 숨은 처음 쉬어 볼 정도로 공기가 상쾌했고, 산 위라 그런지 꽤 쌀쌀했다. 입구 옆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버스에서 가이드가 뮤어 우즈의 개울은 빗물이 아니라 공기 중의 습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숲이 습하긴 했다. 하지만 뮤어 우즈의 습기는 도시의 끈적거리고 짜증나는 습기가 아니라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상쾌한 습기였다. 본격적으로 걷기 전 입구 바로 다음에 있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커피를 빼먹을 수는 없지. 추운 날씨에 얼어 있던 손이 커피 덕에 따뜻해졌다.

그 후 한 시간 반 동안은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우와, 정말 좋다” 라고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며 걷는 시간이었다. 너무 좋다, 정말 좋다라는 말만 입에서 계속 나왔다. 이 곳에 있는 레드우드들은 70미터 넘게 자란다고 했다. 대충 아파트 30층 높이. 레드우드는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굵기도 해서, 걷다가 발견한 속이 빈 레드우드 밑동 속에는 내가 열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렇게 수백 년 간 하늘로 곧게 굵게 자란 레드우드들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사이를 기분 좋게 걷고 또 걸었다. 너무나도 상쾌했다. 산림욕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 날의 기분은 나중에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보낸 메시지로 남아 있다. “야, 나 피톤치드 인간이 된 기분이었어.”

걷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 갔다. 전체 코스를 다 걸으면 5시간쯤 걸린다던데 맛보기만 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쉬웠다. 그 날의 일정을 다 취소하고 뮤어 우즈에 하루종일 있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에 맞추어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정작 가이드가 숲을 걷다가 30분이나 늦게 와서 모두들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가이드도 뮤어 우즈가 너무 좋아서 시간도 잊고 한참을 걸었던 걸까.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드레일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다시 지나 다음 목적지인 소살리토로 향했다.

적당히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있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서 그 음식 자체에 빠져들게 되고, 적당히 멋진 경치는 보면서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절경(絶景) 앞에서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다. 비슷한 이유로 뮤어 우즈에서의 시간이 정말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뮤어 우즈를 글로 설명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뮤어 우즈는 말 그대로 ‘좋은’ 곳, 직접 가 보기 전에는 그 어떤 설명을 들어도 상상이 가지 않고 직접 가 보면 그 어떤 설명도 필요가 없는 그런 곳이다. 아쉽게도 글로도, 사진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곳이니 이 곳에는 직접 가 보아야 한다.

---

캘리포니아 2022 여행기 이전 글 목록

1. 과거라는 외국 ( https://redtea.kr/recommended/1202 )
2. 나는 태평양을 볼 거야 ( https://redtea.kr/free/12827 )
3.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 https://redtea.kr/free/12843 )
4.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 https://redtea.kr/free/12854 )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924 7
    15147 정치전농에 트랙터 빌려줘본 썰푼다.txt 5 + 매뉴물있뉴 24/12/22 227 1
    15146 의료/건강일종의? 의료사기당해서 올려요 6 + 블리츠 24/12/21 550 0
    15145 정치떡상중인 이재명 54 매뉴물있뉴 24/12/21 1462 14
    15144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2 셀레네 24/12/19 507 8
    15142 일상/생각플라이트 시뮬레이터로 열심히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7 큐리스 24/12/19 458 2
    15140 정치이재명은 최선도, 차선도 아니고 차악인듯한데 42 매뉴물있뉴 24/12/19 1734 7
    15139 정치야생의 코모도 랩틸리언이 나타났다! 호미밭의파스꾼 24/12/19 347 4
    15138 스포츠[MLB] 코디 벨린저 양키스행 김치찌개 24/12/19 108 0
    15137 정치천공선생님 꿀팁 강좌 - AI로 자막 따옴 28 매뉴물있뉴 24/12/18 694 1
    15135 일상/생각생존신고입니다. 9 The xian 24/12/18 582 29
    15134 일상/생각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5 Picard 24/12/18 395 7
    15133 도서/문학소설 읽기의 체험 -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1 yanaros 24/12/18 264 4
    15132 정치역사는 반복되나 봅니다. 22 제그리드 24/12/18 700 2
    15131 여행[2024 나의 이탈리아 여행기] 0. 준비 7 Omnic 24/12/17 341 7
    15130 정치비논리적 일침 문화 7 명동의밤 24/12/16 844 7
    15129 일상/생각마사지의 힘은 대단하네요 8 큐리스 24/12/16 749 7
    15128 오프모임내란 수괴가 만든 오프모임(2) 50 삼유인생 24/12/14 1831 5
    15127 일상/생각떠나기전에 생각했던 것들-1 6 셀레네 24/12/14 847 5
    15126 정치사람은 용서하랬다.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12 바보왕 24/12/13 1432 25
    15125 IT/컴퓨터모니터 대신 메타 퀘스트3 VR 써보기(업데이트) 9 바쿠 24/12/12 597 5
    15123 정치향후 정계 예상 (부제: 왜 그들은 탄핵에 반대하는가) 12 2S2B 24/12/12 1147 0
    15121 일상/생각나는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싫다. 11 활활태워라 24/12/10 1205 14
    15120 일상/생각아침부터 출근길에 와이프 안아주고 왔습니다. 12 큐리스 24/12/10 865 8
    15119 일상/생각집밥 예찬 2 whenyouinRome... 24/12/09 518 2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